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넥실리스의 동박 제품. 출처=SKC
SK넥실리스의 동박 제품. 출처=SKC

[이코노믹리뷰=박민규 기자] 전기 자동차용 배터리 산업의 핵심 플레이어로 주목 받고 있는 SK넥실리스가 동박 업계의 '기가 팩토리'를 짓겠다는 원대한 야심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27일 SKC(011790)에 따르면 SK넥실리스는 지난 26일 이사회를 열고 말레이시아 사바주 코타키나발루시의 KKIP 공단을 첫 해외 생산 기지 부지로 낙점했다. SK넥실리스는 20여년 동안 쌓아 온 동박 제조 기술력 및 공장 건설 노하우를 신규 공장에 집약해 그야말로 최고의 동박 생산 거점을 구축하겠다는 포부다.

앞서 지난해 11월 기자가 전북 정읍에 있는 SK넥실리스 공장을 방문해 해외 공장 건설 계획을 물었을 당시 SK넥실리스 관계자는 "(SK넥실리스는) 앞으로 테슬라의 기가 팩토리 같은 혁신 공장을 만들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물론 SK넥실리스가 첫 해외 공장부터 기가 팩토리 수준의 퀄리티로 구현하기는 힘들겠으나, 이번 동남아시아 진출은 향후 미국과 유럽 등에 한국형 기가 팩토리를 선보이기 위한 초석으로 평가되고 있다. SK넥실리스의 말레이시아 동박 공장이 착공되기 전부터 시선을 모으는 이유다.

왜 말레이시아인가

SK넥실리스는 말레이시아 코나키나발루에서 약 6500억원을 투자해 연산 4만4000톤 규모의 동박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올해 상반기에 착공해 오는 2023년 내 상업 가동에 돌입하는 것이 목표라는 설명이다. 해당 공장이 완공되면 SK넥실리스의 동박 생산 능력은 현재의 3배 가량인 10만톤에 달하게 된다.

SK넥실리스가 말레이시아를 첫 해외 동박 생산 기지로 택한 것은 전력 공급이 안정적이고 가격도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일 정도로 저렴하기 때문이다. 동박은 티타늄 드럼에 구리를 전착시켜 만들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양의 전력이 필요하다. 또 말레이시아의 경우 풍부한 수력과 액화 천연 가스(LNG) 등을 활용한 신·재생 에너지 발전이 대부분이며 화력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아 친환경적이라는 설명이다.

SK넥실리스는 말레이시아에서도 코타키나발루를 최적지로 판단했다. 사바주의 중심인 코타키나발루는 SK넥실리스가 말레이시아 정부로부터 추천 받은 후보지들 가운데 전력 비용이 가장 낮을 뿐 아니라 동박 수출에 필요한 국제 공항과 항구, 가스·용수 시설 등의 인프라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지역 내 확보 가능 부지도 정읍 공장의 3배인 40만㎡ 규모라 향후 공장 확장을 타진하기에도 용이할 것으로 SK넥실리스는 보고 있다.

SK넥실리스가 최종적으로 코타키나발루를 선택한 데에는 사바주 정부의 협력적인 태도도 한 몫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말레이시아 주(州) 정부들이 외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가운데 사바주는 동박 제조의 핵심인 전력 공급 및 가격, 용수 제공, 부지 정비 및 확장 가능성 등과 관련해 SK넥실리스에게 상당한 혜택을 약속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또한 말레이시아가 동박 생산 거점으로서 지닌 지리적 이점도 크다는 평이다. SK넥실리스 관계자는 "말레이시아는 동남아 내부에 위치해 중국발 동박 수요까지 커버할 수 있고, 물류 허브라 유럽과의 거리도 (한국에서보다) 훨씬 가깝다"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SK넥실리스가 말레이시아와 가까운 인도네시아의 배터리 산업에 협력할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동남아의 전기차 허브를 꿈꾸는 인도네시아는 최근 자국의 배터리 생태계를 육성하기 위해 지난달 우리나라와의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CEPA)을 무기로 LG에너지솔루션과 업무 협약(MOU)을 체결하는 등 광폭 행보를 보이는 모습이다.

이 연장선에서 SK넥실리스가 LG에너지솔루션의 동남아 동박 공급사가 되는 그림도 생각해 볼 수 있다. LG에너지솔루션 경우 솔루스첨단소재로부터 2025년까지 전지박을 공급받기로 했으나, 해당 계약은 유럽 지역에 한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환경이 끌어 주고 스마트가 밀어 주고

SK넥실리스가 말레이시아 공장에 대한 구상에서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신·재생 에너지를 통해 조달 받는, 'RE 100(Renewable Energy 100)' 이행이다. 말레이시아 공장을 동박 업계 최초의 RE 100 사례로 만들겠다는 설명이다.

이는 ESG(환경·사회·지배 구조) 경영을 강화하는 동시에, RE 100 소재의 비중을 확대하기를 원하는 글로벌 고객사의 요청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행보다. 전기차 시장에 뛰어든 미국 애플부터 독일 BMW, 미 제너럴모터스(GM), 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폴란드 배터리 공장 등까지 다수 배터리·완성차 업체들이 속속 RE 100 캠페인에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SK넥실리스 측은 "고객사들이 RE 100을 시행하는 업체의 제품을 쓴다고 하면 (SK넥실리스 입장에서는) 화석 연료가 사용된 제품을 아예 판매할 수 없다"라며 "RE 100이 세계 배터리·전기차 업계의 우선적인 고려 사항이 되는 추세"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애플카' 협업을 꾀하려면 RE 100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앞서 SK넥실리스의 모회사인 SKC를 비롯해 SK 그룹 6개사가 이달 초 한국 RE 100 위원회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또 SK넥실리스는 말레이시아 공장도 스마트 팩토리 기반으로 구축, 여기에 그간 축적해 온 기술력과 노하우가 반영된 자동화 설비들을 도입할 방침이다.

