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서울서 경기도 화성은 그리 멀지 않다. 이동 거리만 따지면 한 시간 남짓. 어쩌면 이 곳은 농사짓기 보다 공장을 짓는 게 더 유용할지 모른다. 인근지역에 수도권의 공장들이 들어선 곳이 많은 것을 보면…. 하지만 고품질 파프리카를 키우고, 수출하는 ‘영농조합법인 화성21’을 본 후에는 그런 생각이 확 달라졌다. 공장 몇 개 더 세우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산업이 농업이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다가왔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자동차로 한창 달리다가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대로 들어선 곳은 1차선 도로. 농로 같기도 하고, 임도 같기도 한 그 길을 꼬불꼬불 돌아들어갔다. 주변에는 농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고, 객토를 마친 황토색 흙은 새로운 씨앗을 받기위해 준비중이다.
이렇게 찾아간 화성21은 인근 농지와 달랐다. 하늘 높게 설치된 유리온실의 규모는 웬만한 제조공장을 연상케 했다. “요즘 물량대기가 힘이 들어요. 오랜 단골들이 전화해도 밀려 있는 순서를 기다려야 해요. 초창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수요가 급증할지는 미처 몰랐어요. 하루빨리 시설을 증설해야 이런 수요에 대응할 텐데 그것도 여의치 않네요.” 화성21 영농조합법인 최종성 대표의 하소연이다.
화성21은 지난 1997년 정부지원을 받아 당시에는 최대 규모인 최첨단 유리온실 7500평을 건립해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 5농가가 공동출자해 국내 처음으로 파프리카 재배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국내에 생소한 파프리카 소비층이 전무한 상태라 자연스레 일본 수출시장 개척에 전력할 수밖에 없었다. 최 대표는 품질경쟁력을 확보하자 이제는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수출로 시작 이젠 내수물량도 달려
“처음엔 국내 수요가 없었어요. 일본이 네덜란드나 스페인 등지에서 파프리카를 수입해 먹는 것을 보고 ‘가까운 우리나라도 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전적으로 수출 시장만 본 거예요.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어요. 웰빙 바람이 불면서 국내에서 소비가 늘더니 이제 국내 물량 대기에도 버거운 수준이예요.”
고추의 변종에 속하는 파프리카는 피멘타, 피멘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렇게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효과와 효능도 다양하다. 영국영양재단의 브리짓 비네람 영양학자는 피망에 함유된 비타민C가 오렌지의 3배를 능가한다고 설명하면서, 비타민C가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준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유리온실 7500평 규모로 연매출 20여억원에 달하는 영농조합법인 화성21은 전자동 시스템을 구축해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철저하게 통제된다. [사진: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최 대표는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안타까운 게 시설 증축을 못해 수량을 늘리지 못한다는 거예요. 정부가 조금만 신경써서 현장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해결될 수 있는데 말이죠.”
최 대표의 이런 하소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수출이나 내수 모두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정한 양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특히 수출을 하는 경우에는 품질과 함께 지속적으로 물량을 공급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우리 조합처럼 일정부분 규모화된 농장에서도 수출을 할 때 컨테이너를 다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한 컨테이너나 반 컨테이너나 지불하는 비용은 똑같아요. 현장에서도 1년에 한두 번 파프리카를 출하하고, 잊을 만하면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뭘 해주겠어요. 수출시장을 늘리려면 일정한 수량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합니다.”
그러나 시설을 늘리는 게 쉽지 않다. 워낙 시설비가 고비용이기 때문이다. “유리온실 시설비가 보통 평당 100만원 정도 한다고 보면 맞을 거예요. 남들은 유리온실이 뭐가 그리 비싸냐고 하지만 전자동 시스템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같은 경우, 농장 옆에 시설을 늘릴 수 있는 땅은 확보가 돼있어요. 하지만 아직 엄두를 못내는 것은 시설비 때문이지요. 이런 부분을 정부에서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지요.”
