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에 설치되어 있는 시중은행들의 현금인출기(ATM). 출처=연합뉴스
서울 시내에 설치되어 있는 시중은행들의 현금인출기(ATM). 출처=연합뉴스

2023년에도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은행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역대급 호황에도 웃을 수만은 없었다. 은행권을 둘러싼 ‘이자 장사’ 비난 때문이다. 고금리 상황을 이용해 금융 소비자에게 이자 부담을 지워 이익을 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은행은 지난 1월 기준금리를 3.50%까지 끌어올린 후 11개월 동안 금리를 묶었다. 그 사이 은행권의 주택담보대출 최고금리는 연 7%대까지 치솟았다. 올 3분기 기준 가계부채는 1900조원에 달한다.

금리 상승기에 높은 예대금리차(대출금리와 예금금리 차이)로 손쉽게 돈을 벌어 성과급·퇴직금 등 ‘돈 잔치’를 벌인다는 지적에 은행권은 올해 상반기 ‘상생금융’ 대책을 내놨다. 은행을 향한 비난은 하반기에도 이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종노릇’ 발언에 금융당국도 대책 마련을 촉구하면서 ‘횡재세’ 논란이 불거졌다. 은행권은 부랴부랴 2조원이 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상생안을 발표했다.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우리은행에서 700억원의 횡령 사고가 터진 데 이어 올해 BNK경남은행에서 3000억원대 횡령 등 금융사고가 발생했다. 고금리와 경기 불황으로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며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 위험이 커졌다. 새마을금고는 ‘뱅크런’ 우려를 잠재우느라 바빴다.

연말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하며 건설업계의 부동산 PF 문제가 전 금융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고 은행권은 2금융권에서 먼저 일어나고 있는 PF 대출 부실이 전이되지 않도록 사력을 다해야 할 상황이다. 

서울 시내 한 은행 영업부 대출 창구 앞을 이용객이 오가고 있다. 출처=연합뉴스
서울 시내 한 은행 영업부 대출 창구 앞을 이용객이 지나고 있다. 출처=연합뉴스

꺾이지 않는 ‘가계 부채’…1900조 돌파 ‘눈앞’

한은이 28일 발표한 ‘2023년 하반기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올 3분기 가계대출과 판매신용을 합친 가계신용(가계부채) 잔액은 1875조6000억원으로 1900조원에 가까운 수준이다. 1861조3000억원이었던 전 분기보다 14조3000억원(0.8%) 늘며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가계대출, 그중에서도 주택담보대출이 가계 빚 증가를 이끌었다. 올해 9월 말 기준 금융권 전체 주담대 잔액은 1049조1000억원으로 7~9월 사이 17조3000억원 불었다. 사상 최대 수준이었던 직전 분기 1031조8000억원을 뛰어넘었다.

가계대출 연체율도 작년 하반기 이후 상승 흐름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0.66%였던 연체율은 올해 1월 0.76%로 증가했고, 8월에는 0.95%로 치솟았다. 9월에도 0.89%를 기록하는 등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꺾이지 않는 가계부채 증가세에 고심하던 금융당국은 규제 강도를 높였다. 금융위원회는 내년 2월부터 대출 시 미래의 금리 상승 위험까지 반영해 대출 총량을 규제하는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을 도입한다고 지난 27일 밝혔다.

스트레스 DSR이 도입되면 변동금리 대출을 받을 때 차주가 상환해야 하는 원리금 부담이 늘어나는 만큼 전체 대출 한도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은행 ‘종노릇’ 발언이 쏘아 올린 ‘횡재세’

고금리 상황이 장기화하며 역대급 실적을 달성한 은행권은 ‘횡재세’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달 20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3년 3분기 국내 은행 영업실적(잠정)’에 따르면 일반은행, 특수은행, 인터넷은행 등 20개 국내 은행의 올해 3분기 누적 당기순이익은 19조5000억원이다. 전년 동기 대비 5조4000억원(38.2%) 증가한 수치로 지난해에 달성한 총 당기순이익(18조5000억원)을 올 3분기 만에 갈아치웠다.

