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2세
3인3색 CEO 도전기

사진설명
중소기업 CEO 2세들은 창업주인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입지를 굳혀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살아간다. 사진은 건국대와 기업은행이 개설한 ‘차세대 CEO과정’에 참가한 2세 CEO들이 와인 교육을 받고 있는 모습.

지난 10일 오후 6시, 건국대학교 입학정보관 304호 강의실.
30대가 대부분인 스무 명의 젊은이들이 수업을 받기 위해 하나둘씩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마지막 수업날인 이 날의 첫 번째 강의 주제는 바로 ‘M&A in Korea’. 강사로 나선 정헌 엔데버 대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젊은이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저마다 노트에 쓰고 또 쓴다.
이들은 누구일까. 다름 아닌 300만 중소기업의 가업을 물려받을 중소기업 CEO 2세들이다.
창업 1세대들이 고령화되면서 한국의 중소기업도 이제 막 2세 경영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게 현실. <이코노믹 리뷰>는 3개월 과정으로 건국대와 기업은행이 개설한 ‘차세대 CEO 과정’에서 교육을 이수 중인 3명의 중소기업 CEO 2세들을 만나 그들의 ‘경영생활’을 들어봤다.

류성훈 (주)성림교구 대표이사
“아버지 세상 뜬 후
경영에 눈떴어요”

발문
"중소기업 CEO 2세는 외롭고 부담스러운 신분이다. 때문에 낙하산 오명을 씻기위해 남모르게 실력을 쌓아야 한다. "

“준비됐지만,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경영자가 됐습니다.”
학생용 책·걸상을 생산해 연매출 60억원을 올리고 있는 (주)성림교구의 류성훈 사장. 올해 그의 나이는 불과 서른이다. 하지만 사업 경력만 놓고 보면 벌써 7년차로 24살 때 아버지가 설립한 성림교구에 첫 발을 내디딘 후 대리와 과장, 부장을 거쳐 현재의 사장까지 차근차근 경영자로의 행보를 밟아왔다.
그가 사장자리에 오른 사연은 가슴 아프다. 건국대 공업화학을 전공하던 지난 2006년, 25년간 회사를 일궈왔던 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뜨자 ‘갑작스럽게’ 사장이 됐다. 위에 누나가 있긴 하나 교직에 몸담고 있었고 아버지와 함께 회사 일을 하던 자신이 가업을 물려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저희 같은 2세들이 부모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경우, 자신의 의지보다는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진 게 80%가 넘는다고 봅니다. 저의 경우 역시 그렇고요.”
그래도 살아계실 때 아버지가 회사를 경영하던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그였기에 지금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며 추진력 있는 사업을 펼친 끝에 교구업계에서는 나름대로 ‘성림’이라는 브랜드를 키워가고 있다.
그가 본 CEO로서의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밖에 모르셨어요. 제가 회사에 다니면서부터 일 얘기는 아침 식탁에서 시작해 저녁에 침대에 누워 잠을 잘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어머니나 누나는 아버지와 저의 대화에 끼지도 못할 정도였죠. 하지만 그때 해주셨던 여러 가지 경영상 조언들이 가업을 이어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차세대 CEO 과정’을 통해 배우려는 것은 단지 전문 경영인이 되기 위한 지식 습득만이 아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여러 중소기업 CEO 2세들과 정보 교류는 물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외로울 때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드는 것도 큰 목적이다.
“2세 CEO는 외롭고 부담스러운 신분입니다. 남들에게 우리들의 고충을 얘기라도 하면 ‘배부른 소리하지 마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죠. 하지만 회사 안에서는 ‘낙하산’이라는 인식과 함께 오명을 벗기 위해 실력을 남모르게 쌓아야 하는 힘든 자리임은 분명합니다.”
종업원들의 가족이 좋아하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 경영목표라고 말하는 류사장.
그는 오늘도 자신이 만든 책상에 앉아 학업에 매진하는 학생들을 그리며 사업에 임한다.

