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우는 최장수 재무장관(4년11개월)이자 최장수 경제부총리(4년3개월)였다. 한국경제관료사의 대기록이다.

서강대 교수로 재임중이던 1969년 10월 재무부 수장으로 입각한 그는 1978년 12월 경제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직에서 퇴임할 때까지 9년여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개발연대 경제정책의 견인차였다.

그는 1970년대 한국경제를 강타한 두 차례 석유파동을 단기에 극복했으며, 1974년말 석유파동에 이어 닥친 최초의 IMF 외환위기를 신속-과감하게 처리함으로써 부도직전의 경제를 구했다.

특히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능케 한 중화학공업의 육성정책이 국내외 반발에 부딪혀 오도가도 못했을 때, 탁월한 설득력으로 반대세력들을 격파해낸 것도 그였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선봉장’이라는 수식어가 그래서 나왔다.

그런데 1970년대의 언론이나 관가에서는 그에 대해 한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도대체 일개 백면서생(서강대 교수)으로서 살벌하고 무상(無常)한 권력핵심부에서 버티며 장수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거나 대통령비서실장 김정렴 과의 확고한 연대 혹은 해박한 경제이론 덕분이라고 쉽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훗날 하나 둘 알려진 장수비결은 ‘미나미 식 처세법’이라 불렸다. 미나미는 그의 성 ‘남(南)’의 일본어 발음이다. 그는 혼자였다. 교수출신이라 관계(官界)에 기반도, 연줄도 없었다. 굳이 새로 만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부처를 이끌고 가는 것은 제도이지, 사람이 아니다”라는 인사소신에 따라 철저히 서열위주로 발령을 냈다. 자신의 인사권 마저 묶어버리는 자승자박형 인사정책이었다. 그로 인해 경제기획원에 전통적으로 뿌리박고 있던 인맥, 파벌이 남부총리 시절 거의 와해됐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그는 조용했다. 전임 장기영-김학렬 등 강성 부총리처럼 권력을 최대한 행사하거나 소리치거나 상대의 의표를 찌르기 위한 기행을 일삼지도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었다. 주위를 집중시키려고 일부러 그런 듯도 했다. 그의 말을 들으려면 신경 써서 귀를 기울여야 했다. 아무리 격앙된 상대방도 그의 답변을 듣기 위해서는 숨을 골라야 했다. 맘에 안 드는 결재가 올라와도 소리지르지 않고, "글쎄,이 것이 최선인가? 한번 두고 가보게"라고 한 뒤 기안자 스스로 최선책을 찾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매사 확실했다. 겉은 부드러워도 결국 자기 철학대로 상황을 끌고 갔다. 평소 “국회 갈 때는 오장육부를 빼놓고 간다”고 했으나 거친 야당 공세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타 경제부처와의 이견이 드러나면 의견조정 과정에서 둘을 얻기 위해 하나를 내주는 ‘거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설득리더십의 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하나. 재무장관 시절 세관비리로 인하여 일선 세관장 A씨가 숙정대상에 오르자 군부 실력자 B장군이 전화를 걸어 왔다. 선처를 요청하는 것이었으나 사실상 압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른 새벽 B장군 집 대문을 두드리는 불청객이 있었다. 남장관이었다. 그는 특유의 진지한 태도로 숙정작업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당황한 장군은 “국사(國事)를 위한 일이니 오히려 소신껏 일하시라”고 본의 아닌 격려까지 하고 말았다. 세관장 A씨는 당일 인사조치됐다.

지난 5월18일자 조간신문 1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재정전략회의에서 ‘모든 부처가 재정지출을 효율화하는데 앞장 서달라’는 모두발언 후 퇴장하고,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부처별로 총 82조원의 재정지출을 줄이는 구조조정안을 설명했다. 그런데 각 부처 장관들의 반발이 컸다. 대안마련이 어려울 것 같다”. 기사제목은 ‘장관들 아우성’이었다.

기사 때문에 또다시 경제부총리의 존재감이 있니 없니 하던 이날 저녁, 남덕우 전 경제부총리가 세상을 떠났다. 불황으로 인한 곳곳의 갈등으로 어느 때보다 설득형 리더가 필요한 시기에 정부관료들의 롤모델이 사라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