최 대표는 정부 지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구분해 말했다. “정부에서 보조를 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장기로 융자해달라는 얘기지요. 정부가 주는 보조금은 바라지도 않아요. 시설을 늘려서 농사를 짓고 이자와 원금 상환을 할 수 없는 정도라면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충분히 수익성 있는 아이템에 영농기술이 있고, 판매처까지 확보된 상황이라면 다르지요. 다만 농업의 특성상 자금 회수가 느리다는 것을 감안해서 장기융자를 바라는 거예요. 이율이야 상황에 따라서 상식적이면 되는 것이고요.”
분명히 한국의 농업이 미국식의 대규모화 농업을 따라갈 수는 없다. 하지만 시설 원예 농업은 상황이 다르다. 공장처럼 일정한 규모를 갖춰야 생산 코스트가 내려간다. 1000평을 짓던 1만평을 짓던 그 안에 들어가는 자동화 시스템은 같기 때문이다. 화성21의 경우 지금의 7500평 규모를 두 배로 확장하더라도 관리비와 시설비는 오히려 더 절감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현재 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기금(농신보)에서 지원해 줄 수 있는 최고 한도액이 30억원 수준이에요. 그것도 일반 조합이 최고한도액까지 받는다는 것은 어림없는 얘기죠. 요즘 도시에서 귀농들을 많이 하는데 도시의 자금이 농촌으로 흘러들어오는 것도 원천적으로 막혀있어요. 농민을 보호한다는 취지지만 오히려 자금의 흐름을 막는 벽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최 대표는 연중 안정적인 생산시스템을 위해 현재의 온실과 땅을 후취담보로 시설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을 늘리고 융자금액도 현실에 맞도록 상향조정도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벼랑에서 다시 살게 해준 화훼사업
최 대표는 애초부터 농민은 아니었다. 올해 72세인 최 대표는 격동의 한국사를 온 몸으로 겪었다. 그는 한국전쟁을 겪었고, 장교로 월남전을 참전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농업경제학을 공부한 이후로 사업을 벌였다가 쫄딱 망하기도 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며 피해 다니다가 서울 진관내동 쪽에 꽃 파는 비닐하우스를 들어갔는데 비싼 것이라면서 꽃에 손도 못 대게 하는 거예요. 조그만 화분 하나에 그때 시세로 2000∼3000원씩 한다는 거예요. 뭐 이런 일이 있나싶어서 살펴보다가 일을 시작했지요. 조그만 비닐하우스 안에서 먹고 자면서 꽃을 시작했어요. 제 인생의 가장 큰 전환이었지요.” 최 대표는 그곳에서 화훼사업을 배우면서 돈을 벌었다고 했다.
“당시에 정말 많이 벌었어요. 한 2년 만에 평생 갚아도 다 못 갚을 것 같던 빚들을 청산했으니까요. 그러다가 좀 더 부가가치가 있는 사업이 없을까 돌아다녔지요. 전국을 다 뒤지고 해외까지 돌아다녔어요. 일본도 가보고 네덜란드, 유럽 등을 다니면서 본 게 네덜란드의 시설원예에요. 이때 벌었던 돈으로 화성에 땅을 사 모으기 시작했지요. 당시에는 이렇게 넓은 땅이 별로 없었어요.”
그렇게 최 대표는 파프리카와 인연을 맺었다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파프리카를 보면서 생각했지요. 일본사람들이 그 먼 곳에서까지 수입해서 먹는 파프리카를 보면서 ‘우리도 하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손 기술과 머리 좋기로 유명한 한국 사람이잖아요. 유리온실과 재배시스템을 들여와 시작하면 큰 실패 없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행히 이렇게 들여온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최 대표는 큰 실패를 하지는 않았다. 그 비결은 최대표가 10여 년간 철저한 고품질 위주의 생산설비를 갖추고 천적농업을 적용하면서 고품질 생산기반을 갖췄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5kg 특품기준 상자 당 최고 8만원에 거래됐어요. 우리 파프리카의 상품성은 세계 수준을 자랑하고 있어요. 1㎡당 연간 70kg 생산하면서 일반 농가보다 1.5배 이상 높은 생산성을 유지한 것도 공기열히트펌프를 활용한 안정적인 재배관리가 주효했어요.”
