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최초의 AI 규제법인 AI법을 전격 통과시켰다. 미국도 비슷한 AI법을 추진하는 가운데, 아직 AI법 윤곽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 한국은 두 법안의 행간을 면밀히 파악한 후 전략적 판단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티에리 브르통 EU 산업담당 집행위원. 사진=연합뉴스
티에리 브르통 EU 산업담당 집행위원. 사진=연합뉴스

EU의 그림은?
티에리 브르통 EU 산업담당 집행위원은 2일(현지시간) “회원국들이 AI 규제법 최종 합의안을 승인했다”면서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유럽의회가 오는 13일 담당위원회 표결을 거쳐 3~4월 의회 본회의에 안건을 상정할 경우 일부 조항은 이르면 여름부터 시행될 전망이다.

본격적인 AI법 가동은 2026년을 목표로 한다.

2021년 초 발의된 AI법은 산업 전반에 대한 포괄적 규제가 핵심이다. AI 기술을 총 4단계로 구분, 최상위 단계인 안면인식정보 습득 등을 원천적으로 막는 한편 고위험AI와 범용AI의 경계를 정의했다. 여기에 오픈AI의 GPT와 구글의 제미나이 등 대규모언어모델(LLM)의 저작권법 준수 및 데이터베이스의 투명화를 강제했다는 설명이다. 또 AI가 생성한 콘텐츠의 표시도 의무화했다.

규정을 어긴 기업은 최대 3500만유로(약 500억원) 또는 세계 매출 7%에 해당하는 과징금을 부과받는다. EU는 조만간 AI법 규제를 관장할 범유럽 콘트롤 타워도 구축한다는 설명이다.

EU의 AI법은 말 그대로 '규제'에 방점이 찍혔다. 최근 세계적인 팝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얼굴을 합성한 딥페이크 음란물이 광범위하게 유포되는 등 AI 논란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담겼다는 평가다. 

다만 무조건적인 AI 규제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AI법이 미국 실리콘밸리가 주도하는 AI 웨이브에 맞서 역내 AI 기초체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깔렸기 때문이다. 미국이 현재 글로벌 AI 시장을 주도하는 가운데 그 영역이 조금씩 유럽으로 확장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EU가 AI법이라는 방어막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설정했다는 뜻이다. 

AI법이라는 방어선으로 막강한 미국의 AI 경쟁력이 유럽에 침투하는 속도를 늦추고, 그 틈을 노려 자체 기초체력을 키우는 전략이다.

AI법 제정 막판까지 지나치게 강한 규제에 반대하던 프랑스가 '맞춤형 고위험 AI에 대한 행정적 절차를 줄인다'는 조건으로 찬성으로 돌아선 지점이 중요한 이유다. AI법은 그 자체로 규제면서도 막강한 미국 AI 공습에 대비한 시간벌기용이라는 뜻이다.

구글 등의 미국 실리콘밸리 공습에 대비해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하며 버티던 EU의 지난 전략들과 판박이로 볼 수 있다.

리나 칸 미 FTC 위원장. 사진=연합뉴스
리나 칸 미 FTC 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여유로운 미국, 빅테크 압박도 "큰 그림"
미국은 EU와 온도차이가 있다. 지난해 10월 바이든 행정부 주도로 AI를 위한 행정명령이 발표된 후 늦어도 5월 나올 미국 AI법은 규제보다 가이드 라인 설정에 방점이 찍힐 전망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내용은 없으나, 미국의 AI법은 강력한 규제가 아닌 규제 권고가 될 가능성이 높다. 구체적으로 AI 기술을 올바르게 활용하기 위해 가이드 라인을 설정한 후 산업을 활성화시키는 쪽에 주목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럼에도 규제는 규제다. 선거 자금 및 로비활동 추적 단체인 오픈시크리츠에 따르면 지난해 기업들의 AI 관련 로비가 전년 대비 185% 증가하는 등 심상치않은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AI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들을 압박하는 방향이 아닌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할 것이라는 쪽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일각에서는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빅테크 압박 수위를 올리고 있다며, 미국 규제기관도 AI 등의 그림자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칼춤'을 출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미 FTC는 구글 반독점 소송 정국애서 존재감을 뽐내는 한편 최근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알파벳, 오픈AI, 앤트로픽을 대상으로 반독점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리나 칸 미 FTC 위원장은 "AI도 예외가 없다"며 "혁신을 위법의 은폐 수단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러한 압박을 EU의 AI법과 비슷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EU는 강력한 미국 AI 존재감에 대항하기 위해 판을 짰지만, 미국은 5월 AI법은 물론 미 FTC의 방침 자체도 '건전한 AI 산업 활성화'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미 FTC 레이더에 걸려든 5개 기업의 문제는 과도한 시장 장악력이며, 이는 건전한 산업 생태계 활성화에 방해요소다. 그 연장선에서 미 FTC는 건전한 산업 생태계 활성화에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겠다 나선 것이며, 이는 규제가 아니라 오히려 산업 활성화를 끌어내는 마중물이라는 평가다. 가이드 라인 설정에 따른 비즈니스 불확실성 제거, 나아가 산업 활성화를 지향하는 5월 미국 AI법과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직 AI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평가다. 특히 강력한 외부의 권력이 내부 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막는 EU의 방식, 나아가 빅테크 '핀셋' 압박을 통해 리스크를 줄이고 신기술 산업 활성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방식 모두 한국의 미래 전략에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