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네이버웹툰 '툰 페스티벌' 팝업스토어에 많은 고객들이 계산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9월 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네이버웹툰 '툰 페스티벌' 팝업스토어에 많은 고객들이 계산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23년 유통가는 트렌드를 따라간 일부 기업만 성과를 냈다. 코로나19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급격히 전환된 유통지형에서 쿠팡이 명실상부한 유통업계 1인자로 등극했다. 급격한 오프라인 매장 몰락 속에서 살아남은 곳도 있다. MZ세대를 겨냥한 일부 백화점과 압도적인 가성비를 내세운 PB(자체)상품과 알리익스프레스를 비롯한 중국앱들이다. 면세점은 유커(중국인 단체관광객)의 외국 여행이 지난 8월 풀리며 기대를 모았으나 중국 부동산 경기 하락에 탈중국 준비가 한창이다. 11월 모든 유통사가 블랙프라이데이 행사에 나선 가운데 불황형 소비에 대한 걱정도 유통가를 짓누르고 있다.

1. MZ 모시기

올해 유통가 핵심 단어를 하나만 꼽자면 ‘MZ세대’다. 핵심 소비층인 MZ세대를 잡은 일부 유통 기업만 살아남는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MZ세대는 1980년생부터 1990년대 초중반생인 밀레니얼세대(M세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생인 Z세대를 합해 이르는 말이다. 한마디로 소비가 많은 2030세대를 잡지 못하면 사업이 힘들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커머스업계 1위를 굳힌 쿠팡을 비롯해 올해 연매출 1조원을 기록한 여의도 ‘더현대서울’ 등은 2030 고객 마음을 사로잡은 사례로 손꼽힌다. 편의점은 고객이 지루할 새가 없을 만큼 한주마다 새로운 상품을 쏟아낸 지 오래다. 면세점도 2030 고객을 사로잡기 위해 관련 이벤트나 광고모델 모시기, 캐릭터 만들기에 분주하다.

2. 대형백화점 전성시대

올해 백화점업계는 변화하는 트렌드를 명확히 보여준 유통 채널로 평가된다. 먼저 코로나19 엔데믹(풍토병화)으로 지난해 진행됐던 보복소비가 해외여행과 면세점 수요로 빠지며 역기저 현상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새로운 상권을 만들어 오히려 매출향상을 보인 백화점도 나타났다. 이달 현대백화점 더현대서울은 최단기간 연매출 1조원을 기록했으며,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백화점업계 최초 3조원을 기록했다. 신세계 센텀시티점(부산)도 리뉴얼로 연매출 2조원을 넘보게 됐다.

전문가들은 넓은 공간에 팝업스토어를 끊임없이 유치하고 휴식공간을 강조해 즐길거리를 만든 점이 주효했다고 내다봤다. 김인호 비즈니스인사이트 부회장은 ‘2024 유통산업 전망 세미나’에서 내년에는 상위 10개 백화점이 매출액 17조원을 기록하며 전체 백화점 매출의 45%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 사진=연합뉴스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 사진=연합뉴스

3. 쿠팡천하

이마‧롯‧쿠(이마트‧롯데쇼핑‧쿠팡) 시대가 가고, ‘쿠‧이마‧롯’ 시대가 왔다. 쿠팡은 지난해 매출액에서 이마트를 앞선 가운데 올해 명실상부한 유통업계 1인자로 자리를 굳혔다는 평가다. 실제 쿠팡은 올해 3분기 실적에서 뛰어난 성장성을 나타냈다. 쿠팡은 3분기 매출액 8조1028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18% 증가한 것으로 나타냈다. 분기 매출로 8조원을 넘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기에 이마트 3분기 매출액(7조7096억원)을 4000억원 가까이 앞서며 규모의 경제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이마트는 오프라인(이마트, 이마트애브리데이, 이마트24)과 온라인(SSG닷컴, 지마켓)을 모두 합한 매출에서 쿠팡에 따라잡혀 체면을 구겼다.

이커머스 성장률이 둔화되는 가운데 증권가에서는 쿠팡의 2023년 연간 흑자 전망까지 내놓으며 앞으로의 실적에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최근 온라인 명품 플랫폼 파페치를 6500억원에 인수한 점도 매출액 상승 요소로 주목된다. 당초 쿠팡의 실용성과 어울리지 않는 명품 산업 진출에 우려가 많았으나 현재는 신제품의 온라인 하루배송 서비스로 기대감이 더 높아진 상태다.

4. 재계 순위

쿠팡의 약진으로 유통가 재계 순위도 흔들렸다. 특히 롯데그룹의 재계 순위가 13년만에 5위에서 6위로 하락한 점이 눈에 띈다. 롯데그룹은 롯데쇼핑으로 대표되는 유통과 롯데케미칼을 전면에 내세운 화학의 쌍두마차로 유통기업 중 가장 높은 재계 순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2016년 매출액 24조1143억원, 영업이익 7633억원에 달하던 롯데쇼핑은 매출 축소와 함께 영업이익도 쪼그라들었다. 2022년은 각각 15조4760억원, 3862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6년 전과 비교해 매출액은 36%, 영업이익은 49%나 감소한 수치다. 동기간(2016→2022년) 이마트도 매출액 14조6151억→29조4018억원, 영업이익 5038억→1853억원으로 감소했다. 매출액은 101% 증가했으나, 영업이익은 63%로 감소했다.

