뙤약볕이 쬐는
한낮입니다.

아기 방 앞에
바람이 찾아왔습니다.

“아기야,
혼자 심심했지?”

그러나 방에선
대답이 없습니다.

쌔근 쌔근 쌔근
숨소리는 들리는데-

바람은 가만히
방 안을 엿봅니다.

“애개개, 네 활개 활짝 펴고
한잠 드셨네.”

바람은 사뿐
아기 곁에 가 앉습니다.

가만 가만 가만
부채질을 해 줍니다.

가슴을 토닥이며
자장가도 불러줍니다.

그러다 바람도
졸음이 왔습니다.

아기 곁에 가만히
누워 버렸습니다.

-김원기, <아기와 바람>

세상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무척이나 많이 일어난다. 당연한 일이니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고 만다.

하지만 이 당연함에 창조의 씨앗이 있다. 이때의 창조 씨앗은 그냥 보이는 게 아니다. 유심히 관찰해야만 제 모습을 보인다.

컴퓨터가 일상화된 요즘 마우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마우스는 이름 그대로 쥐(Mouse)다. 말하자면 컴퓨터를 사용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쥐를 만진다.

아니 쥐의 형상을 만지고 있는 것이다. 이어령 교수에 따르면 클릭이라는 말도 쥐가 우는 소리를 나타낸 의성어라고 하지 않는가.

자, 그렇다면 왜 이 도구를 마우스라고 했을까. 사람들은 마우스를 매일 사용하면서도 왜 마우스라고 했는지, 그 모양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관찰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관찰을 하지 않아도 컴퓨터 사용하는 데 지장이 없으니 굳이 알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우리 일상에 늘 존재하는 것에, 매우 당연한 것에 물음표를 달지 않으면 창조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상에 한번 더 물음표를 다는 것, 바로 관찰의 방법이다.

쥐는 과거 페스트라는 전염병의 주범으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동물 중 하나였다. 징그럽고 더러움의 대명사였던 쥐가 1920년대 들어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미키마우스가 그 예다. 다들 아는 얘기지만 다시 한번 들여다보기로 하자. 당시 미키마우스를 만든 월트 디즈니는 워낙 가난해서 낮에는 생계를 위한 일을 하고 밤에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 작업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방 벽에 뚫린 구멍으로 생쥐들이 드나드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쥐를 끔찍이 싫어했지만 디즈니는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쥐를 유심히 살폈다.

그랬더니 녀석들은 의외로 퍽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발견이었다. 디즈니는 자신이 발견한 이 귀여운 모습을 모델로 해서 캐릭터를 만들었다. 미키마우스의 탄생이었다.

만약 디즈니가 다른 사람처럼 쥐를 징그럽게만 생각해 관찰하지 않았다면 결코 미키마우스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디서든지 무척이나 흔해서 사람들은 마우스에 대한 관찰을 아예 하지 않는다. 마우스에 질문을 하라. 물음표를 던져보라.

왜 컴퓨터 마우스는 굳이 쥐여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혹 다른 모양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를 고민해 보라. 이러한 관찰 덕분에 새로운 모양의 창조적 제품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1962년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이었던 김원기 시인의 <아기와 바람>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동시는 잠자는 아기에게 바람이 찾아오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만약 ‘바람이 왜 불지?’라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면 ‘아기와 놀아주려고 바람이 찾아왔다’는 상상은 불가능하고, 이어 잠자는 아기와 함께 옆에서 잠든(그러니까 바람이 잠잠해진) 모습은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다.

아기가 잠잘 때 바람이 불면 ‘왜 지금 바람이 불지?’, ‘아기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기에바람이 지금 여기에 불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그래야 <아기와 바람>과 같은 아름다운 동시가 탄생하듯 모든 존재가 새롭게 의미 부여될 수 있다.

황인원 시인ㆍ문학경영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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