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라 ‘상장폐지’ 위기… 2000년 이전 상장 226여개사 자취 감춰

코스닥 1세대 기업들이 코스닥시장에서 ‘멸종’되고 있다. 2000대 초반 벤처 붐을 거쳐 코스닥 전성기를 이끌었던 기업들이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상장 폐지(상폐)에 내몰리고 있는 탓이다.

기업 환경의 변화 속에 새로운 활력을 찾지 못했거나 정상적인 인수 합병(M&A)이 이뤄지지 않은 때문으로 풀이된다. 금융감독원,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999년 코스닥시장에 상장한 핸디소프트가 전 대표이사의 횡령사건으로 상장 폐지 위기에 봉착했다.


한국거래소 코스닥 시장본부는 지난 9일 실질심사 결과 상장 폐지 기준에 해당한다고 통보한 가운데 일주일 이내에 이의신청이 없으면 즉시 상폐 절차에 들어간다고 했다. 이에 앞서 또 다른 코스닥 벤처 1세 대인 인네트 역시 마찬가지다. 퓨쳐인포넷은 이미 코스닥시장에서 퇴출된 상태다.

이에 대해 관련업계는 대표적인 코스닥 벤처 신화의 주역이라는 핸디소프트 등이 보유하고 있었던 상징성과 관련해 우려를 나타냈다. 지난 몇 년 간 이들 기업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변신 몸부림… 촉망받던 기업의 패착

핸디소프트는 지난 1991년 설립 이후 그룹웨어와 업무프로세서관리(BPM), 기업지식포털(EKP) 등에서 20년 간 국내를 대표하는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해외 기업에 맞섰다. 미국에까지 진출해 국산 SW의 글로벌화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워크플로 분야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인 ‘Global Excellence Awards Workflow’상을 4차례나 수상하는 위업도 달성한 바 있다.

하지만 2005년 이후 대표이사가 잇따라 변경되면서 재정난을 겪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에는 오리엔탈리소스에 매각된 이후에는 사옥 매각 등 자구책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변신의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오히려 지분을 양도한 오리엔탈리소스의 배후에 있었던 기업 사냥꾼에 의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상황이 됐다.

횡령사건을 조사한 감독당국에 따르면 이상필이라는 기업 사냥꾼은 290억 원 규모의 회사 돈을 자원 개발, 신규사업 투자 명목으로 해외에 빼돌린 후 착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이씨는 페이퍼컴퍼니였던 자회사를 통해 단기대여금 형식으로 돈을 횡령하는 수법을 동원했지만 회사 경영진은 이 사실을 조기에 포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의 압수수색에 대비해 7월 초 직원을 앞세워 증거를 인멸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이기도 했다.

횡령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이상필 씨는 투자가치가 없는 해외 법인의 지분을 저가에 취득한 뒤 사옥 매각 잔금으로 지분을 취득한 것으로 위장, 거액을 횡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최근 수사를 통해 핸디소프트의 최대주주가 각각 동양홀딩스(17.9%)로 돼 있지만 이상필씨가 실제 사주였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설명했다.

벤처 1세대 경영진 몰락의 전주곡

코스닥 1세대 기업의 몰락은 이전부터 지속됐다. ‘아래한글’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애간장을 태운 한글과컴퓨터는 대주주가 연속적으로 횡령사건에 휘말리며 간신히 상폐 위기를 모면하고 새 주인 찾기에 나섰다.

장흥순 전 터보테크 회장은 700억 원의 분식회계 사실이 밝혀져 경영에서 물러났다. 오상수 전 새롬기술 사장, 김형순 전 로커스 사장 등 벤처 1세대 경영진이 줄줄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새롬기술은 지난 1999년 8월 코스닥시장에 상장됐던 기업이다. 인터넷전화를 주력 사업으로 코스닥시장에 입성해 주당 30만 원대에 육박하는 등 2000년대 초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반년 만에 1만5000% 이상 급등하면서 투자자들에게 코스닥 대박 신화의 꿈을 남긴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새롬기술의 급등 신화는 버추얼텍과 인디시스템, 로커스, 코리아링크 등으로 이어지며 IT 및 인터넷 테마종목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코스닥 벤처기업들의 몰락은 IT 소프트웨어 업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코스닥시장 상장으로 패션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쌈지가 지난 4월 퇴출됐고, 슈퍼개미 문덕씨가 인수해 투자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비전하이테크도 횡령사건에 휘말려 상장 폐지됐다.

1세대 창업투자회사들도 동반 침체에 빠졌다. 한글과컴퓨터, NHN에 투자해 벤처투자기업 선봉에 섰던 한국기술투자 서갑수 회장은 600억 원 규모의 횡령 혐의가 포착돼 검찰에 기소됐고 경영권마저 내놓아야했다.

정체성 재확인… 반면교사로 삼아야

전문가들은 벤처 1세대들의 몰락에 도덕성, 지속 가능성, 경영의 전문성 등을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핸디소프트의 경우 적절한 시기에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지 못해 지난 2004년 이후 만성 적자를 지속, 결국 기업 사냥꾼에게 지분을 매각했다.

감독당국 관계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코스닥 1세대 기업들의 공통점은 전성기였던 코스닥시장에 대한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력사업을 등한시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며 “서서히 기업가 정신을 잃고 경영진들이 머니게임에 몰입하면서 주식회사로서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전 경영진의 잇단 분식회계 시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회사의 성장동력이 부족하다보니 상장 유지를 위해 장부에 실적 및 유형자산 등을 허위로 기재하는 불법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이후 장부를 속여 회사를 헐값에 양도하고 일부 경영진의 이익만 챙겨 ‘먹튀’하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거래소 관계자는 “초기 코스닥 시장에 진입한 기업들이 분식회계 등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퇴출되면서 코스닥 상장사들의 평균 연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며 “현재 코스닥 상장사들이 코스닥 1세대들의 모습을 통해 상장사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철영 아시아경제 기자 cylim@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