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의 사막에 혁신의 꽃이 피었습니다. 세계 최대 가전·ICT(정보통신기술) 전시회인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024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가운데 AI와 모빌리티, 나아가 인간안보라는 거대한 개념까지 아우르는 인류 진화의 대서사시가 장엄하게 펼쳐지는 중입니다.

참가기업은 전년 대비 22% 늘어난 4000개사 이상이, 참관객 기준으로는 30% 늘어난 13만명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미래로 가는 하이퍼루프가 활짝 열렸습니다. 

그 중심에는 한국이 있습니다. 600개의 기업이 라스베이거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가운데 수 많은 한국 참관객들도 혁신의 향기를 쫒는 예민한 후각을 뽐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CES 기간 라스베이거스 거리로 나가면 수 많은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고, 심지어 근처 한국식당에는 한국 향우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전체 13만5000명이 행사장을 찾은 가운데 한국인은 무려 1만5000명이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주요 한국 기업 관계자들과 전문가들, 기자들이 뒤섞여 삼겹살에 김치찌개를 벗삼아 소주 한병을 기울이다보면 여기가 라스베이거스인지 경기도 화성시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혁신을 쫒는 것은 언제나 옳다
올해 CES 2024는 AI와 모빌리티를 필두로 스마트홈에 이르는 다양한 핵심 키워드가 부상했습니다. 다소 주춤했던 메타버스도 화려한 귀환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인간안보로 불리는 ICT 기술과 지속가능함의 시너지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전 산업 영역에 AI가 스며들기 시작한 결정적인 장면이 눈길을 끕니다. 사실 새로운 개념은 아니지만, IoT를 중심으로 2000년대 초 유비쿼터스를 넘어 초연결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며 그 중심에 AI가 더 단단히 자리잡는 것은 올해 행사의 백미라 봐도 무방합니다. 

이제 AI는 ICT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AI를 쫒고 AI를 탐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로레알 그룹(L’Oréal Groupe) CEO인 니콜라 이에로니무스(Nicolas Hieronimus)가 뷰티 업계 최초로 올해 행사 기조연설에 섰다는 것은 그 심상치않은 변화의 행간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구자은 LS그룹 회장도 현장을 찾아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면 AI와 로봇으로 무장한 미래가 얼마나 큰 비를 품고 얼마나 큰 바람을 몰고 올지 몰라 막연한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며, “폭풍과 같은 미래가 오더라도 AI, SW 등 다양한 협업과 기술 혁신으로 짧게는 10년, 그 이후의 장기적 관점에서 충분히 대응 가능한 사업 체계를 갖추고 준비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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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도, 문제도 '선'을 넘을 때 시작된다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시대입니다. 이제 각 기업의 전통적인 영역은 파괴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서 AI라는 강렬한 혁신이 온 산업의 세포를 무자비하게 바꾸는 대격변의 나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혁신을 쫒아 눈을 빛내며 때로는 호기심을 느끼고, 때로는 공포를 느끼며 때로는 미래를 향한 도전의식을 불태우는 것은 언제나 옳습니다. 각 기업들은 과감하게 '선'을 넘어 융합의 시대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른 '선'을 넘을 때 시작됩니다. 특히 혁신이라는 단어에 홀려 지식장사꾼들의 유혹에 빠진체 알멩이가 아닌 껍데기에 천착할 때 비극이 벌어집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나치게 흥분(?)해 별다른 고민없이 껍데기나 포장지를 혁신이라 단정하고 그 외 반드시 필요한 부가적 사고판단을 하지 않을 때 사달이 납니다.

CES에 대한 한국인들의 유별난 사랑이 다소 우려스러운 이유입니다. 

사실 CES는 연초에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 및 IT 박람회라는 특수성으로 큰주목을 받는 한편 글로벌 시장 진출 및 비즈니스 창출에 큰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또 거대 IT 트렌드를 미리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지만 더 내밀하게는 '막연한 미래의 청사진'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 회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대충 이런 것?" "이런 것도 할지도? 아마?"

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막연해도 미래의 방향성이 명확히 그려진다면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있고, 비즈니스 성과도 나오기에 현장에 갈 필요는 충분합니다. 괜히 글로벌 기업들이 큰 돈을 들여 전시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지요. 

다만 문제는 현실과 이상의 중간에 위치한 CES의 특성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겉에 보여지는 것만 보면서 "우와아아아"에 빠진 후 냉정함을 잃을 때 발생합니다. 