1979년 서울생 / 30세 / 1남1녀 중 장남
건국대 공업화학과 졸업 / 2002년 입사

신예지 비케이스틸(주) 대리
“철강업계 우먼파워 보여줄 것”

발문
"어릴 때부터 철강기업의 CEO로서 고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지켜봤다. 그랬던 내가 이제 아버지와는 경영전 반에 대해 의논하는 사이가 됐다. "

‘여자라서 행복해요.’
CF 얘기가 아니다. ‘차세대 CEO 과정’을 이수 중인 스무 명의 교육생 중 유독 젊고 빼어난 외모로 교육생들 사이에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20대의 여성 얘기다. 주인공은 철강기업 비케이스틸(주)의 신춘균(57) 대표 맏딸인 신예지(28) 대리. 3년 전만 하더라도 자신의 전공(한양대 의류학과)을 살려 잘나가던 대기업 직원으로 있으면서 패션업계가 주목하던 재목이었으나 그 스스로 “아버지를 돕겠다”며 철강업계에 과감히 ‘투신한(?)’ 용맹스런 성격의 소유자다.
“장녀로서 느끼는 책임감 때문이지요. 거기에다가 철강업계가 남성적이고 보수적이잖습니까? 이런 분야일수록 저 같은 여성들이 섬세함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면 기업경쟁력을 더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곱상한 외모와 달리 신 대리는 남자들이 즐비한 곳에서만 줄곧 일해왔다. 대학 졸업 후 3년간 몸담았던 롯데쇼핑에서도 여성들이 별로 없는 해외 브랜드 론칭을 담당해 국내에 소개되지 못한 밸류 높은 남성복 브랜드를 국내에 론칭하는 데 일조해 주가를 높였던 그다.
그리고 10년 넘게 아버지가 일궈온 비케이스틸의 후계자를 꿈꾸며 지난 5월 남성 일색의 철강업계에도 입문한 것이다.
비케이스틸은 그의 아버지가 대표를 맡고 있고 작은 아버지는 상무, 어머니는 재무이사를 담당하고 있다. 때문에 아직은 말단직에 종사하면서 업무의 처음과 끝을 배우고 익히는 게 그의 일이다. 하지만 중소기업 CEO 2세들이 ‘기준’으로 삼을 만한 롤 모델이 없어 이번 교육 과정에 참여하게 됐다고 토로한다.
“저 낙하산 맞잖아요.(웃음) 낙하산 오명을 씻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배워야 하는데 대기업에서처럼 내가 의지하고 모범으로 삼을 만한 롤 모델이 없다는 게 힘들어요. 중소기업 2세 CEO들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별로 없고요.”
그래도 이번 교육 과정에서는 철강업계 대기업 임원 출신의 강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물어보고 배울 수 있었던 게 그나마 위안거리가 됐다.
그가 전도유망한 패션계에서의 유혹을 뿌리치고 가업을 승계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운 것은 철강업계의 여성CEO로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2세 여성 후계자들에게 ‘롤 모델’로 인정받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철강기업의 CEO로서 고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지켜봤어요. 이제 아버지와는 대화를 통해 경영 전반에 걸쳐 의논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백화점에서 근무한 경험에 대해 자주 묻곤 하시거든요.”
신 대리는 중소기업이 가족기업인 경우가 많은 만큼 가족애가 기업의 존속을 결정하는 절대조건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저녁을 같이한 후 티타임을 갖는다고 한다.
철강업계의 여성 CEO를 꿈꾼다는 것. 이제 그에겐 이상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1981년 포항생 / 28세 / 1남2녀 중 장녀
한양대 의류학과 졸업 / 2008년 입사

조무영 대동산업 부장

“대표는 동생에게,
나는 후원자 역할”

"중소기업 CEO는 현장 경험과 영업노하우를 가져야하고 재무제표를 볼줄 알아야한다. 동생은 현장과 영업, 나는 재무제 표에 장점이 있어 훌륭한 기업을 운영할 자신이 있다. "

