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이 2011년 AR 디바이스인 구글 글래스를 처음 공개했을 당시만 해도 단숨에 스마트 글래스의 시대가 도래할 것 같았다. 포스트 스마트폰의 강력한 후보군으로 급부상하며 웨어러블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그러나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낮은 기술력에 사생활 침해 논란, 해킹 이슈까지 터지며 프로젝트 자체가 크게 휘청였기 때문이다.

구글은 2017년 B2B용 글래스 엔터프라이즈 에디션을 공개하며 활로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이 역시 판을 흔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2023년 구글 글래스 사업을 공식적으로 종료했다. 현재 구글 글래스는 삭막한 '구글 공동묘지'에 묻혀 잠들어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최근의 상황이다. MR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커지며 헤드셋 경쟁이 벌어지더니, 잊혀졌던 AR 기반의 스마트 글래스 소식도 조금씩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은 MR 헤드셋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가 한국을 방문해 조주완 LG전자 사장과 비빔밥을 한그릇 한 후 어깨동무를 하더니 '삼성전자-구글-퀄컴 vs 메타-LG전자 vs 애플'의 구도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다만 메타가 스마트 글래스 로드맵에 시동을 걸고, 한때 주춤했던 애플도 조금씩 스마트 글래스 시장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공동묘지에 묻혀 안식을 취하고 있는 구글 글래스가 들었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것 같은 소식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저커버그의 한국 방문 행보에 단서가 있다. 조주완 사장과의 비빔밥 회동 후 찾아간 승지원과의 연결고리. 바로 AI다.

저커버그가 레이밴 스토리를 착용하고 의상을 고르고 있다. 사진=갈무리
저커버그가 레이밴 스토리를 착용하고 의상을 고르고 있다. 사진=갈무리

메타와 애플, 움직이다
메타 퀘스트 시리즈로 MR 시장을 흔들고 있는 메타가 스마트 글래스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빌드업' 수준에만 머물고 있는 레이밴 스토리 기반의 새로운 AR 스마트 글래스 출시를 예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커버그는 14일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레이밴 스토리 이미지를 올린 후 몬타나에서 주말을 보냈다는 콘텐츠를 올렸고, 쓰레드에는 본인이 직접 레이밴 스토리를 착용한 이미지를 업로드하기도 했다.

메타는 2021년 1세대 레이밴 스토리를, 2023년에는 2세대 레이밴 스토리를 공개했으나 AR 및 AI 기술력은 기대 이하였다는 평가다. 다만 최근에는 관광 가이드 기능을 추가하는 등 새로운 '빌드업'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여세를 몰아 오는 10월 개발자 회의인 커넥트에서 레이밴 스토리가 아닌 전혀 새로운 스마트 글래스 라인업을 공개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리얼리티 랩에서 8년간 개발하고 있는 프로젝트 오리온의 프로토 타입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다.

만약 커넥트를 통해 프로젝트 오리온이 공개된다면 정식 출시는 2024년이 유력하다.

애플도 움직이고 있다. 비전프로를 통해 공간 컴퓨팅의 개념을 덧댄 MR 헤드셋을 공개한 상태에서 새로운 스마트 글래스를 개발하고 있다는 전망이다.

물론 AR 기술 자체에 대한 동력이 다소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2023년 1월 AR 기반의 스마트 글래스 출시를 무기한 연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플 내부적으로 AR과 스마트 글래스 전반의 큰 흐름은 놓지 말아야 한다는 기류가 강하다. 비전프로를 통해 MR 헤드셋에 먼저 집중하고 있으나 팀 쿡 애플 CEO의 AR 기술에 대한 열의가 워낙 큰데다, 그가 MR의 메타버스보다는 AR의 스마트 글래스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구글 글래스. 사진=구글
구글 글래스. 사진=구글

생성형 AI와 스마트 글래스가 만나면?
최근 AR 기반의 스마트 글래스에 대한 논의가 급부상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스마트 글래스의 발목을 잡았던 여러 문제들이 어느정도 해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야각 등의 기본적인 문제들은 여전하지만 5G 등 네트워크 속도의 성장과 다양한 하드웨어 기술 스펙으로 스마트 글래스, 특히 구글 글래스의 부상을 가로막았던 난제들은 어느정도 풀리고 있다.

