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넘어 세계 섬유 산업을 이끈 '큰 별'이 영면에 들었다. 한국 재계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한 '맏형'이기도 하다.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29일 향년 89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2017년 고령과 건강상 이유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7년 만이다. 

"기업의 미래는 원천기술에 달렸다."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이 29일 영면에 들어갔다. 사진 = 한국경영자협의회.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이 29일 영면에 들어갔다. 사진 = 한국경영자협의회.

조 명예회장은 '원천기술'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변변한 자원도 없던 시절 경제 대국인 미국, 일본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기술' 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효성은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1971년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1992년 '섬유의 반도체'라고 불리는 스판덱스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고, 2000년 상용화에 성공한 원동력은 기술에 대한 그의 열정에서 비롯됐다. 

'섬유업계의 거인' 조 명예회장은 기업, 기업인, 그리고 직원들을 향해선 애정으로 일관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등 경제 단체의 수장을 맡으며 산업계의 목소리를 대변해 '재계의 맏형'으로 불렸다.

그러나 자신에겐 엄격했다. 

조 명예회장의 별명은 '조대리'였다. 매사를 꼼꼼히 챙기고 실무에 능하다고 해서다. 조 명예회장 역시 자신의 별명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는 정도에 입각한 투명경영을 강조했다. 감사업무를 새로 맡은 회계사에게 "나부터 감사하시오"라고 한 일화도 유명하다. 조 명예회장은 평소 "편법으로 만든 것들은 성공한다고 해도 한 번에 무너지기 쉽다"고 말했다.

또한 조 명예회장은 화려해 보이는 삶을 꺼렸다. 평소 수행비서를 대동하지 않았다. 그가 중국 출장에서 귀국하는 길에 마중 나온 임원들이 가방을 들어주려고 하자 "내 가방은 내가 들 수 있고 당신들이 할 일은 이 가방에 전략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서를 좋아하며 학구적이고 동시에 합리적이기도 하다.

대학교수 꿈꾸던 공학도, '스판덱스의 아버지' 되다

일본 유학 중인 조석래(왼쪽) 명예회장과 부친 조홍제 창업회장. 사진 = 효성 그룹.
일본 유학 중인 조석래(왼쪽) 명예회장과 부친 조홍제 창업회장. 사진 = 효성 그룹.

조 명예회장은 1935년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과 하정옥 여사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군북국민학교를 다니다 5학년 때 서울 종로구 가회동 재동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이곳에서 1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히비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9년 일본 와세다대 이공학부를 졸업한 조 명예회장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공대(IIT)에서 화학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조 명예회장은 대학 교수를 꿈꾸는 공학도였다.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1966년 2월 부친으로부터 급히 귀국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효성은 동양나일론 울산공장 건설을 추진하면서 그룹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던 시기였다. 조홍제 회장은 화공학을 전공한 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아버지의 부름에 아들은회사로 달려가 효성그룹 도약의 기틀을 다졌다.

조 명예회장은 섬유업계에서 '스판덱스의 아버지'란 평가를 받는다.

그는 '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스판덱스를 국내 독자 기술로 개발해 효성을 전 세계 스판덱스 1위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스판덱스를 독자 기술로 개발한 것은 1982년 효성그룹 회장에 취임해 2017년까지 35년간 효성을 이끄는 동안 가장 손꼽히는 그의 업적이다.

고인은 평소 "누구도 가지 않을 길을 가라"고 강조했다. 불확실성과 불가능에 도전하며 핵심 산업 기술 국산화를 이뤄낸 것이다.

당시 스판덱스 개발 일화는 세월이 지나서도 회자되고 있다. 

조 명예회장은 1990년 스판덱스 사업 진출을 결정하며 효성 섬유연구소 연구원들에게 '스판덱스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당시 스판덱스 제조기술은 미국, 독일, 일본만이 보유하고 있었다. 기술 개발이 지지부진한 동안 효성 내부에서는 '돈만 낭비하는 사업'이라는 개발 반대 여론이 터져나왔다.

효성의 연구원들은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으며 프로젝트명을 ‘Q(Question)’로 지었다.

이처럼 '돈만 낭비하는 사업'이라며 개발에 반대하는 내부 목소리에 대해 조 명예회장은 "안 되는 이유 100가지를 찾지 말고, 될 수 있는 한 가지 기회를 찾자"고 독려했다.

결국 3년 만에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이룬 쾌거였다. 현재 효성의 스판덱스 브랜드 '크레오라'는 독자기술 개발로 미국 듀폰의 '라이크라'를 제치고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조 명예회장은 누구보다 연구개발(R&D)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경영자였다. 효성이 스판덱스와 타이어코드, 에어백 원단, 폴리케톤(공업용 플라스틱) 등 세계 1위 제품을 4개나 보유할 수 있었던 것도 조 명예회장의 ‘기술 경영’ 덕분이다.

'글로벌 효성' 이뤄내다..."내가 직접 홍수를 일으키겠다"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이 2004년 중국 저장성 자싱의 타이어코드 공장을 찾았다. 자싱은 조석래 명예회장이 역설한 '홍수론'에 따라 중국에 첫 생산 공장을 세운 곳이다. 사진 = 효성그룹.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이 2004년 중국 저장성 자싱의 타이어코드 공장을 찾았다. 자싱은 조석래 명예회장이 역설한 '홍수론'에 따라 중국에 첫 생산 공장을 세운 곳이다. 사진 = 효성그룹.

오일쇼크 여파로 전 세계가 불황의 늪에 빠진 1982년 조 명예회장은 효성그룹 회장에 취임해 효성의 중흥을 이끌었다. 1983년에는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면서 효성 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대대적으로 손질했다.

이 선언 이후 효성 그룹은 화학, 섬유, 중공업, 건설, 정보통신, 무역 등의 사업에 집중해왔다. 이를 제외한 비주력 사업은 기존 사업과 통합하거나 매각했다.

그룹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만든 뒤 그는 글로벌로 무대를 옮겼다. 중국, 베트남 등에 스판덱스 생산 공장을 세우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을 이끌었다.

1993년 12월 다자간 무역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 타결 당시 그는 "기업이 정부와 국가의 보호벽 안에서 안주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판단하고 중국을 글로벌 전초기지로 염두에 뒀다.

조 명예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효성은 1999년부터 세계 최대 섬유시장인 중국에 본격 진출했다.

당시 조 명예회장은 "내가 직접 홍수를 일으켜야겠다"는 일명 '홍수론'을 내세우며 중국에 대대적인 시설투자를 단행했다.

그 결과 효성은 중국 사업장을 중심으로 현지 시장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미국, 유럽 등으로 수출을 확대하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대폭 늘렸다.

25개 현지 생산·판매 법인과 7000여 명의 임직원이 자리한 중국은 지금까지 효성의 명실상부한 글로벌 전초기지 역할을 맡고 있다.

이후 인건비 상승 등으로 중국의 경영 환경이 악화되자 조 명예회장은 베트남으로 눈을 돌렸다.

효성은 2007년 베트남 호찌민시 인근에 공장을 건립하며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제2의 글로벌 전초기지를 세웠다. 현재 베트남 공장은 세계 최대 공급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어 2008년 터키, 2011년 브라질에 공장을 완공하면서 아시아를 비롯해, 유럽·중동·북아프리카부터 중남미 시장까지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한 생산 네트워크를 확보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