이자 이익 역시 44조20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8.9% 늘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이중 28조6587억원(65%)가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은행의 이익이다. 주요 시중은행이 막대한 이자 수익을 올리며, 빚 부담이 커진 취약계층 등을 위해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윤 대통령이 ‘종노릇’, ‘갑질’, ‘독과점’ 등 강도 높은 표현으로 은행을 비판한 데 이어 야당은 은행의 초과 이익을 환수하는 일명 ‘횡재세법’을 발의했다.

 

지난 21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권 민생금융지원 간담회’에 앞서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윗줄 왼쪽부터) 이승열 하나은행장, 방성빈 부산은행장, 서호성 케이뱅크은행장, 윤호영 카카오뱅크 대표이사, 박우혁 제주은행장, 이석용 농협은행장(중간 왼쪽부터) 홍민택 토스뱅크 대표이사, 고병일 광주은행장, 백종일 전북은행장, 김성태 기업은행장, 정상혁 신한은행장, 황병우 대구은행장, 예경탁 경남은행장, 이재근 국민은행장(아랫줄 왼쪽부터) 유명순 한국씨티은행장, 윤희성 한국수출입은행장, 박종복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장, 강석훈 한국산업은행 회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조용병 은행연합회장, 김주현 금융위원장, 강신숙 수협은행장, 조병규 우리은행장. 사진=은행연합회
지난 21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권 민생금융지원 간담회’에 앞서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윗줄 왼쪽부터) 이승열 하나은행장, 방성빈 부산은행장, 서호성 케이뱅크은행장, 윤호영 카카오뱅크 대표이사, 박우혁 제주은행장, 이석용 농협은행장(중간 왼쪽부터) 홍민택 토스뱅크 대표이사, 고병일 광주은행장, 백종일 전북은행장, 김성태 기업은행장, 정상혁 신한은행장, 황병우 대구은행장, 예경탁 경남은행장, 이재근 국민은행장(아랫줄 왼쪽부터) 유명순 한국씨티은행장, 윤희성 한국수출입은행장, 박종복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장, 강석훈 한국산업은행 회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조용병 은행연합회장, 김주현 금융위원장, 강신숙 수협은행장, 조병규 우리은행장. 사진=은행연합회

2조+알파(α)…역대 최대 규모 ‘상생금융’

올해 금융권의 주요 화두는 ‘상생금융’이었다. 연초 은행들의 성과급을 두고 ‘돈 잔치’ 지적이 이어지자 윤 대통령이 올해 2월 금융위에 “관련 대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은 지난 3월 총 6000억원대 상생금융안을 발표했다. 대출금리 인하와 수수료 면제 등 국민의 이자 부담을 덜어주는 방안이 핵심이다.

지난 10월 윤 대통령이 고금리 시대에 힘입어 막대한 이자수익을 거둔 은행권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서자 금융권을 향한 2차 상생금융 요구가 다시 제기됐다. 금융당국을 비롯한 정부의 압박에 정치권을 중심으로 ‘횡재세’ 도입 목소리까지 커지면서 은행은 선제적으로 상생금융 대책을 내놨지만 당국의 반응은 싸늘했다.

은행권은 고심 끝에 지난 21일 ‘2조원+α’ 규모의 ‘역대급’ 민생 금융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은행에서 연 4%가 넘는 금리로 개인사업자 대출을 받은 소상공인 및 자영업자가 지원 대상이다. 대상자에게는 1인당 최대 300만원, 평균 85만원 정도의 이자 납부액을 환급(캐시백)해 준다.

 

이준수 금융감독원 부원장이 지난 8월 17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내부통제 및 가계대출 관리 강화를 위한 은행장 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출처=금융감독원
이준수 금융감독원 부원장이 지난 8월 17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내부통제 및 가계대출 관리 강화를 위한 은행장 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출처=금융감독원

금융사고도 ‘역대급’…‘내부통제’ 강화 요구 ↑

올해 금융권에서는 금융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횡령, 미공개정보 이용 부당 이익 취득, 불법 계좌 개설 등 도덕적 해이로 불거진 사고가 이어졌고, 과도한 성과 압박에 따른 문제도 발생했다. 역대급 금융사고가 연달아 터지면서 은행에 대한 신뢰가 곤두박질쳤다.

