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

주꾸미로 봄맛 만끽하고
동백으로 봄내음 취하고

우수(雨水)를 앞두고 산바람도 바닷바람도 한결 싱그럽다. 매섭던 기운 대신 바닷바람엔 상큼 짭짤한 봄맛이 잔뜩 실렸다. 봄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충남 서천의 서해바닷가.
지금 이곳에서는 싱싱하고, 졸깃졸깃하고, 오동통한 봄맛 잔치 준비로 분주하다. 그 잔칫집의 주인공은 바로 주꾸미다.
예부터 ‘봄 주꾸미, 가을 전어’라는 말이 있다. 주꾸미는 봄에 가장 맛이 있다는 뜻이다. 지역에 따라 쭈깨미, 쭈개미, 쭈껭이 등으로 불리는 주꾸미는 일 년 내내 잡히지만 산란기(5~6월)를 앞둔 3~4월에 가장 맛있다. 이 시기엔 주꾸미의 몸통 속에 밥알 같은 알이 꽉 차 있어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주꾸미가 펼치는 봄맛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서천 홍원항을 찾았다. 이맘때면 홍원항 어민들은 정신없이 바빠진다. 여린 쑥처럼 봄 바다에서 나기 시작한 힘 좋은 주꾸미 잡이 덕분이다. 다리 여덟 개의 팔완목(八腕目)에 속하는 주꾸미, 문어, 낙지와 크기만 다를 뿐 모습은 비슷하다. 그러나 다리의 힘에서 이들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낙지와 문어는 물 밖에 나오면 몸통을 가누지 못해 흐느적거리지만 주꾸미는 다르다. 물 밖에 던져놓으면 벌떡 일어서기도 한다. 물론 금방 쓰러지지만 주꾸미의 그 힘을 어민들은 가장 좋아한다.
새벽 5시 홍원항을 출항한 배가 20∼30분을 달려 전날 던져놓은 부표에 이르자 엔진을 멈췄다. 어민들이 부표에 매달린 줄을 끌어당긴다. 그러자 1m 간격으로 달린 소라 껍데기가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을 뚫고 줄줄이 올라온다. 산란기를 앞둔 주꾸미들이 긴 줄에 주렁주렁 매달린 소라 껍데기가 자기 집인 줄 알고 들어가 있다가 ‘아닌 밤 중에 날벼락’식으로 줄줄이 엮여 나온다.
갑판으로 끌려 올라온 주꾸미는 무슨 일인가 싶어 다리를 뻗어 몸을 빼낸다. 순간 갈퀴 끝을 소라 안에 집어넣어 주꾸미를 낚아챈다. 바닥에 떨어진 주꾸미. 여덟 개 다리에 힘을 모아 ‘벌떡쇼’를 선보인다. 이런 채취 방식을 ‘소라방’이라고 부른다.
홍원·마량 앞바다는 주꾸미가 좋아하는 개펄과 모래가 반쯤 섞여 있어 전국에서 주꾸미 어획량이 가장 많은 곳으로 꼽힌다.
어민 이상민(68) 씨는 “서천 주꾸미의 맛 차이는 뻘에서 나온다”며 “마량 앞바다의 뻘은 미네랄이 풍부해 이곳에서 잡은 주꾸미들의 맛이 뛰어나다”고 자랑한다.
이름도 촌스럽고 다소 볼품없는 주꾸미가 미식가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오래전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특산물 홍보를 위한 축제들이 봇물을 이루면서, 겨울과 봄 사이 이렇다 할 해산물이 없던 틈새철의 주자로 주꾸미가 빛을 보기 시작했다.
날것으로 먹거나 데쳐 먹는 것이 고작이던 요리법도 전골, 볶음, 샤브샤브 등으로 개발돼, 겨우내 무뎌진 입맛을 되살려주는 봄의 대표주자로 대접받고 있다.
제철로 접어들고 있는 주꾸미의 인기는 요즘 상종가다. 1㎏(12~15마리 정도)에 위판장 낙찰가만도 1만3000~1만6000원까지 오르내린다.
맛이 있는 고장엔 덤으로 볼거리도 많은 법. 서천 화력발전소 뒤편 언덕의 동백정은 낙조와 동백꽃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명소다.
마량리 동백숲의 역사는 5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마량의 수군첨사가 꽃 뭉치를 증식시키면 마을에 웃음꽃이 핀다는 꿈을 꾸고 바닷가에 나가 보니 꿈에서 보았던 꽃이 두둥실 떠다니기에 가져다가 심었더니 그게 바로 동백이었다는 전설이다.
안 믿어도 그만인 얘기지만, 마량리 동백숲은 그 후로 마량리 바닷가의 방풍림 역할을 하면서 다가오는 봄날의 가장 화려한 생을 위해 꽃을 피운다.
남해 바닷가와는 달리 이곳의 동백나무는 거센 바닷바람 때문에 키가 크지 않은 대신 가지가 옆으로 넓게 뻗는다.
잘생긴 정원수를 방불케 하는 동백나무에서 꽃들이 ‘툭’하고 송이째 떨어진다. 땅에 떨어진 동백꽃은 현기증이 일 정도로 처연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땅 위에서 또 한 번 붉게 피어난 동백꽃이 환상의 꽃길 터널을 만들어놓는다.
동백정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오력도로 인해 더욱 환상적이다. 옛날 어느 장수가 바다를 건너다 빠뜨린 신발 한 짝이 섬이 되었다는 오력도가 동백정의 붉은 기둥 사이에 적당한 여백을 두고 자리 잡는다. 해가 수평선과 황홀한 입맞춤을 하기 전 동백정 앞바다가 황금빛으로 물들면 솔바람이 흐르는 동백정 앞 벤치를 홀로 지키는 여심도 동백꽃만큼 붉게 물든다. 동백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동백정에 간다면 붉은 꽃잎에다 그 꽃을 닮은 붉은 노을, 그야말로 온 천지가 붉은 세상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서천=글ㆍ사진 아시아경제 조용준 기자 jun21@asiae.co.kr