몇 가지 함정이 있기는 하지만 CES의 행간을 읽고 그 자체를 내재화시킬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CES가 곧 혁신이라는 착각에 빠지면 스텝이 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지식장사꾼들의 감언이설과 'CES=혁신'이라는 거짓말에 속는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특히 심각한 것은 '냉정한 사고의 결여' 가능성입니다. 생성형 AI가 아무리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도 아직은 하버드대 입학 에세이에는 턱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AI 기술의 발전과 그 그림자는 물론, 실제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정확한 비전을 거품없이 직시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지식사냥꾼들의 잇속에 속아 AI 기술의 미래에만 환호하면서 그림자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고, 나아가 거품에 빠져 눈이 흐려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AI 기술을 고르게 발전시키며 이를 현실로 만들어가는 이들과는 다르게, 그냥 "우와아아아"만 하다 넘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CES는 혁신의 가능성을 담은 화원일 뿐, CES 자체가 혁신일 수는 없습니다. 수 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이자,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면 특정 기업들이 펼쳐놓은 상상력의 스케치북일 수 있습니다. 어느날의 CES 현장 취재 당시 커다란 부스에 TV 하나 띄워놓고 자사 홍보영상을 틀어주면서 최첨단 미래형 드론의 '목각인형'만 배치시켰던 한 중공업 기업을 보고 기함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리는 냉정하게 미래를 보고 혁신을 아주 신중하게 '취사선택'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쓸데없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리에게 맞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효율적으로 찾아야지요. 평소에는 잘 합니다. 그런데 CES만 열리면 지나치게 흥분해요. 그 자체로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이러한 흥분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잘못된 길로 이끌까봐 두렵습니다.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기업을 보내는 것이 과연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중국은 미중 패권전쟁 당시 CES에서 사라졌다가 최근 자국 경제상황이 나빠지니 활로를 찾으려 다시 나타나는 등 전략적이고 유연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은? 행사가 미국에서 열리잖아요. 그런데도 참여기업수는 2위입니다. 그런데 왜 한국이 세 번째일까. 유난히 혁신을 좋아해서?

혁신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기업의 혁신상 수상이 전체의 42.8%라고 합니다. 미국 행사라는 것을 고려하면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지요. 심지어 각 기업들은 혁신상 신청비 999달러를 CTA에 낸 다음, 상을 받으면 '정부'가 돌려준다고 합니다. 정상인가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CES는 혁신이 아닙니다. 혁신의 가능성이고, 혁신을 답는 그릇이자 껍데기일 뿐이에요. 심지어 가능성은 여러가지 다양한 시나리오 중 하나일 뿐 약속된 미래도 아니지요. 여기에 어느날의 CES처럼 전국의 국립대학교 총장들까지 우루루 몰려가는 것은 지나칩니다. 마치 CES에 가지 않으면 혁신을 알 수 없다는 듯 말입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선 넘지는 말자
한국인들이 CES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CES를 주관하는 게리 샤피로 CTA 회장이 행사 직전 수 많은 참여국들 중 유독 한국만 방문했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예쁠까요? 심지어 그는 이번 행사의 핵심 포인트로 'AI와 한국'을 지목했다고 합니다. 소위 '국뽕'이 차오릅니다.

여세를 몰아 서울시는 올해 10월 코엑스에서 한국판 CES인 '서울 스마트 라이프 위크'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배달의 민족이자 CES의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다 좋습니다. 이렇게 판을 키워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CES 자체에만 천착하지 말고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냉정함은 남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과열된 분위기를 자제하고 담담하게 세계 속 한국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CES에 유독 환호하는 것은, 이상하리만큼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확인받고 싶어하는 특유의 정체성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외국인들에게 "두유 노 킴치?"라 물으며 스스로 뿌듯해하고 싶어하며 잘 만든 K-드라마를 보며 놀라워하는 외국인들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흡족해하는. 소위 외국에서 인정받는 것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개발도상국 시대의 마인드 말이지요.

"CES를 다 씹어 먹었어! CES가 혁신이야! 글로벌 한국만세!" 이건 자존감의 문제인데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한국 IT는 이미 충분히 강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엿보는 작업 중 하나로만 CES를 중요하게 생각하자고요. 대한민국. 이제 그 정도 실력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