지난해 우리은행의 700억원대 횡령 사고를 계기로 금융권이 내부통제 강화에 나섰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BNK경남은행은 3089억원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횡령 사건에 이어 직원의 불법 차명 거래 등으로 금융당국의 제재를 받았다. KB국민은행은 증권대행 부서 직원들이 고객사의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127억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가 드러났다. DGB대구은행에서는 은행 직원들이 고객 동의 없이 증권계좌 1662개를 불법 개설했다가 적발됐다.

연말에는 불완전판매 논란까지 불거졌다. 내년 상반기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와 연계한 주가연계증권(ELS)에서 수조원대 원금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ELS 상품을 대거 판매한 은행의 불완전판매 의혹이 제기됐다. 해당 상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투자자에게 원금 손실 가능성 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60대 이상 고령층에 유독 많이 판매된 상품이라는 점이 불완전판매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은행권의 잇따른 금융사고에 금융사의 부실한 내부통제가 원인으로 지목되며 내부통제 강화 필요성이 대두됐다. 지난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지배구조법 개정안’은 펀드 불완전 판매, 대규모 횡령 등 금융사고 방지를 위해 금융회사와 임원의 내부통제 의무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책무구조도’ 체계 구축으로 금융사 임원마다 소관 영역을 정하고 이에 대한 통제 및 관리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금융위는 지난 28일 ‘은행업감독규정 개정안’의 규정 변경 예고를 내년 2월 7일까지 진행한다고 밝혔다. 개정안에 따라 경영실태평가에서 경영관리 세부항목으로 분류되던 내부통제가 별도 평가 부문으로 분리된다. 평가 비중도 5.3%에서 15%로 대폭 상향된다.

 

건설사 미분양 증가 등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인해 PF 대출 부실 우려가 커졌다. PF 대출 부실은 내년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떠올랐다. 사진=연합뉴스
건설사 미분양 증가 등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인해 PF 대출 부실 우려가 커졌다. PF 대출 부실은 내년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떠올랐다. 사진=연합뉴스

대출잔액 134.4조 ‘부동산 PF’ 위기…‘연쇄 부실’ 우려

부동산 PF는 올해 내내 시장 최대 리스크로 손꼽혀왔다. 부동산 PF는 담보가 없거나 신용등급이 낮아도 아파트 등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의 사업계획, 미래 수익을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사업비를 빌리는 것을 말한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올해 9월 말 기준 부동산 PF 대출잔액은 134조3000억원이다. 부동산 PF 규모는 지난 2020년 말 92조5000억원이었으나 2021년 말 112조9000억원 등으로 매년 빠르게 늘었다. 문제는 고금리‧고물가 기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면서 연체율이 빠르게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2020년 말 0.55% 수준이었던 연체율은 지난 9월 말 기준 2.42%로 올라간 상태다. 연체 잔액 기준으로는 3조원대에 달한다.

부동산 PF 부실 위험성이 시장 전반의 신용 위기로 번질 수 있어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앞서 새마을금고는 올해 7월 부동산 PF 연체율 상승으로 부실 의혹이 제기되면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위기를 겪었다. 시공 능력 평가 16위인 대형 종합건설사 태영건설은 부동산 PF 대출을 갚지 못해 지난 28일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을 신청했다.

건설업계의 부동산 PF 부실 우려가 현실이 되며 자금을 공급한 금융권으로 PF 위기가 확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거론된다. 정부는 부동산 PF 문제가 금융권·건설업계 전반의 위기로 번지지 않도록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최상목 신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9일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를 열고,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등 이른바 ‘F(Finance)4’ 및 박춘섭 경제수석 등과 태영건설 워크아웃 신청 이후 금융·외환시장 상황과 그 영향을 집중적으로 점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