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확장현실(XR) 플랫폼인 비전프로를 공개하며 글로벌 시가총액 1위 기업을 탈환했다. 오픈AI와 협력해 생성형 AI의 큰 그림을 그리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의 경쟁에서 순간이나마 최강 기업의 면모를 자랑하는 순간이다.

홀로렌즈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애플의 현재가 한때 홀로렌즈를 통해 비슷한 그림을 그렸던 MS의 그림과 일부 겹쳐지는 것은 그 자체로 묘하다는 평가다. 이런 가운데 포스트 스마트폰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재차 시작되는 점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비전프로. 사진=연합뉴스
비전프로. 사진=연합뉴스

XR 플랫폼 전쟁
지난해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의 왕으로 등극한 애플이 비전프로를 공개하며 새로운 가능성 타진에 나섰다. 19일(현지시간) 비전프로의 사전판매에 돌입하며 XR 플랫폼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애플워치 이후 약 9년 만에 등장하는 '원 모어 씽(One More Thing)'이다. 

7년이 넘는 기간동안 1000명 이상의 개발자가 투입된 비전프로는 별도의 운영체제인 비전OS를 통해 구동되는 헤드셋이다. 눈과 손, 음성을 통해 공간 컴퓨팅을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정교한 카메라와 센서로 무장했다는 설명이다. 팀 쿡 애플 CEO는 "새로운 공간 컴퓨팅의 시대를 열 것"이라며 "혁신적이고 마법같은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500만원에 달하는 높은 비용에도 비전프로는 출시 첫날부터 매진 행렬을 기록하고 있다. 비록 사용할 수 있는 앱이 150여개에 불과하다지만 기존 애플의 iOS 생태계와 만나면 폭발적인 시너지를 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iOS와 아이패드OS, 맥OS 등과 호환되며 기존 100만여 종의 앱을 사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 연동도 이뤄질 전망이다.

삼성전자도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 2월 갤럭시 언팩을 통해 XR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고 공개한 가운데 구글 및 퀄컴과의 동맹으로 드라이브를 걸었다는 평가다.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퀄컴의 XR 기술을 담아낸 스냅드래곤을 펼치는 방식이 유력하다. 

먼저 구글과의 협력은 기존 방식대로 구글이 AI 등을 활용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 삼성전자가 최적화된 플랫폼을 제작하는 방식이 될 전망이다. 최근 공개된 갤럭시 S24 등에 구글이 개발한 서클 투 서치 등을 담는 것과 동일하다.

퀄컴과의 협력은 칩셋을 기준으로 하는 협력이다. 

퀄컴이 지난 1월 5일 단일 칩 아키텍처인 스냅드래곤 XR2+ 2세대 플랫폼을 공개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퀄컴은 XR에는 고전력, AR에는 저전력을 중심으로 판을 짜고 있으며 지난해 말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스냅드래곤 서밋 2023 직전 XR2 2세대와 AR1 1세대를 공개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불과 몇달 사이에 XR2+2 세대를 공개하는 속도전을 보여준 셈이다.

사진=퀄컴
사진=퀄컴

성능 자체도 우수하다. 당장 GPU 주파수 및 CPU 주파수를 각각 15%, 20% 높여 더욱 현실적이고 세밀한 MR 및 VR 경험을 제공한다. 온디바이스 AI를 지원하는12개, 또는 그 이상의 동시 카메라를 통해 사용자 및 움직임은 물론 주변 환경을 쉽게 추적할 수 있다. 초당 90프레임, 4.3K 해상도를 지원한다. 삼성전자의 새로운 XR 플랫폼 기능을 미리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삼성전자는 2014년 기어 VR과 2018년 오디세이 플러스 등의 헤드셋을 출시한 바 있으나 VR에 집중하는 선에서 영향력 확대는 이루지 못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구글 및 퀄컴과 만나 애플의 비전프로와 대항할 수 있는 판을 짠다는 각오다.

