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업, 그것도 대기업에서 임원이 되는 문은 대단히 좁다. 혹자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기’라고 한다. 그만큼 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도 임원은 나온다. 도대체 어떤 이들이 이처럼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 임원 자리에 오를까? 실력이 좋은 사람일까? 운이 좋은 사람일까? 인맥이 탁월한 사람일까? 답은 “다 갖추는 게 좋다”에 가깝다. 정답에 더 가까운 답은 모든 면에서 ‘달인’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평소 실력이든 아부든 최고가 돼야만 임원 세계의 문을 열 수도 있다. 물론 실력을 바탕으로 성과를 낸 인물이 임원으로 승진한다면 최상이다. 그렇지만 세상이 오로지 실력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실력과 주변의 평판, 회사 정책, 최고경영자의 성향, 오너의 철학 등 넘어야 할 산은 한둘이 아니다. 어떤 유형이든 임원이 된 이들에게서 손금과 발금을 찾아보기 힘들다. 윗선에 손을 비비고 아래 부하를 밟아서 성과를 내느라 동분서주한 탓이리라. ‘無손금 無발금’의 인물이 결국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게 아닐까?

▲ 출처=이코노믹리뷰DB

우선 ‘낙지부동형’이다. 머리를 바짝 숙이고 인사권자의 눈치만 살피는 유형이다. 큰 성과를 내지 못하지만 경력에 큰 흠도 내지 않으면서 가만히 있는 형이다. 세월 가기만 기다리면서 겉으로는 ‘만년 부장’이 좋다는 말을 한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뛰다 성과를 내지 못해 좌절하는 동기와 선배 임원을 반면교사로 삼아, 납작 엎드려 조용히 시키는 일만 묵묵히 수행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유형이다.

대형 스타트업에도 자주 보이는 유형의 인물이다. 수백억원대의 투자를 유치한 대형 스타트업의 A 임원은 “스타트업 임원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면서 “설립자와 함께 창업 단계에서 노력한 ‘진골’과 이후 사업이 본 궤도에 올랐을 무렵 주로 대기업에서 합류하는 ‘성골’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타트업은 지분 구조가 명확하지 않고 인맥 중심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사내정치가 더욱 심하다”면서 “복지안동형은 성골과 진골 모두에서 발견된다. 특히 성골은 대표이사와 친분이 있는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복지안동형이 많다”고 말했다.

인사권자의 기준에 맞추는 ‘눈치보기형’이 있다. 대기업 연구개발 부서에 속한 B 임원은 철저한 자기관리로 임원 자리에 올랐다. ‘윗선’의 캐릭터에 맞추고 윗선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해 임원 자리를 거머쥔 경우다. 그는 “부회장이 평소 자기관리가 엄격하고 냉철한 데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자기관리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더욱 조심스러웠다”면서 “임원 승진에는 자기관리가 필수다. 어차피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임원 이상으로 간 사람들에게는 작은 격차일 수 있고, 결국은 얼마나 자기관리를 잘 하느냐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전자 대기업 사옥에는 최고 수준의 의료시설이 갖춰져 있다.

시쳇말로 ‘좌광우도’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생선 중 눈이 왼쪽을 향한 게 광어, 오른쪽을 보는 게 도다리라는 데서 뿌리를 둔 말이다. 이쪽저쪽을 살피는 것을 빗댄 말이다. 이는 대기업 계열사에서 자주 보이는 유형이다. 국내 대형 통신사에서 일하는 C임원은 “계열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기업의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편”이라면서 “대표이사로 누가 부임하느냐에 따라 임원의 처신이 바뀌는 것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대표이사의 경영 스타일이 ‘돌격 앞으로’냐, 아니면 ‘신중한 학자 모드’냐에 따라 임원들의 행동도 변한다.

언제나 스탠바이형’도 승진의 꿀맛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대기업이 국내외 일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인사권자의 질문에 능수능란하게 답할 수 있고 이것이 승진의 사다리가 될 수 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C 임원은 오너가 몇 개 국어에 능통한 기업에서 일한다. 해외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오너 부회장의 질문에 진땀을 흘린 기억에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다. “그것도 모르세요?”라는 말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항상 눈과 귀를 외국에 열어놓고 부회장의 질문에 언제든지 답할 준비를 하고 있다. 때문에 항상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영양제 주사도 자주 맞았다. 하지만 덕분에 그는 국내 어느 기업 임원과 견줘도 결코 만만치 않는 어학실력과 시사정보를 꿰뚫었다. 24시간 내내 언제나 모든 것을 대답할 수 있는 ‘스탠바이 상태’가 돼야만 임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 출처=이코노믹리뷰DB

임전무퇴형’도 빼놓을 수 없다. 회사 전체나 부서, 상사와 부하 직원들의 사정은 “나 몰라라” 하며 자기 소신에 따라 밀어붙이는 유형이다. 오로지 뚝심으로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고 밀어붙이는 업무 스타일이 특징이다. 이런 유형의 임원은 ‘기업=나’라는 공식을 신봉한다. 회사 충성도도 높다. 주로 개발 분야 임원들의 유형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승진한 이들이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다. 해외 유수의 반도체 칩 메이커가 만들지 못한 제품을 만들어낸 이들이 주인공이다.

국내 간판 전자기업의 D 임원은 “전임 대표이사 시절 추진된 연구개발 과제가 새로운 대표이사가 오며 사실상 폐기처분을 밟은 적이 있는데, 이를 담당하지도 않은 임원이 스스로 나서 ‘실패한다고 해도 회사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해 모두가 놀란 적이 있다”면서 “문제는 그렇게 재개된 과제가 별 소득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연구개발 과정에서 분명히 얻을 수 있는 점이 있었고, 그 임원은 신임 대표이사에게 능력과 소신을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예외라는 반론도 적지 않다. 이 임원은 “오너 중심의 대기업 환경에서 임원은 의외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면서 “소신과 처신의 사이에서 현명하게 행동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형’도 있다. 심사숙고하는 유형이다. 이모저모 따져 일하고 업무에서 대과를 내지 않는다. 조직으로 봐서는 위험부담이 가장 적은 인간형이다. 이런 유형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성과를 낸다. 소크라테스형은 눈치보기형과 스탠바이형과도 겹친다.

이런 유형에 속한다면 절반은 성공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