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전경. 사진=HD현대중공업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전경. 사진=HD현대중공업

중국 산업계의 시장 침투를 견제하고자 하는 미국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대중 반도체 규제와 IRA(인플레이션감축법)에 이어, 최근에는 미국 조선 전후방산업 관계자들이 중국 조선업의 미국 내 영향력을 축소시켜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그간 대중 강경책을 펼쳐왔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런 트럼프에게서 표를 사수해야 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입장 상 마냥 수용 가능성이 없는 요구는 아니라는 해석이 나온다. 

물량에 이어 ‘기술력’까지 확보한 중국 조선의 대약진

최근 전미철강노조 등 미국 5개 노조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중국의 조선·해운 산업 내 불공정 관행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것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노조는 “중국은 국가가 불공정하게 개입해 저가 수주 공세로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고 세계적으로 항만 및 물류 시설망을 구축한 뒤 미국 선박과 해운사를 차별하고 있다”며 미국 항구에 정박하는 중국산 선박에 요금을 부과(항만세)하고, 국내 조선업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조성하며, 미국산 상선에 대한 수요를 창출할 방안 등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은 지난 2015년 ‘중국제조 2025’를 발표, 조선업을 비롯해 IT, 우주항공, 신재생에너지 등을 10대 우선 분야로 선정한 뒤 수백억 달러를 투입했다. 2025년까지 한국과 프랑스를 따라잡고, 2049년에는 미국을 꺾고 세계 1위로 올라서겠다는 목표를 담았다.

9년이 지난 2024년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은 이미 중국 제조업계의 시장 침투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그림이다. 특히 중국 조선은 이미 지난해 CGT(표준선환산톤수) 점유율 60%를 기록하며 24%에 그친 한국을 크게 앞섰다. 기술력도 선진 시장을 대폭 따라잡았다. 고부가가치선 시장에도 이미 진출 중이다. 지난해 세계 컨테이너선 발주량의 57%를 중국 조선사가 수주했으며, 그 대부분은 메탄올·LNG 추진 컨테이너선과 하이브리드형 컨테이너선 등 고가 선종이 차지했다. 중국이 제조 2025를 통해 자국 조선업계의 해양플랜트 테스트, 모니터링, 검증역량 강화, LNG선 등 최첨단 선박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 등을 천명한 만큼, 향후 중국의 기술 성장세는 더 가파르게 올라갈 것으로 예견된다.

미국 내 중국 조선 규제 요구의 배경엔 이처럼 중국 조선업의 무서운 성장세에 대한 경각심이 깔려있다.

이번에 USTR에 청원서를 제출한 주체는 조선업의 대표적 후방산업인 철강업계 노조다. 자국 내 조선산업이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생해 전방산업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의도다. 실제로 미국 조선업계는 지난 1970년대까지는 세계 점유율 1위를 차지했으나, 오늘날 19위(1%)로 밀려나며 자생력을 잃은 지 오래다. 파이낸셜타임즈에 따르면 당시 레이건 정부는 조선업체들이 냉전 시기 군함 건조만으로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고, 정부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국가 단위로 친환경, 자동화 조선 기술 확보를 추진하는 중국과는 반대되는 행보가 오늘날 업계 내 위상을 결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미 조선업계로선 올해 11월 예정된 대선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정부의 대중정책 노선에 따라 자생 가능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표적 대중 강경파다. 그가 집권한다면 대중 조선 규제안 역시 일부 수용될 가능성이 생긴다. 다만 바이든 전 대통령도 마땅한 중국 억제책을 수용하거나 내놓지 않으면 노동자들의 표심을 잃을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 역시 노조의 이번 요구에 대해 “언제나 중국의 불공정 관행에 맞설 것이며, 미국 노동자 보호를 위해 싸울 것”이라며 “USTR에서 청원서를 법에 따라 면밀히 검토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현실적으로 항만세 등의 규제책을 전방위로 수용하기엔 무리가 따른다고 지적한다. 중국산 선박에 대해 항만세를 부과할 경우, 중국 국적이 아닌 타국의 선주들은 중국산 배를 운용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고한 항만세를 내게 되기 때문이다. 안유동 교보증권 애널리스트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범 서방국가들의 러시아 제재처럼 중국 조선업계를 향한 전방위 공급 제한이 이뤄지는 게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지만, 그럴만한 당위성도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해 2020년 인도한 17만 4천 입방미터급 LNG운반선. 사진=HD한국조선해양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해 2020년 인도한 17만 4천 입방미터급 LNG운반선. 사진=HD한국조선해양