CES 2018에서 공개된 기어VR. 사진=연합뉴스
CES 2018에서 공개된 기어VR. 사진=연합뉴스

글로벌 기업으로는 메타의 행보가 눈길을 끈다. 오큘러스를 인수한 후 VR 중심의 전략을 가동했으나 최근에는 메타버스를 중심에 두고 XR 플랫폼 전략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메타 퀘스트3까지 공격적으로 런칭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한편 LG전자도 잰걸음이다. TV 사업을 이끄는 홈엔터테인먼트(HE)사업본부에 XR사업담당 조직을 신설한 가운데 B2B와 B2C 전반의 XR 플랫폼을 구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형세 LG전자 HE사업본부장 사장은 CES 2024 현장에서 "기기를 오래 사용할 경우 불편하다는 점에 착안해 디자인과 사용성 측면에서 편하게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형세 LG전자 HE사업본부장 사장. 사진=LG전자
박형세 LG전자 HE사업본부장 사장. 사진=LG전자

포스트 스마트폰 전쟁?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2022년 기준 VR·AR 기기 판매량은 약 880만 대로 전년 대비 21% 감소했다. 팬데믹이 끝나고 온택트 트렌드가 약해지자 메타버스의 존재감이 흐릿해진 결과다.

메타의 리얼리티랩스도 지난해 3분기 무려 37억달러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주춤하는 중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볼 때 메타버스를 기점으로 하는 헤드셋 형태의 플랫폼은 우상향 그래프를 그릴 가능성이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시기상조라는 뜻이다.

애플 비전프로가 출시된 후 그 확장성에 의문부호를 제기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고가의 비용에 아직 생태계가 좁은 XR 플랫폼 시장에 대한 회의감이 크다.

다만 장기적 성과에 대한 분석은 차치하더라도, 포스트 스마트폰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은 양적, 질적 성장에 성공했다. 특히 글로벌 프리미엄 스마트폰(도매가 600달러 이상) 시장의 매출은 전년 대비 6% 성장하며 사상 최대치를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이 성장한 이후의 시장에 대해서는 아무도 낙관할 수 없다.

시장 전체가 포화상태에 이른 가운데 프리미엄 스마트폰으로 '권력의 손바뀜'이 벌어진 것은 그 자체로 시장의 고도화를 의미하지만, 역으로 '다음 스텝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많은 기업들이 포스트 스마트폰을 찾으려 분주하게 움직인 배경이다. 

처음 그 유력한 후보군으로 부상한 것은 스마트워치였다. 그러나 제한적인 기능과 더불어 스마트폰 이상의 사용자 경험을 이어갈 수 없다는 점이 증명되며 스마트워치는 비교적 빠르게 후보군에서 탈락했다.