매트 전문기업 대동산업의 조무영(37) 부장은 아버지가 세운 회사의 CEO 자리는 동생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동생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신념으로 ‘차세대 CEO’ 교육을 받고 있는 케이스다.
부도의 위기에서도 꿋꿋이 회사를 일으키며 21년 역사의 대동산업을 있게 한 창업주 아버지와 현재 회사의 관리와 운영을 총괄하며 대표 자리에 계시는 어머니, 그리고 대학 진학마저 포기하며 가업승계의 최전선에 일찌감치 뛰어든 동생을 위해 자신이 헌신하겠다는 일념으로 ‘경영공부’를 배운다는 것이다.
물론 조 부장도 대동산업의 계열사인 대동인더스의 대표이사를 현재 맡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부모가 소유한 전체 회사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대동산업이 가업승계의 핵심 기업. 때문에 대동산업의 관리부장을 맡고 있는 그는 자신보다 직급상으로 낮은 동생 조주영(34) 영업팀 과장에게 대동산업의 경영권이 잘 이양될 수 있도록 부모와 회사를 함께 도운다는 일념이다. 이처럼 그가 동생에게 주력기업의 CEO 자리를 ‘양보’한 데는 ‘형만 한 아우가 없다’는 속담처럼 자신보다 먼저 회사에 입사하며 현장 감각을 키운 동생에 대한 배려심이 뿌리에 깔려있다.
“지금도 늘 동생에게 말합니다. 대동산업의 대표는 네가 될 것이라고 말이죠. 동생은 제가 대학을 선택해 학업에 열중할 때도 자신은 공고를 졸업한 후 대학을 포기한 채 회사 공장에서 근무하며 젊음을 여기서 보냈습니다. 그런 동생을 뒤로하고 형이라는 이유만으로 회사 대표에 오르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죠.”
대학에서 영문과를 나온 조 부장은 무역회사에서 5년을 일하다 쌍둥이 자녀가 태어나는 바람에 ‘경제적 부담’ 을 이기지 못해 대동산업에 입사하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그가 동생을 먼저 찾아가 “너랑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을 때 동생이 흔쾌히 받아줘서 합류하게 됐다는 것.
일반적으로 동생이 먼저 ‘경영수업’을 받더라도 부모의 의지에 따라 장남이 CEO 자리를 물려받는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 대동산업의 조 부장이 택한 ‘후원자 역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형이냐 동생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족 모두의 기업인만큼 서로 끌어주고 당겨줘야 한다고 봅니다. 예전 어머니께서 새벽만 되면 회사 자금 사정 때문에 고민하시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이제 우리 형제가 어머니의 고민을 대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 부장은 동생의 장점과 자신의 장점을 살리면 부모님 못지않은 ‘형제 경영자’가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중소기업의 대표이사가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현장 경험과 영업 노하우, 재무제표를 바로 아는 것, 이 3가지에 능통해야 하는데 자신은 재무제표를 잘 알고 동생은 영업과 현장에서 강해 둘의 장점이 하나로 뭉쳐지면 대기업 못지않은 중소기업을 운영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의 말이 현실로 이뤄질지 형제의 우애로 다져진 대동산업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김진욱 기자 (action@ermedia.net)

1972년 서울생 / 37세 / 2남 중 장남
건국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2003년 입사

박스

문종범 건국대 ‘차세대 CEO 과정’ 주임교수

“중소기업 CEO 2세는 ‘샌드위치’”

중소기업 CEO 2세가 느끼는 가장 큰 고충이라면. CEO 2세들은 창업주인 부모와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기존 직원들 사이에서 샌드위치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 따라서 본인의 능력보다는 ‘2세’라는 선입견에 의한 평가, 창업주인 부모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입지를 굳혀야 하는 부담, 부모 세대의 경영방식과 최신 경영이론 사이의 세대 차이 극복 등 다양한 숙제를 지니고 있다.

중소기업 CEO 2세를 위한 경영승계 교육 프로그램을 계획하게 된 배경은. 우리 경제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 산업에서 사업체 수로는 99%, 종사자 수로는 약 90%에 달할 정도로, 많은 중소기업이 가족기업의 형태로 이뤄져 있어 가업의 승계를 통한 지속경영의 실현은 국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과제다.
이러한 가업승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부 차원에서 가업승계를 위한 세제혜택과 다양한 지원을 제공하고 있으나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부재하다는 인식에서 본 과정을 기획했다.

현재 중소기업 CEO의 경영승계와 관련해 정부에서 지원하고 있는 정책의 내용은. 그리고 현실적으로 더 보충해야 할 정책이 있다면. 중소기업 CEO의 경영승계와 관련해 상속세, 증여세 등 세제상의 혜택과 가업 승계를 지원하는 제도들을 마련하는 등 다양한 정부의 노력이 있다. 그러나 실제 이러한 노력들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관련 제도와 법률이 연동돼야 한다. 또한 승계 시점에서의 지원뿐만 아니라 승계를 계획하는 단계에서 승계 이후의 경영 과정에 걸친 체계적인 지원지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2세 경영자에 대한 교육의 제공이나 지원을 통한 2세 경영자의 역량 강화나 가업승계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사회문화의 조성을 위한 노력도 뒷받침돼야 한다.

국내 중소기업 경영승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다른 대학과 교류가 되고 있는지. 현재 국내에서 중소기업 경영승계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대학은 많지 않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많은 지역의 대학에서 차세대 CEO과정을 새롭게 개설하고자 문의와 자문 요청이 많이 온다.

1972년 서울생 / 37세 / 2남 중 장남
건국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2003년 입사

김진욱 기자 action@ermedi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