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9일, 숫자 ‘9’가 많이 들어가 복이 많다는 날에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은 ‘직무정지’ 상당의 중징계를 받았다. 이미 지난 3일과 4일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위원회를 통해 중징계가 내려진 상황이었지만, 최종 결정은 금융위원회의 몫이었다.

황영기 회장의 중징계 결정을 비롯해 키코 제재 등 금융회사 임직원과 금융회사 제재 등 총 11개의 안건이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에 올라와 있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뤄진 금융당국의 징계 안건이 한꺼번에 몰린 것이다.

이 때문일까. 제재심의위원회의 회의시간은 13시간이 걸렸다. 3일 오후 2시30분에 시작됐지만 4일 자정이 넘어서도 결론이 나지 않자 최종 결정만 남긴 채 제재심의위원회를 휴회했다.

장장 1박2일 마라톤으로 이어졌던 제재심의위원회는 4일 오전 7시 최종 결정을 내리고 회의를 끝냈다.

키코 관련 금융사 제재

기존 제재심의위원회의 회의 과정은 ‘설명→반론→토의→의결’로 끝나지만, 이번 회의에서는 금감원 실무진의 설명을 모두 듣고 건별로 반론을 듣는 방식을 채택했다.

키코는 설명 없이 바로 은행 측의 반론부터 들어갔다. 은행의 불완전판매는 이미 검증됐기 때문이다. 키코는 환율이 일정 범위 안에서 변동하면 미리 약정한 환율에 약정금액을 팔 수 있도록 한 파생상품이다. 2007년 은행들이 ‘꺾기’로 키코의 불완전판매를 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은행에 대한 중징계는 불가피해 보였다.

초반부터 은행 측의 반론은 강력했다. 몇몇 은행장들은 직접 금감원을 찾아와서 위원들을 설득했다.

특히 하영구 씨티은행장은 위원들에게 판매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불완전판매가 아니었음을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은행 측은 “키코 문제는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인 사안이라 판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잠시 유보해 달라”고 설득했다고 전해졌다.

심의위원들은 1시간 동안 은행 측의 반론을 듣고, 토의를 시작했다. 제재 여부와 수위를 놓고 격론이 시작된 것이다. 제재 대상 은행은 신한, 하나, 외환, 한국씨티, SC제일은행 등 상당수 은행들이었다.

논의는 이랬다. 현재 불확실성이 남아 있는 가운데 제재받은 은행이 자칫 위기를 겪을 수 있다는 의견과, 그래도 은행이 불완전판매를 했으며 제재로 인한 위기는 겪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또 영업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릴 것이냐, 경고 조치만 취할 것이냐에 대한 의견이 맞서기도 했다.

오후 4시30분, 여러 논의 끝에 키코 관련 제재는 보류됐다. 은행 측의 의견을 감안해 키코 소송의 1심 판결 결과를 지켜본 후 제재 일정을 다시 정하기로 한 것이다. 키코 제재는 언제 결정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금감원 관계자는 “기약할 수 없다”는 말로 짧게 끝냈다.

황영기 회장 대리인의 반론 시작

회의는 2시간 동안 휴회했다. 그 후 저녁 6시30분부터 회의를 속개, 심의위원들은 농협, 우리은행, 신한은행에 대한 종합검사 결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 설명 후 법무법인 세종의 변호사가 나섰다.

그는 황영기 전 우리은행장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것이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세종 변호사는 1시간30분 동안 반론을 펼쳤다.

반론 시간은 원래 30분~1시간만 주어지지만, 이번만큼은 자유롭게 반론하도록 했다고 한다. 나중에 있을 불만을 방지하기 위해 시간을 충분히 제공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그 후 심의위원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 또는 반론이 이어졌다. 이 또한 1시간30분 동안 계속됐다. 이 논의의 핵심은 ‘황 전 은행장의 결제 사인 여부’였다.

은행 결제시스템은 한 안건의 결제가 관련 부행장급에서 끝난다. 투자전략 등의 계획은 은행 내 심사부를 거치고, 관련 부행장이 주도하는 심의위원회에서 최종 결제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금융지주사 회장이나 행장은 부행장의 의견을 참고하고 조언을 해주는 역할일 뿐이다. “본인이 결제하지 않았다”는 황 전 행장의 말은 이러한 은행 결제시스템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거액의 해외투자에 있어 지주사 회장과 행장의 결제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의견도 거셌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이미 (황 전 은행장의 결제 사인이 들어간) 증거는 확보해 놨기 때문에 반론을 들을 이유도 없었다”며 “대리인은 그 증거에 대해 반론을 펼치는 게 아닌, 다른 의견으로 응수했다”고 말했다.