파프리카 재배농가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게 생산비 절감이다. 화성21에서는 현재 외국인 노동자가 20명 정도 농장에서 상주한다. 경력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말을 잘 알아듣고 작업을 능숙하게 따라할 수 있는 인력은 월 150만원 정도 받는다. 숙식 제공하고 연봉 1800만원 수준으로 적지 않은 비용이다.
이와 함께 가장 많은 비용을 차지하는 게 연료비이다. 연매출 20억여 원에서 연 7억원 정도가 유류비로 나갈 정도다. 파프리카는 일정하게 21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겨울에는 온도를 올려줘야 하고 여름에는 낮춰져야 한다. 여기에 물 관리와 습도, 통풍 등 전자동 시스템에 들어가는 비용도 상당하다.
화성21에서는 이런 고정비용을 줄이기 위해 에너지절감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다. 우선 2007년 하반기에 처음으로 약 3700평 규모에 LG전자 제품으로 30마력 공기열히트펌프 13대를 설치했다. 설치비용으로 제품 구입에 2억 6000만원, 전력승압에 1억 5000만원의 대규모 투자가 이뤄졌다.
난방비 절감효과에 여름철 냉방시스템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2009년 3월경 다시 4억여원을 투자해 나머지 면적 약 3800평에 삼성전자 제품으로 21마력 공기열히트펌프 19대를 추가로 설치했다. 삼성전자 제품의 경우 실외기에 성애가 발생해도 제상(성애 제거)프로그램으로 인해 30분 정도면 정상 가동된다고 한다. 공기열히트펌프 설치 이후 가장 달라진 것은 연간 난방비용으로 냉·난방 시스템을 모두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최고 시설·최고 기술로 대를 이어 세계시장 도전
화성21의 재배기술은 세계에서도 톱 수준에 꼽힌다. 특히 진딧물과 응애 등 각종 해충 방제를 위해 칠레이응애나 칠성무당벌레 등 10여 가지 천적을 적기에 투입하는 재배법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의 농약안전성 검사를 무사통과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최 대표는 “이런 화성21의 재배기술은 이제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고품질을 인정받아요. 한마디로 파프리카는 금덩이 같은 것이지요. 이 금덩이 파프리카로 세계 시장에서 우뚝 서게 될 겁니다. 동북아에서 이런 기술과 시설을 갖춘 곳은 우리나라 밖에 없어요. 물량이 늘어나면 유럽이나 미국 시장까지도 도전해 볼 가치가 있어요. 지금은 가까운 일본 시장에 공급할 물량도 모자라지만 전남도나 경남도 등 타 지역에서도 계속 파프리카 농사가 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에요. 새만금 같은 곳에 아예 파프리카 단지를 조성한다면 관광사업과 연관해서 좋은 모델이 될 텐데 아쉬운 부분이지요.”
화성21의 시설원예는 모두 컴퓨터로 조작된다. 파프리카 뿌리가 박혀있는 배지에 각각 공급호스를 꼽고 물과 비료 등을 혼합한 액체를 주입한다. 이때 주입량과 시간 등을 일일이 컴퓨터가 제어한다. 뿐만 아니다. 습도 조절을 위한 통풍과 햇빛을 들게 하고 막는 장치와 조명까지 모두 전산시스템으로 통제한다.
이 시스템은 요즘 더 편리해져 꼭 컴퓨터 통제실에서 할 필요도 없다. 집에서 조작하거나 외부 이동 중에는 스마트폰으로 전부 조작이 가능하다. 모든 조작을 스마트폰으로 할 수도 있고, 이상이 있을 때는 알아서 스마트폰으로 에러 메시지를 띄우기도 한다.
특히 최 대표가 요즘처럼 힘을 낼 수 있는 데에는 막내아들의 힘이 컸다. 막내아들 중락씨가 미국에서 농업경제학을 공부하고 2년 전부터 아버지 일을 돕고 있다. 아버지가 일궈놓은 농장을 이제 대를 이어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다. 최 대표가 시장에 지속적으로 파프리카를 공급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고 싶어 하는 속사정에는 아들 중락씨에게 보다 넓은 세상으로의 도전 기반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의 발로가 아닐까 싶었다.
한상오 기자 hanso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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