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엠 창원공장의 조립공장. 출처=한국지엠
한국지엠 창원공장의 조립공장. 출처=한국지엠

“한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할 계획은 아직 없다. 국내에서는 전기차를 생산하려면 많은 이해관계자가 연계돼 조율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한국을 전기차 생산지 후보로 할 수도 있다”

로베르토 렘펠 GM 한국사업장 사장이 지난해 10월 창원공장에서 열린 기업 출범 20주년 공장에 참석해 국내 전기차 생산 여부와 관련해 이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외국계 기업이 국내에 전기차 생산 공장을 짓는데 주저하고 있지만 추진할 여지가 존재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여기서 기업들이 한국을 전기차 생산 기지로 활용하기에 애매한 측면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는 한국 경제의 한 축인 완성차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전기차 관련 생산시설을 늘릴 필요가 있다. 내연기관차보다 고부가 가치를 지닌 전기차를 더 많이 생산·판매할수록 산업 발전에도 이롭기 때문이다.

현재 현대자동차와 기아 등 한국 기업은 본거지인 국내에 전기차 전용공장을 짓고 있거나 지을 계획이다. 반면 GM 한국사업장, 르노코리아자동차 같은 외국계 기업은 관련 계획조차 세우고 있지 않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배터리 기술과 기업이 즐비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주저하는 이유에 대해 업계에서는 한국이 가진 낮은 투자 매력도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제도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한국산 전기차의 수출액 및 전체 대비 비중 추이. 출처=산업통상자원부
한국산 전기차의 수출액 및 전체 대비 비중 추이. 출처=산업통상자원부

“자동차 산업은 전략산업, 정부의 투자지원 필요”

7일 완성차 업계에 따르면 국내 자동차 관련 단체 11곳이 결성한 자동차산업연합회(KAIA)는 전날 서울에서 포럼을 열고 국내 전동화 투자 활성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KAIA에 따르면 국내 자동차 산업은 연관 산업을 포함해 국내 150만개에 달하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국가전략산업’으로 꼽힌다. 국가전략산업은 나라 경제 성장의 추진력이 되고 정부가 정책을 펼칠 때 관련 주요 대상으로 분류되는 산업을 지칭한다.

자동차 산업은 이 뿐 아니라 지난해 542억달러치 제품을 수출해 반도체(1292억달러), 석유제품(630억달러), 석유화학(543억원)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수출 규모를 보였다. 이 같은 자동차 산업 관련 지표들은 국내 자동차 산업의 높은 중요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산업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해야 할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기아 화성공장(오토랜드 화성)에서 전기차 EV6가 만들어지는 모습. 출처=기아
기아 화성공장(오토랜드 화성)에서 전기차 EV6가 만들어지는 모습. 출처=기아

자동차 산업에서 특히 전기차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최근 해당 차종의 수출 비중이 커지고 있어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전기차(순수전기차·BEV) 수출액은 지난 2018년 4억4000만달러에서 지난해 22배 넘게 증가한 98억3000만달러로 집계됐다.

이에 따라 전체 자동차 수출액 중 전기차 수출액 비중이 같은 기간 4.4%에서 18.2%로 급등했다. 북미와 유럽 등 주요 전기차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에 대한 수요가 많아져서다.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지난해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점유율 7.1%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강남훈 KAIA 회장은 “무역수지를 개선하고 수출 증가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자동차 산업은 현재 전기차, 자율주행 등을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며 “전기차 산업 주도권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투자에 대한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지엠 인천 부평공장의 전경. 출처= 한국지엠
한국지엠 인천 부평공장의 전경. 출처= 한국지엠

GM·르노, 한국서 전기차 생산 주저…테슬라는 인니로

현대차와 기아는 국내외 전기차 수요가 늘어나는 점을 고려해 울산, 광명, 화성 등에 위치한 생산 현장에 전기차 생산 공정을 늘릴 계획이다. 현대차는 오는 2025년부터 울산에서 전기차 신공장을 가동할 예정이다. 기아는 광명과 화성에 위치한 생산시설(오토랜드)에서 각각 내년과 2025년 양산 개시를 목표로 전기차 전용 공장을 구축할 계획이다.