대리인 변호사와 심의위원 간의 토론은 밤 9시가 돼서야 끝을 볼 수 있었다.

도시락 저녁 후 황 회장 중징계 격론

대리인의 반론은 계속됐지만 결론을 낼 수 없는 상황이라 심의위원들은 반론시간이 지났다며 대리인을 돌려보냈다. 그 후 허기진 배를 도시락으로 채우고 밤 10시 회의를 속개했다.

이제는 심의위원 간의 토론이다. 심의위원들도 둘로 갈라져 징계의 타당성과 수위를 놓고 격론을 펼쳤다.

하지만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에서 과도한 파생상품 투자로 인해 1조원 상당의 손실을 입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라는 반론이 있었다.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만큼 책임을 물어 더 강한 규제를 해야 한다는 강경한 의견이었다.

이미 나온 결론 갖고 논의하지 말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황 회장의 징계는 이미 예고됐고, 위에서도 예상한 결과였다는 점을 미뤄볼 때 이렇게 시간 끌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많은 논의 끝에 밤 11시30분, 황 회장에게 직무정지 상당의 중징계가 의결됐다. 그리고 황 전 행장의 후임이었던 박해춘 전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과 당시 수석부행장이었던 이종휘 현 우리은행장 등 전현직 우리은행 임원에 대한 징계는 바로 결론이 났다.

우리은행 영업정지 해, 말어?

우리은행에 대한 제재 여부는 심의위원들에게 참 곤란한 안건이었다. 이 회의에서 우리은행에 대해 제재를 내릴 경우 일부 영업정지 조치가 취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감독 규정 중 ‘3년 이내에 기관경고를 3번 이상 받는 금융회사에 일부 영업정지 조치가 취해질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우리은행은 지난해 2월 삼성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금융실명법 위반, 자금세탁 혐의거래 미보고로 1차례, 올 6월에는 파워인컴펀드 불완전판매로 2차례의 기관경고를 받은 상태이다.

이번에 기관경고를 받을 경우 총 3차례의 기관경고로 영업정지 조치가 취해질 우려가 있다.

제재심의위원회에 참석한 위원들은 우리은행에 대한 제재에 대해 고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몇몇 위원들은 우리은행을 살리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의 기업가치가 하락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은행의 대외 신뢰도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공적자금을 투입한 은행인만큼 상징적으로 제재를 부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국민의 혈세를 투입한 은행이 2번의 기관경고도 모자라 3번의 기관경고까지 받았으니,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제재 절차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기관경고까지의 제재는 금감원 자체에서 결론낼 수 있지만, 영업정지 조치는 금융위원회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

우리은행에게 기관경고를 내릴 경우, 자동적으로 감독규정에 따라 일부 영업정지 조치를 받는다. 그렇다고 금감원이 영업정지라는 제재를 부과하기에는 법적 절차를 무시, ‘월권’을 행사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이미 자동적으로 영업정지인데 (제재심의위원회에서) 결론낸다고 한들 대수겠냐”는 의견이 일부 심의위원들 사이에서 나왔다. 여기서 정할지 금융위로 올려야 할지 딜레마에 빠진 셈이 됐다.

결국 우리은행 제재에 관련해서는 법적 절차를 따져서 금융위에 올리기로 했다. 당시 시각은 자정을 넘어선 00시 하고도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4시30분, 여러 논의 끝에 키코 관련 제재는 보류됐다. 은행 측의 의견을 감안해 키코 소송의 1심 판결 결과를 지켜본 후 제재 일정을 다시 정하기로 한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기약할 수 없다”는 말로 짧게 끝냈다.

휴회 그리고 뒷이야기

모두가 지쳤다. 그도 그럴 것이 3일 오후 2시30분에 시작했던 제재심의위원회가 12시간 가까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제재심의위원장을 맡았던 이장영 부원장은 “휴회하고 오늘(4일) 7시에 회의를 속개하자”며 휴회를 선언했다.

시간이 오전 12시를 넘었기 때문에 이미 1박2일을 찍은 제재심의위원회였지만, 정말 1박을 하는 회의가 돼버린 것이다.
신한은행과 농협의 종합검사에 대한 결론은커녕 논의도 꺼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심의위원들은 각자 우스갯소리를 덧붙였다. “이렇게 징한 회의는 처음이다”, “이미 결정난 사안을 갖고 격론한 것 같다”, “내일은 빨리 끝내자” 등등이었다고 한다.

김현희 기자 wooang13@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