이미 SK넥실리스는 올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정읍 4공장에 인공 지능(AI)으로 조종하는 무인 운반차(AGV), 사람을 대신해 생산 라인에서 분석실까지 동박 샘플을 전달하는 로봇 등을 적용하고 있다. 4공장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5공장과 6공장의 설비 및 생산성을 업그레이드하고, 5공장 및 6공장의 노하우는 말레이시아 공장에 녹여내는 것이 SK넥실리스의 구상이다.

김영태 SK넥실리스 대표 이사는 "(SK넥실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동박을 가장 길고 넓게 생산하는 기술력과 고객사의 요청대로 다양한 동박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레시피 기술력에 걸맞는 (동박) 생산 시설을 말레이시아에 구축할 것"이라 강조했다.

전북 정읍에 있는 SK넥실리스 공장 전경. 출처=SKC
전북 정읍에 있는 SK넥실리스 공장 전경. 출처=SKC

말레이시아 넘어 미국과 유럽으로

SK넥실리스는 말레이시아에 이어 미국과 유럽을 대상으로 후속 투자를 검토하는 중이다. 인건비와 전력 공급 가격이 저렴한 동남아가 원가 절감 측면에서 유리한 무대로 고려됐다면, 미국·유럽 생산 기지는 전기차의 본토로 진출하는 차원이다.

특히 유럽의 경우 5년 만에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의 타이틀을 탈환했으며, 동유럽을 전진 기지로 삼으면 글로벌 배터리·완성차 업체들의 생산 거점에 대한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국내 배터리 3사인 LG에너지솔루션·SK이노베이션·삼성SDI 등도 폴란드와 헝가리에 생산 기지를 두고 있다.

실제로 SK넥실리스는 폴란드에 법인을 설립, 유럽 시장과 현지에서의 환경 영향을 평가하는 데 돌입했다. 이에 대한 최종 결과는 올해 안에 발표될 예정이다. SK넥실리스가 동유럽에 자리 잡으면 솔루스첨단소재와 경쟁할 전망이다. 솔루스첨단소재는 헝가리 전지박 생산 공장을 중심으로 동유럽에서 공격적인 증설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SK넥실리스가 글로벌 공장 신증설에 욕심내는 이유는 급성장하는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다. 에너지 시장 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전기차 시장과 배터리 시장은 2025년까지 각각 연 평균 41%와 38%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동박에 대한 수요도 급격히 늘고 있는 실정이라 SK넥실리스는 현재 가동률 100% 상태다. SK넥실리스는 추가 투자를 통해 4년 뒤까지 동박 생산 능력을 현 5배 이상으로 끌어 올려 세계 최대 동박 캐파(생산 설비 용량)를 확보할 계획이다.

이미 SK넥실리스는 국내 최대 동박 생산 기지인 정읍 공장에도 총 2400억원을 들여 5공장과 6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5공장은 올해 하반기, 6공장은 내년 1분기 완공을 목표로 지어지고 있으며 각각 70%와 15% 넘게 건설된 상태다. 증설이 마무리되면 SK넥실리스 정읍 공장은 단일 공장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동박 생산 기지가 될 전망이며, SK넥실리스의 동박 생산 능력은 현 3만4000톤 수준에서 5공장 완공 시 4만3000톤, 6공장 완공 시 5만2000톤으로 확대된다.

김영태 대표는 "(SK넥실리스는) 말레이시아 진출을 통해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고 RE 100 이행 등으로 ESG 경영을 강화하는 한편, 추가 투자로 글로벌 확장을 가속화해 세계 동박 1위 업체의 지위를 공고히 하겠다"라고 말했다.

일진머티리얼즈와 선의의 경쟁 관계로

SK넥실리스가 첫 해외 생산 기지로 말레이시아를 낙점한 것은 이미 예상된 움직임이라는 게 업계 안팎의 중론이다. 지난해 11월 진행된 SK넥실리스 정읍 공장 투어에서 해외 공장 부지 후보를 묻는 질문에 SK넥실리스 관계자가 가장 먼저 말레이시아를 언급한 것도 이에 힘을 싣는 대목이다.

이 과정에서 SK넥실리스는 경쟁사인 일진머티리얼즈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일진머티리얼즈가 이미 2017년에 진출한 말레이시아 사라왁주 쿠칭시가 SK넥실리스의 해외 공장 부지 후보로 거론됐기 때문이다.

이에 일진머티리얼즈는 인력 유출 가능성을 이유로 강력히 반발했다. 거대 자본을 가진 대기업 계열사가 우대 조건을 내걸면 현지 숙련공들이 대거 이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에서는 인건비가 낮은 시장의 특성상 인력 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기업들 간의 인력 유출 방지 약속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게다가 양 사는 이미 국내에서 인력 유출 논란에 휘말린 악연이 있다. 이후에는 일진머티리얼즈 측이 법적 대응까지 시사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SK넥실리스가 일진머티리얼즈의 말레이시아 동박 공장과 1000킬로미터(km) 이상 떨어진 곳에 생산 기지를 세우기로 확정하면서, 양 사 간의 무드도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분위기다.

이날 일진 그룹 관계자는 "이제는 이차 전지 산업의 발전을 위해 (일진머티얼즈와 SK넥실리스) 양 사가 열심히 선의의 경쟁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