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이겨낸 조 부장의 하루
구내 식당서 정보교환하고
저녁에는 경영대학원 수강
부서장이 퇴임을 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하던 인정 많은 상사였다. 50대였던 그는 쓸쓸하게 회사를 떠났다. 소주 한잔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전령사였다. 쓰디쓴 소주를 빈속에 ‘탁’ 털어놓고 나면 십여 년 전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그를 만난 지도 벌써 일 년여가 훌쩍 지났다. 말없이 짐을 꾸렸던 부서장은 일자리를 다시 얻지 못했다. 조규남 코오롱아이넷 전략기획팀장은 1997년 외환위기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농담을 나누던 동료들 일부는 특판팀으로 떠났으며, 또 다른 그룹은 무시무시한 이름의 ‘갱생팀’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이가 많은 이들도 눈물을 머금고 떠났다. 그는 당시 코오롱상사의 입사 7년차 과장 대리(과장과 대리의 중간직급)였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났다. 그 동안 조 부장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6년 코오롱인터내셔널과 코오롱 정보통신과 합병, 코오롱아이넷이 출범하면서 조 부장은 전략기획팀에 자리잡았다.
회사는 올해 200%가 넘는 매출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하지만 조 부장이 어깨에 짊어져야 할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마치 쓰나미를 떠올리게 하는 기세이다. 유럽을 휩쓸더니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로 불똥이 옮겨가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1500원을 돌파했으며, 구조조정 바람은 제조업으로 확산될 태세이다. 다시 겨울이고, 추운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든다.
이번 겨울은 길고 매서울 것이라는 풍문들이다. 금융기관, 그리고 조선·중공업. 건설 부문 등으로 인력 감축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다.
조 부장은 이날 일찌감치 집을 나와 가산동 디지털단지에서 내렸다. 아침 7시이다. “질주하는 수입차, 불황 한파에 갇히다”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그의 머리는 요즘 복잡하다.

오전7시
‘향수’서 ‘상상력’을 배우다
사무실은 텅 비어있다. 전략기획실을 이끌게 되면서 일찍 출근하는 게 습관이 됐다. 조 부장은 이른바 ‘아침형 인간’이다. 바람이 매섭기만 한 초겨울 새벽, 그는 오늘 처리할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펼쳐들었다. 소설책을 읽을 수 있는 촌각의 여유를 그는 사랑한다.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해야 해요. 1997년도와 지금은 다른 상황이에요.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 그리고 퇴근 후의 시간을 적절히 쪼개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죠.”
주인공 ‘그루누이’는 매독에 걸린 젊은 여인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리고 어머니의 버림을 받았다. 향기에 병적으로 집착하며 연쇄살인에 나서는 그루누이는 인간의 병적인 열망, 그리고 ‘집착’을 상징한다.
소설 속 파리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그루누이의 편집광적인 모습을 떠올려본다. 1500만부라는 엄청난 판매부수를 자랑하며 영화로도 흥행에 성공한 향수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오전 8시30분, 기획실 직원들이 하나둘씩 사무실로 들어선다. 십여 년 전, 회사 분위기는 가족적이었다. 선배들을 마치 ‘형님’처럼 따르고, 후배 사원들을 동생처럼 보듬어안았다. IMF는 이 모든 익숙한 풍경들을 일거에 바꾸어놓았다.
“코오롱상사에 몸을 담고 있을 때 IMF를 겪었는데, 당시에는 구조조정이 날벼락과 같았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회사가 나를 지켜준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요새는 생각들이 많이 달라졌죠.”
오전10시
주요 이슈를 쪼개다
‘그루누이’가 배회하던 악취가 풍기는 음울한 파리 시내는 요즘 세계경제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유럽연합, 일본 등 전 세계의 실물 부문으로 급속히 전이되고 있다. 경영 환경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불과 수개월전 ‘150달러’에 육박하던 국제유가는 수요 위축으로 ‘3분의 1토막’이 났다.
두바이를 거점으로 중동지역을 맹렬히 파고들던 이 회사가 결코 흘려보낼 수 없는 형세의 변화이다. 세계경제의 성장엔진 미국을 지탱하던 이 나라 소비자들은 씀씀이를 줄이고 있다. 불확실성을 숙명처럼 안고 사는 전략가들에게도 요즘은 도전과 응전의 시간이다.
천막 안에서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짓는다는 한고조 유방의 장자방 ‘장량’은 모든 전략가들의 꿈이다. 장량은 ‘멀티플레이’, 이른바 T자형 인재였다. 진시황에게 망한 한나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폭넓은 교양 교육을 받았다. 시계 바늘은 벌써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주요 신문에 실린 뉴스를 훑어본 뒤 전략기획 회의에 들어갔다.
“하나만 잘해서도 안 되고 또 여러 가지를 잘한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닙니다. 여러 분야에 능통하되, 선제적 대응책을 내놓을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한 것이죠. 기획파트는 말할 것도 없고요. 문제 해결책을 내놓는 인재와 그렇지 못한 인재의 차이가 매우 크기 마련이거든요.”