비록 시장 초반이지만 MR 헤드셋이 급부상하는 장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기에 따라 VR과 AR을 망라하는 MR은 기술적 측면서 보면 상위 레벨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스냅드래곤 하와이 서밋에서 만난 휴고 스와트 (Hugo Swart) 퀄컴 부사장 겸 XR 부문 본부장은 "XR 플랫폼과 AR 플랫폼을 동시에 제작하고 있으며 이는 전력 효율을 고려한 조치"라며 "AR에는 저전력, XR에는 고전력이 필요한 기능들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전력의 차이는 곧 성능의 차이로 볼 수 있으며, 일단 MR은 VR 및 AR의 상위 버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상위 버전인 MR 헤드셋 시장이 열린다면 당연히 하위 버전인 AR 스마트 글래스 시장이 열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별도의 배터리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비전프로의 MR 헤드셋보다 AR 기반의 콤팩트한 스마트 글래스는 상용화 진입장벽이 다소 낮다. 완전한 난제의 해결은 아니지만, 스마트 글래스의 시장성과 대중성은 상대적으로 충분하다는 평가다.

생성형 AI 기술도 '키 포인트'로 활동할 수 있다. 오픈AI의 챗GPT와 구글의 제미나이, 앤트로픽의 클로드3 등 강력한 생성형 AI 기술이 등장한 가운데 이들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AR 기반의 스마트 글래스 사용자 경험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 연장선에서 구글은 지난 구글 I/O 2022에서 스마트 글래스를 '깜짝' 등판시키기도 했다.

오랜만에 무덤에서 부활한 구글 글래스는 혼자가 아니였다. AR 기반의 스마트 글래스라는 정체성은 여전했지만 AI 기술이 전면에 나와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했기 때문이다. 

착용한 사람이 외국어 메뉴판을 바라보면 번역된 언어로 메뉴판이 보이고, 대화 시에도 상대방의 말이 안경 옆에 번역된 텍스트로 표시되는 장면이 연출됐다. 나아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부모와 자녀가 통역사 없이 자유롭게 대화하는 장면도 나왔다. 그동안 꿈꿔오던 '언어의 장벽과 국경 없는'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한 세상이 한 발짝 가까워졌음을 보여줬다는 설명이다. 구글의 제품 매니저 맥스 스피어가 "온 세상에 자막을 다는 일"이라 표현한 것이 정확히 들어맞는 기술력이다.

다만 완성도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컸다. 번역에 있어 오역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공개된 기술력은 테스트에 불과했고, 구글의 번역 품질은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은 생성형 AI 시대를 맞아 상당부분 채워질 수 있다. 2022년 당시만 해도 생성형 AI가 대중화 바람을 타지 못했을 때였다. 그러나 2024년 지금 우리는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얼마나 강력하게 판을 흔들 수 있는지, 또 구글의 젬마처럼 AI가 얼마나 가볍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 퀄컴의 온디바이스AI처럼 얼마나 효율적으로 AI를 가동할 수 있는지 목도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AR 기술의 발전과 하드웨어 폼팩터의 한계 돌파에 생성형 AI 기술이 덧대어지는 순간 스마트 글래스의 심장은 다시 뛸 가능성이 높다.

언어 장벽을 파괴하는 컨셉인 구글 글래스. 사진=갈무리
언어 장벽을 파괴하는 컨셉인 구글 글래스. 사진=갈무리

최근 방한한 존 행키 나이언틱 대표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는 AR 기술에 주목한 스마트 글래스의 발전이 게임 등 다양한 영역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IP와 AR, AI 등의 시너지가 강하게 벌어질 것이라 강조했기 때문이다.

AI와 AR의 시너지를 통해 스마트 글래스의 혈관에 뜨거운 피가 돈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터넷과 모바일의 이후'로 스며들 수 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손바닥만한 디스플레이로 세상과 만나는 모든 사용자 경험이 사라지고, 눈을 뜸과 동시에 온 세상과 연결되는 매커니즘이 익숙한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 그 이름이 메타버스든, 공간 컴퓨팅이든 상관없다. 그 자체가 우리의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