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앞 인도에 설치된 시위자 천막 옆으로 행인이 지나가는 모습. 사진=최동훈 기자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앞 인도에 설치된 시위자 천막 옆으로 행인이 지나가는 모습. 사진=최동훈 기자

4월 18일 오전 9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서울 양재 현대차그룹 본사 앞에 소형 천막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인도를 일부 막고 있다. 행인의 손에 들린 우산이 천막과 울타리 식물에 닿을 듯 아슬아슬 지나갔다. 경부고속도로에서 나와 염곡사거리에서 헌릉IC 방면으로 우회전하는 차량의 운전자 시야를 일부 가릴 수 있을 정도다.

해당 천막은 기아 대리점에서 근무하다 고용계약이 종료된 직원 A씨가 기아에 ‘복직’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시위 용도로 설치했다. 해당 구역을 관할하는 서초구청이 앞서 A씨의 텐트가 불법 설치된 것으로 판단해 철거했지만 A씨는 구청에 항의하고서는 텐트를 다시 세웠다.

A씨는 본사 주변에서 스피커로 운동가요를 크게 틀고 천막과 주변에 각종 내용의 현수막을 걸었다가 과대소음 및 명예훼손 문구 금지 등 가처분 소송 등에서 일부 패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법 소지가 있는 시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기아는 억울하다는 의견이다. A씨의 전 직장인 대리점이 개인사업자에 의해 운영된 곳이기 때문에 기아가 그의 고용 상태에 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A씨가 적법하지 않은 방식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을 펼치며 시위를 이어가는 동안 애꿎은 현대차그룹 구성원과 시민들이 애를 먹는 실정이다.

현대차그룹 직원은 “10년 이상 (시위 현장의) 소음에 시달리고 있다”며 “다른 직원들도 식욕부진, 불면증, 신경쇠약 등을 호소하는 중”이라고 하소연했다.

서울 중구 KT 사옥 앞에 현수막이 걸려있는 모습. 사진=독자 제공
서울 중구 KT 사옥 앞에 현수막이 걸려있는 모습. 사진=독자 제공

시위용 천막 철거 요구에 칼 들고 협박

최근 국내 일부 기업들이 현행법을 오남용해 무분별한 방식으로 이뤄진 시위나 집회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 법조계 등에서는 집회, 시위 등의 자유를 존중하되 타인의 기본권이나 공익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사례를 제재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4월 20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KT와 하이트진로, 쿠팡 등 일부 기업의 본사 앞에서 벌어진 시위나 집회의 적법성 여부로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B씨는 지난 2009년 KT 대리점을 운영하다가 큰 빚을 지고 폐업한 뒤 피해액 보상을 KT에 요구하며 서울 종로구 사옥 앞에서 천막 시위를 벌여왔다. 종로구청이 지난해 11월 천막 철거를 요구했지만 구청 관계자를 폭행하고 칼로 협박하기도 했다. B씨의 천막 시위는 이후 지속됐다.

10년 넘게 서울 서초구 하이트진로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여온 C씨는 소형 트럭에서 숙식하며 확성기로 회사를 비난하고 과격한 표현을 담은 현수막을 곳곳에 걸었다. B씨는 생수업체 대표로서 앞서 하이트진로음료로부터 부당영업행위를 당했음을 주장했다. 하이트진로와 진행한 민사소송에서 일부 승소함에 따라 하이트진로 측이 손해 배상할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C씨는 이를 거부하고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밖에 지난해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의 주변에 입점한 업주들이 경찰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쿠팡 노조가 본사 로비를 점거하고 대표 면담을 요구하는 등 활동을 이어감에 따라 매출 감소, 소음, 담배연기 등으로 인해 겪어온 피해를 호소했다.

사진=독자제공
서울 서초구 쿠팡 본사 앞에 자리잡은 시위용 스피커와 현수막. 사진=독자 제공

‘시간당 3회 경찰개입’ 규정에 1시간에 2번 소음유발

일련의 시위 사례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법원 판결이나 지자체 행정조치 등이 이뤄졌음에도 같은 방식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점이다. 해당 사례들의 위법 소지를 판단할 근거인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이 타인의 기본권과 공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개정돼야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는 이유다.

집시법에는 시위·집회 중 일으킬 수 있는 소음의 음량·빈도 등을 비롯해 구호, 낙서 등의 내용을 규제할 수 있는 조항이 담겼다. 하지만 제재 기준이 애매하거나 회피 가능한 맹점을 보이는 것으로 분석된다. 예를 들어 시위대가 1시간에 3번 이상 소음 기준을 초과할 때 경찰 개입이 가능한 집시법 조항을 악용해, 1시간에 2번만 규정 위반 수준의 큰 소리를 내는 경우가 발생했다.

집시법의 목적인 ‘적법한 집회(集會) 및 시위(示威)를 최대한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집회 및 시위의 권리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온전히 충족되지 않는 모양새다. 이날 현재 국회에 20여건의 집시법 개정안이 계류된 상태다.

법조계에서는 기업이나 일반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시위 행위에 대해 단호한 법적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를 통해 잘못된 행위를 제재하는데서 더 나아가, 타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자신의 권리도 주장하는 등 성숙한 시위·집회 문화가 조성돼야 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익명을 원한 법조계 전문가는 “행정당국이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시위자 앞에서 법 집행자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며 “시위 목적 뿐 아니라 시위의 수단과 방법도 법과 원칙, 상식 등을 지키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