양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완성차 기업으로서 전기차를 비롯한 미래차에 관한 산업의 허브로서 역할을 강화하려는 취지로 전기차 공정 분야에 투자를 단행했다. 한국에 연구개발(R&D), 판매 등 사업 부문별 네트워크를 전반적으로 갖추고 있어 생산능력을 늘릴수록 다른 사업 부문의 기능을 확대하는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는 점도 투자 명분으로 작용하고 있다.

르노코리아자동차 부산공장. 출처=르노코리아자동차
르노코리아자동차 부산공장. 출처=르노코리아자동차

GM 한국사업장과 르노코리아자동차도 현대차·기아와 마찬가지로 국내 R&D, 판매 등 사업 부문별 조직과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한국에 전기차 생산시설 짓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작은 내수 시장과 각종 규제 때문으로 분석된다.

현재 거대한 내수 시장을 가진 중국 뿐 아니라 미국(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유럽(그린딜 산업전략) 등 주요 전기차 시장을 갖춘 나라가 자국보호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원자재가 원활히 수급되지 않고 공급가가 폭등하는 등 업황에 대한 자국 산업의 대응력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도입하거나 반대로 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 조지아주는 전기차 전용 공장을 짓는 현대차에 투자액의 30%에 달하는 규모로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할 예정이다. IRA에 명시된 조항에 따라 전기차 생산공장 등 ‘적격 첨단 에너지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기업에 세제혜택을 부여하기로 했다. 말레이시아는 투자 규모에 따라 5~20년 기간 동안 법인세를 100% 삭감하고 이후 2년 동안 50%만 부과하는 등 정책을 펼치고 있다.

반면 KAIA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전기차 생산공장을 지으면 이에 대한 투자액의 최대 10%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한다. 다만 이마저 시설 과밀 지역인 수도권에서는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라 배제되고 첨단투자지구로 지정된 지방에서도 투자액 중 최고 10%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수준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11월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한국을 (생산 시설 기가팩토리를 짓기위한)최우선 투자 후보지 중 하나로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결국 인도네시아를 대상으로 투자를 추진한 것도 한국의 낮은 매력도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테슬라 상하이 기가팩토리 전경(사진=테슬라)
테슬라의 아시아 첫 전기차 생산시설인 상하이 기가팩토리의 전경. 출처=테슬라

업계 “시설유치 보조금 늘리고 지방세 감면해줘야”

한국 정부가 전기차 관련 설비 투자를 아예 지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말부터 미래차 부품을 생산하기 위한 설비 투자 등을 실시하는 부품사에 한 업체당 최대 100억원의 자금에 대한 대출 이자를 지원하고 있다. 다만 이외 대부분 신기술을 개발하거나 인력을 양성하는 등 설비 외 분야의 투자 계획이 마련된 상황이다.

KAIA는 정부에 지방투자기업에 대한 유치 보조금 지원비율을 11%까지 높이고 첨단투자지구에 대해서는 가산 비율을 현행 2%보다 늘리는 것을 제안했다. 투자 지역에 상관없이 5년동안 취득세, 재산세 등 지방세를 75% 감면해주는 방안도 언급됐다.

미국, 중국, 유럽 등지에 현재 시행 중이거나 추진되고 있는 규제로 인해 전기차를 현지 생산하는 것이 각 시장을 공략할 최선책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반면 ‘한국에 시설 투자를 유치할 분위기를 조성해놓아야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최근 GM이 신차(트랙스 크로스오버)를 한국에서 만들어 북미까지 수출하고, 르노도 내년 하이브리드 신차를 한국에서 생산하기로 한 만큼 전기차 생산도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라는 관측이다.

김주홍 한국자동차산업협회 수석본부장은 “국내 외국계 기업이 해외 본사와 생산시설 유치를 두고 논의할 때 제시할 투자 조건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라며 “외국 사례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각종 규제를 풀어 투자할 수 있도록 기업을 독려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