이후 급부상한 것이 AI 기반의 스마트 스피커다. 그러나 이 역시 생성형 AI 시대가 오기 전 사생활 침해 문제 및 기타 기능의 한계 등을 이유로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음원 스트리밍 이상의 탁월한 사용자 경험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특히 패착이었다. 보이스 인터페이스를 바탕으로 하는 혁신적인 패러다임으로 무장하며 아마존 알렉사 에코 등이 큰 존재감을 발휘했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생성형 AI 시대가 열리며 스마트 스피커의 비전은 다시 살아나는 분위기지만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스마트카도 빼놓을 수 없다. ICT 모빌리티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스마트홈의 '내부'와 '스마트시티'의 외부를 연결하는 개인화 플랫폼으로 각광을 받았다. 전통제조업의 총아인 자동차가 걸어다니는 스마트폰으로 변신하는 SDV 시대가 열리며 포스트 스마트폰 후보군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이 역시 최근 '캐즘'에 빠진 전기차 시장의 변동성, 나아가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는 스마트 시티 로드맵 등을 고려할 때 그 불꽃은 살아있으나 당장의 포스트 스마트폰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애플이 한때 애플카를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지금은 속도조절에 들어간 배경이다. 실제로 블룸버그는 23일(현지시간) 애플카 출시가 2028년으로 밀렸으며, 자율주행기술력도 크게 낮아질 것이라 보도했다. 관련 개발자들이 대거 이탈한 가운데 당분간 애플카 쇼크는 없을 전망이다. LG전자가 알파블 등을 출시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으나 당분간 포스트 스마트폰 경쟁에서 '올 라운드' 스마트카가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복잡한 '선거 운동'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그 치열한 경쟁의 소용돌이에 비전프로를 위시한 XR 플랫폼이 최근 유력한 후보군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는 모양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애플이 비전프로를 공간 컴퓨팅으로 명명한 것이 핵심이다. 최근 주춤하고 있는 메타버스와 일부 거리를 두면서도 ICT 기술과 웨어러블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조, 이를 통해 '컴퓨팅'이라는 행위를 재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새로운 플랫폼의 미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애플은 별도의 OS인 비전OS를 구축해 스마트폰 iOS에 버금가는 소프트웨어 단독 파워 인프라를 구축하고, 초기에는 게임 등을 통해 확보된 콘텐츠는 물론 iOS 기존 생태계의 모든 객체들을 연결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여기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XR 플랫폼 경쟁에 뛰어든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의 제조사들이 대부분 스마트폰 사업을 하고 있거나, 혹은 해봤던 경험을 한 곳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최소한 XR 플랫폼에 뛰어드는 기업들은 스마트폰을 핵심으로 삼아 TV 및 세탁기 등의 원격조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소프트웨어 콘텐츠를 채우는 것에 익숙하고, 이들은 포스트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무조건 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각오로 똘똘 뭉쳐있다. 

물론 XR 플랫폼이 포스트 스마트폰의 확실한 후보군은 아니며, 그 자체로 약점도 많다. 웨어러블의 부침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비전프로와 같은 헤드셋 형식의 플랫폼은 스마트글래스의 약점은 부각시키고 강점은 희석시킬 소지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메타 퀘스트3. 사진=연합뉴스
메타 퀘스트3. 사진=연합뉴스

실제로 구글의 구글글래스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는 행위'까지 생략시킬 수 있는 확실한 '신세계 포털'이었으나 사생활 문제 및 기타 한정적 문제, 비용 등의 이슈로 그 동력이 꺾인 사례가 있다. 그리고 비전프로는 이러한 스마트글래스의 경량화와는 거리가 멀고 기능적 측면에서도 아직 확장성이 부족하다는 약점이 크다.

다만 생성형 AI 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시들해진 메타버스가 여전히 새로운 인터넷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 비전을 가졌다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 웨어러블 당시의 기술적 난관도 빠르게 극복될 가능성이 있고, 생성형 AI로 콘텐츠의 부족도 번개처럼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B2B와 B2C 전용으로 XR 플랫폼을 나눠 출시하려는 LG전자의 특화 전략이 나오는 점은, B2C에서 출시된 후 B2B에서도 따로 리소스를 투입해야 했던 구글글래스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키운다.

쉽게 말해 XR 플랫폼의 현실 구현에 있어 수 많은 성공 및 실패 포트폴리오가 이미 쌓여져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애플의 뜻대로 XR 플랫폼을 스마트폰처럼, 아니 스마트폰보다 더 편하게 사용하면서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포털'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PC와 모바일을 넘어 정착된 컴퓨팅의 개념을 통째로 바꿀 수 있다. 

그 신시장은 XR 플랫폼의 차지가 될 수 있으며, 이곳에 발을 내딛지 못한 이들은 모두 죽는다. 이 지점이 포스트 스마트폰을 찾으려는 기업들의 XR 플랫폼 어필 포인트다. 확신할 수 없지만, 일단은 발을 내딛어야 할 가치는 충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