한국 반사이익 가능성은

한편 미국에서 중국 조선업 규제 움직임이 보이자 점유율 세계 2위인 대한민국 조선업계에도 호재가 될 수 있을지 여부가 주목된다. 조선업 자립도를 높이고 싶은 미국이지만, 이미 인프라와 기술 발전이 정체된 지 오랜지라 우방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시선이다. 미국의 대표적 우방국인 한국과 일본은 세계 2, 3위의 건조실적과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한화오션은 미국 현지에 생산 거점과 북미 진출 교두보를 마련 중이다. 지난해 3분기에는 미국 자회사인 한화오션 미국 홀딩 컴퍼니를 설립했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추진한 2조원대 유상증자 중 4200억원을 해외 생산 거점 확보와 MRO(유지·보수·정비) 기업 지분에 사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한화오션의 미국 및 글로벌 진출 노력에 미국의 중국 조선업 견제 움직임이 마중물이 될 수 있다.

IMO(국제해사기구)와 EU 주도의 해상 탈탄소화 움직임도 국내 조선사들의 주가를 더 뛰게 하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81차 MEPC(해양환경보호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외신들에 따르면, 81차 회의에서는 IMO가 제시한 넷제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경제적 조치들(벌금, 온실가스 가격 책정, 선박에서의 친환경 에너지 사용을 의무화하는 연료 기준 등)에 대한 입법체계 초안이 결정됐다. 삼성증권은 “선박 환경규제 강화라는 방향성이 후퇴하지 않은 점이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해양 친환경화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된 만큼, 미국 조선업계로서는 이런 시류에 편승해 성장해야 한다. 세계 최고의 친환경선 관련 기술력을 보유한 한국 조선업계와의 협력이 매력적인 이유다.

HD현대는 특히 여유롭다. 세계 유일 친환경선 개조·AS업체인 HD현대마린솔루션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HD현대마린솔루션은 오는 5월 IPO를 앞두고 있다. 마린솔루션을 제외하고도, HD현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친환경선 건조·개발 이력을 자랑한다.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 (왼쪽 두번째)와 권혁웅 한화오션 대표이사(왼쪽 세번째). 사진=한화오션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 (왼쪽 두번째)와 권혁웅 한화오션 대표이사(왼쪽 세번째). 사진=한화오션

한편 국내 특수선업계에 대한 미국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군사 목적의 특수선인 만큼, ‘확실한 기술력’을 갖추고 ‘믿을만한 우방국’인 국가와의 공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안유동 교보증권 애널리스트는 “현재 HD현대중공업의 특수선 부문 연간 동시건조능력은 호위함 3척, 잠수함 0.5척, 잠수함 창정비 1척 수준이며, 한화오션의 경우 현재 수상함 2척, 잠수함 2척, 창정비 2척 수준” 이라며 “HD현대는 2029년까지 동시건조능력 30% 증대가 목표, 한화오션은 수상함과 잠수함을 두 배이상 동시건조 하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은 최근 한국과 일본 관계자들과 접촉해 조선기업들의 북미 사업 확대를 촉구했다. 델 토로 장관은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 사업장을 직접 방문해 건조 중인 특수선 등을 둘러봤다. 미 해군은 함정 MRO 물량을 해외로 돌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기술력이 뒷받침되는 우방국인 한국 조선소가 유력 후보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