◇여행메모
△가는길=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IC에서 21번 국도와 607번 지방도를 타고 30분쯤 달리면 홍원항과 마량포구, 동백정 등이 나온다. 내달 21일부터 4월3일까지 동백정 일원에서 ‘동백꽃ㆍ주꾸미 축제’가 열린다. 문의 : 041-950-4225

△볼거리=서천 마량포구는 서해안에서 일몰과 일출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동백정에서 일몰을 보고 마량포구 뚝방에서 일출을 만끽해 보자. 서천해양박물관에는 조개, 산호, 화석 물고기박제 등 15만점의 어패류가 전시되어 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촬영한 신성리 갈대밭도 놓치기 아깝다. 금강 둑길을 걸으며 철새 탐조를 즐겨도 좋다.

Box/ 조용준 기자의 길에서 만난 인연

서산회관 김정임씨

“주꾸미랑 미나리 함께 드셔유…향이 기가 막혀유”

“관광차 오든, 소개로 오든, 단골손님이든 지가 내놓는 음식은 한결같어유.”
30년째 동백정 입구에서 서산회관을 운영하고 있는 김정임(57) 씨는 주꾸미철판볶음의 대가다.
원래는 볶음이 아니라 철판 위에서 서서히 달궈먹는 무침이었다. 손님들이 볶음으로 불러 지금의 볶음이 된 것이다.
김 씨의 철판볶음은 서울이나 도시의 고추장이 범벅된 주꾸미볶음과는 차원이 다르다. 각종 야채와 들기름을 생주꾸미와 함께 버무렸다.
일단 들어가는 야채는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미나리를 비롯해 팽이버섯, 깻잎, 쑥갓 등이다. 손님의 입맛에 따라 매운 것과 순한 맛으로 사전 주문을 받는다.
먹는 방법은 간단하다. 달궈진 철판에 야채와 함께 버무린 생주꾸미를 올려 살짝 익혀 바로 먹는다. 그래야 주꾸미의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빨리 주꾸미를 미나리와 함께 드셔유. 그 향이 기가 막혀유.” 김 씨는 너무 익은 주꾸미는 맛이 없다며 기자가 던지는 질문에 답 대신 빨리 먹어보라고 성화다.
그가 소개하는 주꾸미볶음 맛의 핵심은 주꾸미 색깔이 변하기 직전에 미나리와 함께 먹는 것이다. 그래야 향긋한 미나리 향과 오동통한 생주꾸미의 살이 묘한 조화를 이뤄 가장 맛있다는 것. 그리고 익기 전이어야만 질기지 않고 물도 나지 않아 더욱더 풍부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아직 제철에 들지 않았지만 3월이면 주꾸미 맛의 포인트인 알이 듬뿍 들어 있는 주꾸미볶음을 먹을 수 있다. 흔히 머리라고 부르는 몸통에 알이 들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알 모양이 잘 익은 밥알을 빼닮아, 서천 주민들은 이를 ‘주꾸미 쌀밥’이라 부른다. 몸통을 잘라 통째로 입에 넣어 씹으면 마치 쌀밥을 넣어 먹는 듯한 느낌으로 별미 중의 별미다.
볶음을 다 먹고 나면 남아 있는 양념에 밥을 볶아 먹으면 된다. 서산회관의 철판볶음은 중자(3만원, 3~4인분)만 시켜도 4인 가족이 푸짐하게 맛볼 수 있다. 또 시원하고 깔끔한 국물맛을 원한다면 주꾸미 샤브샤브를 주문하는 것도 좋다.
김 씨는 지난 2007년 자신만의 독특한 비법을 가진 주꾸미철판볶음으로 (사)대한명인협회에서 선정하는 명인에 뽑히기도 했다.
문의 : 041-951-7677

이형구 기자 lhg0544@ermed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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