일본의 상사들은 정보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2000년 들어 자원 거래에 뛰어든 국내 기업들에 비해 무려 20여년 가까이 먼저 시장에 뛰어들어 기회를 선점했다. 그는 요즘 연세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회사 지원금으로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폭넓은 교양을 익히고 전문성을 강화하는 흔치 않은 기회다. 동종 업계에서는 원자재 재고 물량으로 골치를 썩고 있는 회사들이 재고 자산가치의 하락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점심시간
구내 식당서 정보를 교환한다
가산디지털단지에 위치한 코오롱아이넷 구내 식당은 늘 붐빈다. 밥값을 한푼이라도 줄이려는 직장인들이 늘어나다 보니 식당은 늘 입추의 여지가 없다. 모두들 미국발 금융위기의 한파에 한껏 움츠러든 모습이다. 조 부장도 전략기획실 직원들과 이곳을 자주 이용한다.
값도 싸고 대화를 편하게 나눌 수 있어서다. 점심은 정보 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신기료 장수 세명이 제갈공명 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는가. 각자가 알고 있는 정보를 하나둘씩 꿰맞춰가다 보면 변화의 윤곽이 어렴풋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분야와 포지션을 잡기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지금은 인내와 극기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오히려 자기 본연의 위치와 능력을 다시 점검할 때이죠. 그 후 사람들을 만나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회사가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해야겠죠. 이러한 기회는 점심시간밖에 없습니다.”
IMF 당시 그는 입사 7년차인 과장대리였다. 지금은 회사의 중추인 전략기획본부를 이끌어가는 부서장이다. 점심식사를 할 때도 정보를 교환하고, 직원들의 결속을 도모하는 게 하루 일과이다. 지금과 같은 불황에는 직원과 상사, 최고경영자(CEO)와 임원 간의 결속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외국계 커피전문점 ‘카리부커피’에 1000원짜리 커피가 등장했다. 커피점들의 불황타개책은 아이디어의 풍향계이다.
오후4시
마른수건 쥐어짤 방안 논의
오후 시간대는 정신없이 흘러간다. 오후 1~3시, 업체 관계자를 만났다. 그리고 전략안 등을 검토했다. 오후 4시, 변보경 최고경영자가 참석한 임원 경영회의에 들어간다. 회의에서도 경제 한파의 분위기는 역력하다.
“회의 분위기는 딱딱한 편이 아니에요. 하지만 프레젠테이션 내용이나 회의 주제는 불과 몇 달 전과도 다른 편입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비용절감 방안을 많이 고민합니다.”
임직원들의 정시 퇴근을 사측에서 적극적으로 독려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오후 시간을 바짝 파고들어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일찍 퇴근하자는 분위기다. 시간 대비 효율성도 높이고, 직원들의 긴장감도 높일 수 있는 ‘양수겸장(兩手兼掌)’의 포석이다. 원가절감은 이제 생존의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줄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이날 임원회의에서 는 ‘인력육성’ 방안도 심도있게 논의했다.
“불황에는 고객들이 줄기 마련입니다. 고객들이 자기 지갑을 닫기 때문에 필요 없는 부분이라면 거래를 아예 끊어버립니다. 이는 기업 거래도 마찬가지예요.”
비용절감에 나선 고객사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매 두는 것은 뛰어난 영업사원들의 역할이기도 하다. IMF 당시에는 기업의 줄도산을 막기 위해 구조조정을 했다. 그 탓에 인재들이 빠져나가고 기업이 회복될 쯤에는 활용할 인재들이 없어서 곤란을 겪었다.
오후 6시30분
직원들 스트레스를 풀어주다
“회식 때는 회사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아요.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제안하거나 불만을 말하면 모를까요. 회식은 놀라고 있는 거니까, 신나게 놀아야죠. 미친 듯 놀아야 스트레스가 풀리고 그 다음날 기분 좋게 업무를 시작할 수 있어요.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것도 상사 능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제 다가오는 연말연시. 조 부장은 벌써부터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줄까 고민 중이다. 직원들의 사기를 충전시키는 것도 상사의 능력 중 하나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나오는 우울한 뉴스에 풀이 죽지 않도록 기를 북돋아줄 생각이다. 요즘 경영대학원 수업에서 만나는 동기들의 얼굴에서는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대학원 동기 중 한 명은 이미 자기네 회사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IT업계 동기는 다니는 회사가 도산했다며 푸념하죠. 다른 동기는 이직을 생각하고 있고요.”
2008년 11월, 겨울을 힘겹게 나고 있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자화상이다.
조 부장은 지난 21일 출장을 떠났다. 이번 출장길에서 돌아오면 지난 IMF때 직장을 떠났던 담당 부서장을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눠볼 요량이다.
김현희 기자 (wooang13@ermedia.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