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트럼프 미 행정부는 행정명령을 통해 화웨이와 70개 계열사를 '수출통제명단'에 포함시킨 바 있다. 화웨이와 거래하려면 미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미중 패권전쟁의 흐름속에서 화웨이의 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다. 시장에서는 화웨이가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혹은 버티더라도 크게 휘청일 것으로 예상했다.
힘든 시절을 보낸 것은 사실이다. 지난해 감원열풍에 휘말리는 한편 실적 자체도 하향세를 탔기 때문이다. 런정페이 창업주는 지난해 8월 새로운 경영방침을 발표하며 현재의 상황을 두고 "매우 고통스러운 역사적 시기가 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화웨이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올해만해도 미국에서 열리는 CES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열리는 MWC에서는 삼성전자의 5배에 달하는 부스를 통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스마트폰 등 B2C는 상황이 어렵지만 글로벌 통신장비 시장에서는 여전히 탄탄한 존재감을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중동 등 다양한 지역에서 디지털 협력을 성공적으로 끌어내기도 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사실상 비전 2030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세 가지 비결
화웨이가 미국의 압박을 버텨낸 비결 중 하나는 연구개발에 대한 믿음이다.
20일 펑파이 등 중국 언론에 따르면 런정페이 화웨이 창업주는 최근 상하이 지아통대학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여해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를 받고 있는 회사 상황을 두고 "우리는 여전히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특히 연구개발에 주목했다.
그는 "지난해 화웨이의 연구개발 경비가 238억달러에 달한다"면서 "20년간 기초 이론 관련 준비를 했고, 거액을 들여 기초 이론을 연구하는 과학자와, 노하우를 갖춘 전문가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웨이가 막대한 비용을 연구개발에 활용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해 매출액의 20%을 연구개발에 투입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감원열풍이 불 당시에도 연구개발 인력에는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늘었다는 현지 보도가 나온 바 있다. 여기에 기초과학에 집중한 '축적된' 기초체력이 힘을 받으며 외부의 압박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 런 회장의 주장이다.
이러한 연구개발 집중 전략 및 장기간 기초과학에 배팅한 승부수는 위기 상황에서 공급망 다변화를 매끄럽게 끌어내는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의 행정명령으로 화웨이가 고성능 반도체 칩 등 부품 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 예상됐으나 런 창업주의 대답은 달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런 창업주는 “지난 3년간 중국 내부에서 1만3000개의 부품을 조달해 대체했으며 4000개 정도의 회로 기판도 재설계했다”며 “회로 기판의 성능이 매우 안정적”이라고도 설명했다.
물론 런 회장의 발언을 100% 신뢰하기에는 미심쩍은 지점도 많다. 2020년과 2021년 당시 미국의 압박으로 화웨이 공급망에 상당한 차질이 생겼다는 것은 업계의 상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런 회장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구체적인 숫자까지 거론한 이상 화웨이가 최소한 공급망 이슈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해결방안을 찾은 것 아니냐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이는 미국의 화웨이 압박에 커다란 헛점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편 화웨이는 정무적 판단에 있어서도 기민함을 보여주고 있다. 산업의 디지털 전환을 돕는다는 프레임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협력의 시너지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ESG 측면에서 한국 화웨이는 국내에 진출한 구글 및 애플 등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달리 재난재해 등에 적극 연대하는 등 더 내밀한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 반도체, 소부장의 걸어온 길
미국이 화웨이에 대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던 2019년, 비슷한 시기 일본도 한국의 반도체 업계에 철퇴를 휘둘렀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공정에 들어가는 핵심소재인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수소, 불화폴리이미드에 대한 수출 허가를 강화하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한국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업계의 움직임은 시의적절했다. 정부가 경쟁력강화대책을 마련하고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통해 특별 연구개발 예산 2485억원을 투입하자 업계 전체가 이에 맞춰 산업 생산력을 총동원했기 때문이다.
여세를 몰아 정부가 2020년 7월 대일 전략품목으로 설정했던 소부장 정책 대상을 글로벌 차원의 338개 이상 품목으로 확대하자 일본에 대한 의존도는 크게 낮아지기 시작했다.
