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 전개 중인 미국 해군 항공모함 드와이트 아이젠하워호와 미국, 영국 구축함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중동에 전개 중인 미국 해군 항공모함 드와이트 아이젠하워호와 미국, 영국 구축함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세계의 화약고’ 중동에서 피어오른 불이 본격적으로 바다로까지 번지고 있다. 예멘의 후티 반군이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홍해 인근을 지나는 민간 선박을 무차별 공격·나포하기 시작하면서다.

이 여파로 글로벌 해운의 연결 통로 역할을 하던 수에즈 운하가 막히며 선사들이 중동 분쟁지역 항로를 우회하기 시작해 물류비가 상승하고 중요 자원 가격 시세 변동 폭이 커지는 양상이다. 이런 와중 후티 반군을 지원하는 이란이 주요 에너지 수송 항로인 호르무즈해협에서 무력 투사에 나서며 국제적 에너지 공급망에 대한 우려도 확산되고 있다.

미국 선박 나포 소식에 유가 하락세 ‘주춤’

이란 반관영 타스님 통신은 “이란 해군이 오늘 오전 오만만 해역에서 미국 유조선 ‘세인트 니콜라스호’를 나포했다”며 “법원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11일 밝혔다. 세인트 니콜라스호가 이란의 석유를 훔쳐 미국에 제공했다는 혐의다.

호르무즈 해협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 주요 산유국의 해상 진출로다. 세계 LPG의 33.3%, 석유의 16.6%가 이 해역을 지나간다. 호르무즈로까지 긴장이 확산된 여파로 11일 오후 5시 25분(현지시각) 기준 뉴욕상품거래소의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전날 대비 2.07% 급등한 배럴당 72.85 달러까지 오르기도 했다. 11일 WTI는 종가 기준 72.02달러에 거래되며 최종 0.91% 상승했다.

최근 3개월간 국제 유가는 지난해 10월 20일 최고가(배럴당 88.37)달러를 찍은 후 꾸준히 하락하며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중국의 경기 둔화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가 인하, 미국의 증산 등이 유가 하락의 원인이 됐다. 업계에서는 이번 호르무즈 사태가 하락세에 접어든 유가가 다시금 요동치는 계기가 될지 예의주시 중이다.

특히 국내 석유업계는 수에즈 봉쇄 사태 때보다 이번 호르무즈 사태를 더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다. 대한민국에 들어오는 중동 원유의 70% 이상이 호르무즈를 통하기 때문이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호르무즈의 불안은 유가 불확실성을 더 확대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협회 차원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짝 반등’에 그칠 가능성도…추이 지켜봐야

다만 업계는 이번 이란의 미국 선박 나포 하나만으로는 유가 흐름을 속단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석유협회 관계자는 “지정학적 리스크 등 부정적인 사태가 발생하면 반사적으로 원유 가격이 반등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개전 후에도 유가가 3~4일 정도 반사적으로 급등했으나, 이내 안정세를 되찾은 바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1일 유가 역시 선박 나포 소식이 전해진 직후에는 2% 급등했지만, 이내 상승세가 둔화되며 0.91% 상승으로 거래를 마쳤다. 이처럼 당장의 상승세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는 게 업계의 입장이다.

지금까지의 숱한 중동 지역 분쟁 사례에서도 호르무즈 해역이 실제 봉쇄된 적은 한 차례도 없다는 점도 업계의 ‘신중론’에 무게를 실어준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호르무즈 인근에서의 무력 시위는 이란으로서도 국제사회 내에서 상당한 리스크를 부담하는 일”이라며 “대(對)미국 협상력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카드로 호르무즈를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 예로 홍해를 봉쇄하며 글로벌 컨테이너 무역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후티 반군은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의 직접적인 무력행사를 맞닥뜨리게 됐다. 12일 미국과 영국군은 예맨 내 후티반군의 주요 거점에 순항미사일과 폭격기로 대대적 공습을 가했다. 이란이 이같은 무력 충돌과 더불어 국제사회의 견제까지 감수하며 호르무즈 봉쇄에 나설 가능성은 적다는 게 중론이다.

한편 2020년대 들어 국제 정세 불안정이 확대되고 주요국의 자원 무기화 추세가 심화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도 대책 마련에 힘쓰고 있다. 지난 9일에는 ‘국가자원안보 특별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수소, 핵심광물, 신재생에너지 설비의 소재·부품 등을 핵심자원으로 지정하고 △평시에는 비축, 공급망 취약점 분석, 조기경보시스템 운영, 국내외 생산기반 확충 지원 △비상시에는 위기대책본부(산업부장관) 구성, 수급안정조치, 국내 반입 확대 등이 주요 내용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2일 긴급 수출 비상대책반 회의를 열어 중동 정세에 따른 수출입 물류 영향을 점검하고 향후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점검회의 결과, 현재까지는 수출 물품 선적과 함께 석유·천연가스 등 에너지 도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산업부는 근래 공급망 불안정성이 높아진 만큼, 보다 면밀한 모니터링과 함께 임시 선박 투입 등의 물류 지원대책을 차질없이 추진해 나간다는 방침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