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사회진출이 자유로운 나라로 알려진 미국에서도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을 막는 조직 내 보이지 않는 장애물 ‘유리천장’이 있다. 한국에는 여성을 막는 장애물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더 견고하기에 ‘콘크리트 천장’이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임원’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유능한 직장인’이란 것 이상을 함의한다.

상대적으로 취업조차 쉽지 않은 말단사원 여성이 조직의 임원 자리까지 오르기는 낙타가 여러 번 바늘귀를 통과하는 일과 같았다. 한국경제연구원이 매출액 600대 상장기업(금융·보험업 제외) 중 2012~2016년까지 남녀 비율 분석이 가능한 531개 기업을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의 여성 근로자 비율은 지난해 기준 25만4452명으로 전체의 22.6%였다.

▲ 출처=글로브우먼닷오알지

여성 근로자도 적지만 임원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올해 상반기 국제여성기업이사협회(Corporate Women Directors International)가 발표한 ‘2017 아시아·태평양 지역 여성 이사회 임원’ 보고서에 따르면 아태 지역 주요 20개국 1557개 상장기업의 이사회 여성 임원 비율은 평균 12.4%로 아프리카(14.4%)보다도 낮은 수치다. 한국은 이사회 여성 임원 비율이 2.4%로 아태 지역 20개국 가운데서도 가장 낮았다.

송승선 SK플래닛 리테일본부장은 1994년 삼성그룹의 여성공채 2기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송 본부장이 ‘임원 배지’를 단 건 삼성을 떠나 외국계 기업들로 이직을 거듭한 이후 롯데로 자리를 옮기면서였다. 당시 롯데그룹 내부승진 1호 여성 임원이 된 송 본부장은 “롯데그룹 내에서 여성 임원이 없다는 게 문제가 됐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내부 승진시킬 여성 인력조차 마른 상황이었다”고 했다. 2011년 5월 경력직으로 입사한 그는 이듬해 2월 임원이 됐다.

첫 여성 임원이다 보니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생겨났다. 송 본부장은 “신임 임원교육 마지막 날 배우자 초청행사가 있다. 나 말고 여성 임원이 한 사람 더 있었는데 일이 있어 출석을 못하고 보니 남편으로 그 행사에 온 사람은 내 남편뿐이더라(웃음). 임원 내조하는 법 같은 걸 얘기하는 자리였다”고 회상했다.

온라인 사업을 맡아 해 롯데그룹의 주력이었던 오프라인 유통 분야에서 남성 임원들과 경쟁할 일은 많지 않았다. 전문성을 인정받으며 일했지만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임원이 되니 바로 아래 군필인 남자 팀장과는 나이차가 나지 않았다. 상하관계에서 갈등이 빚어지지 않은 건 송 본부장의 모나지 않은 성격 덕분이었다.

“유통업계도 사실 관리직은 점포 직원, 파견 사원, 내부 직원 등 복잡한 구조에서 조직장악력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 여성 임원이 드물었다. 워낙 임원 승진한 여자가 적으니까 주목을 받고 뒷말도 많아지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았다. 성질이 독할 거란 편견도 있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혼자 퍼포먼스를 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과 ‘합’을 맞춰가야 하기 때문에 성격이 중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을 꿈꾸는 여성 직장인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많지 않았다. 한때 이들에게 ‘남자처럼 일하라’는 말은 금언(金言)에 가까웠다. 남자처럼, 아니 남자보다 더 일해야 했다. 수많은 장벽과 장애물에 숱한 애환과 분투의 날들을 보내야 겨우 임원이 됐고, 임원이 된 뒤에도 이들의 우여곡절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슬로건이 결핍과 컴플렉스를 반영한다는 말처럼 남자처럼 일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 내 임금 차별과 기회 박탈,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에 따른 부담,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의 취약함 등이 남자처럼 일하는 여성들의 발목을 잡는다. ‘생계 부양자’라는 프레임의 기혼 남성과 비교되면서 고용 문제에서도 불안을 겪어야 한다. 암묵적인 성차별과 여성들만이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이 분명 존재한다.

▲ 출처=각 사

삼성물산 리조트건설부문 상무를 지낸 박재인 아미글로비즈 대표는 미국 건축설계회사에 다니다가 2010년 부장으로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그 전에도 한화그룹 등 한국의 대기업 경력이 있었지만 미국 사회와는 상황이 달랐다.

박 대표는 “2000년대 초반인 당시만 해도 미국 직장에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거의 없었다. 미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소수 인종 등 마이너리티(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있는데 여성은 거기서도 배제될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은 여성 인력이 부족한 것이 사회문제였으니 아직 직장 내 성차별은 존재했던 때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그룹은 워낙 이건희 회장이 여성 인력을 중요시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고, 실제로 오너 일가의 여성 임원들이 있어 불편 없이 일할 수 있었지만, 남자보다 더 많이 일해야 했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성 임원이 되고 싶다면 가정과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과 이에 대한 배려는 당연하지만, 이것들을 당연시하기보다는 남성 이상으로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여성 임원들은 남자처럼 일하기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여성의 강점이 보다 존중받는 사회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희정 피데스개발 상무이사는 부동산 개발업계의 드문 여성 임원이다. 김 상무는 건설업체 대우건설 출신이다. 김 상무는 “늦게까지 술도 많이 먹는 문화 아닌가. 그런데 사실 여성이 그러기는 어렵다. 임원이 되고 보니 여성 직원들이 위험한 현장에 있거나 늦게까지 근무지에 남거나 하면 안전에 대한 신경도 비교적 더 쓰이더라”고 말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남자와 다른 부분은 인정하라고 한다. 잘할 수 있는 영역에서 더 전문성을 키우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군대 문화가 있어서인지 좀 더 조직 내에서 정치력을 발휘하고 사회성도 뛰어나고 상하관계도 원만한 편이다. 그에 비해 직장의 관리직 여성들은 리더십을 발휘하는 면에서는 다소 약했다.”

김 상무는 “나 같은 경우에도 나의 강점을 더 살린 편이다. 주택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리서치를 진행할 때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여성이나 아이들의 니즈에 주목해 데이터를 분석했다. 여성들이 선호하는 욕조가 있는 욕실이라든지 인기가 없는 1층은 천고를 높여 개방감을 더한다던지 하는 식이다. 결과적으로 감성적인 주거 상품을 개발했다는 호평을 들었다. 여성만의 강점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