삼성SDI와 LG화학은 반도체 초미세 회로 공정의 핵심인 무기물 포토레지스트(PR) 개발에 착수했고 LG화학은 반도체 후공정에 칩과 회로기판을 연결하는 접착 필름(DAF)을 만들어 국내 반도체 기업 양산라인 적용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 결과 포토레지스트의 일본 의존도는 2018년 93.2%에서 지난해 77.4%로 하락했으며 불화수소는 41.9%에서 7.7%로, 불화폴리이미드는 44.7%에서 33.3%로 각각 하락했다. 한국 소부장, 나아가 반도체 업계가 똘똘뭉쳐 이뤄낸 결과다.
지금은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정상화 국면을 맞이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만남을 계기로 일본의 한국 반도체 소재 제한이 풀린 상태다. 조만간 화이트리스트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일본의 수출 규제로 시작된 '고난의 역사'는 소부장 및 반도체 업계에 있어 더 큰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어젔다는 분석이다.

답은 기초과학...축적의 시간 늘려야
한국 소부장, 반도체 업계가 걸어온 길은 화웨이가 걸어온 길과 오버랩되는 장면이 많다.
연구개발에 집중해 기초체력을 창출, 공급선 다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따르면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는 2014년 이후 GDP 대비 약 4.3%까지 비중을 늘렸으며 이는 OECD 국가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다만 한국 경제 생태계가 아직은 더 노력해야 한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당장 연구개발도 불확실성이 크다. 지표로만 보면 연구개발 투자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서서히 증가율이 꺾이는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실제로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은 2019년 4.4%, 2020년 18.0%, 2021년 13.1%에 달했으나 2022년에는 8.8%로 그 기세가 꺾였다.
연구개발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그 흐름이 약해지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기초과학 자체에 대해서는 갈 길이 더 멀다. 역사 자체가 짧다. 과학기술발전 자체가 응용과학 측면에서만 발전을 거듭했으며 2011년이 되어서야 기초과학연구원(IBS)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측면에서는 정부가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최근 과학통신기술정보통신부는 IBS 카이스트‧포스텍 캠퍼스 건립 준공검사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각 캠퍼스 별 대지면적은 17,000㎡로 동일하고, 건축연면적은 입주연구단 규모에 맞춰 카이스트 캠퍼스는 25,529㎡, 포스텍 캠퍼스는 20,023㎡ 규모로 구축됐다. 카이스트 캠퍼스의 경우 지상 6층 건물 1개동에 물리/화학/생명 분야의 5개 연구단이, 포스텍 캠퍼스의 경우 지상 4층 건물 1개동에 물리/수학 분야의 3개 연구단이 입주한다는 설명이다.
이재흔 과학기술비즈니스벨트추진단장은 “이번 준공을 시작으로 올해 착공예정인 IBS 본원2차 건립사업과, 설계중인 유니스트 캠퍼스 건립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IBS가 세계적 수준의 기초과학 연구 수행을 위한 초석이 마련됐다”면서 “도전적인 기초과학 연구를 장기적‧안정적으로 수행하여 새로운 과학기술을 창출하고 지속적으로 우수한 인력을 양성해 달라”고 당부했다.
다만 이러한 기초과학 드라이브가 일회성, 단기적 이벤트로 흘러가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여전하다.
네이처는 지난 2016년 한국의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응용학문 중심의 연구개발 투자와 함께 시류에 편승하는 주먹구구식 투자를 지적한 바 있다. 한국에서 과학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결국 연구개발은 물론, 기초과학적 측면에서도 축적의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뜻이다. 업계 과계자는 "화웨이가 연구개발 및 기초과학에 집중한 전략으로 위기를 넘겼고, 한국 반도체 및 소부장 업계도 비슷한 저력을 발히했으나 이러한 한국의 성과는 사실 국가단위의 전략보다는 삼성 및 대기업들의 개인기에 의존한 감이 크다"면서 "연구개발에 속도를 내면서 정부의 지원을 늘리는 한편 일희일비를 벗어나 기초과학에 대한 입체적인 보완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