5. 인사 철퇴

사정이 이렇자 유통업계는 인사로 쇄신을 다짐했다. 가장 먼저 신세계그룹이 인사 철퇴를 내렸다. 약 2조원에 달하는 지마켓(이베이코리아) 인수에 큰 역할을 했던 강희석 전 이마트 대표가 짐을 싸고, 이명희 회장의 사람으로 불리는 한채양 조선호텔앤리조트 대표이사가 이마트‧이마트에브리데이‧이마트24 등 오프라인 3곳의 총괄 대표이사로 임명됐다. 한 대표이사는 신세계그룹 전략실 출신으로 겸손한 자세와 산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줘 향후 이마트 전망이 밝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3사를 아우르는 통합추진사무국을 신설했다. 현대백화점그룹과 롯데그룹도 전문성이 강점인 젊은 인사를 대거 등용하며 분위기 쇄신에 나섰다.

6. 송출수수료 논란

홈쇼핑 송출수수료 시한폭탄은 올해 비로소 터졌다. 시장 축소에 수수료 인상이 어렵다는 업계와 수수료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유료방송사업자가 팽팽히 맞서면서다. 실제 홈쇼핑업계 송출수수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TV홈쇼핑업계에 따르면 매출액 대비 송출수수료 비율은 ▲2016년 37% ▲2018년 46.1% ▲2020년 54.2% ▲2022년 65.7% 로 꾸준히 상승세다.

송출수수료는 지속 상승하지만 홈쇼핑업계는 고객 연령층 증가와 TV 시청 인구 감소 등으로 위축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홈쇼핑업계는 이대로는 산업의 성장성을 담보하기 힘들다며 수수료 동결이나 감액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상황이다. 현대홈쇼핑과 유료방송사업자인 KT스카이라이프와의 2023년 송출수수료 줄다리기는 올해를 넘길 전망이다. 양측은 반목을 거듭하다 해결이 나지 않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대가검증협의체에 중재를 요청한 상태다. 홈쇼핑업계는 업계 송출수수료 부담이 경각에 달해 내년에는 이 같은 일이 보다 심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앱‧리테일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리테일‧굿즈(와이즈앱)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오래, 자주 사용한 모바일 앱’으로 중국 쇼핑앱 알리익스프레스(알리)가 사용자수 707만명으로 1위에 올랐다. 사진=와이즈앱
앱‧리테일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리테일‧굿즈(와이즈앱)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오래, 자주 사용한 모바일 앱’으로 중국 쇼핑앱 알리익스프레스(알리)가 사용자수 707만명으로 1위에 올랐다. 사진=와이즈앱

7. 알리익스프레스

이커머스 분야에서는 중국 쇼핑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알리익스프레스는 올해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은 앱이다. 앱‧리테일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리테일‧굿즈(와이즈앱)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오래, 자주 사용한 모바일 앱’으로 중국 쇼핑앱 알리익스프레스(알리)가 사용자수 707만명으로 1위에 올랐다. 알리는 지난해 11월 대비 올해 11월, 사용자 수가 371만명 증가했다. 또 다른 중국 쇼핑앱 테무는 354만명의 사용자를 올해 다 채웠다. 알리‧테무의 인기는 중국 상품의 압도적인 가성비 덕분이다. 알리는 가품 논란이 있으나 소비자 쏠림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간단한 공산품이나 의류 등은 기존에도 중국산이었던 만큼 소비자들의 거부감이 덜한 점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최근 쿠팡이 알리와 테무 견제에 나섰다는 소문도 돈다.

8. 면세점 탈중국

면세업계는 돌아오지 않는 유커(중국인 단체관광객)에 놀랐다. 한편에서는 교통‧숙박 등 단체 관광객 인프라가 망가진 측면이 문제점으로 제기됐다. 또 한편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유커의 여행 패턴이 명품 소비에서 ‘관광 명소 찾기’로 소박하게 바뀌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 때문에 면세업계는 베트남, 대만, 일본 등 아시아권과 미국, 유럽 등 서구권으로 고객층을 다양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글로벌 소비층인 MZ세대 공략을 위해 체험형 매장을 만들거나 영패션을 겨냥한 캐릭터 만들기, 연예인 광고모델 모시기 등 ‘명품 할인 매장’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CJ올리브영 '명동 타운' 매장을 찾은 외국인 고객들이 직원에게 상품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CJ올리브영
CJ올리브영 '명동 타운' 매장을 찾은 외국인 고객들이 직원에게 상품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CJ올리브영

9. 외국인 고객

엔데믹으로 개별관광을 즐기는 외국인 관광객은 급증했다. 한국관광공사 조사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방한 외국인 관광객만 약 443만명으로 전년동기 대비 447% 증가한 수준이다. 이에 편의점, CJ올리브영 등이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일례로 외국인들 사이에서 편의점 얼음컵 챌린지가 유행이다. 내한한 해외 유명 가수나 휴가차 한국을 방문한 모델이 커피, 과즙 등 다양한 재료의 내용물을 넣어 얼음컵 음료를 마시는 장면이 유튜브로 송출되며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편의점과 H&B스토어가 새로운 매출처로 떠올랐다. 편의점업계는 면세쇼핑이 가능한 디지털 결제나 페이 결제 서비스 등의 강화에 나섰다. 약과, 바나나우유, 야쿠르트 젤리 등 다양한 관광객 대상 상품의 품목도 확대한다. 역직구로 이름을 알린 CJ올리브영도 지난달 초 관광 상권 대표 매장인 ‘올리브영 명동 타운’을 리뉴얼해 선보였다. 방문고객 90% 이상이 외국인임에 착안해 영‧중‧일(英‧中‧日) 3개국어로 매장 안내 서비스를 확대하며 글로벌 K뷰티 O2O(Online to offline) 쇼핑 플랫폼으로 키운다는 방침이다.

10. 불황의 그림자

올해 서민경제는 어두웠다. 식품‧외식 물가 급증에 실질임금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서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먹거리 물가에 고객 불만이 거세지자 동일 가격에 제품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유통가는 고물가 적응을 위해 PB상품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다. PB상품은 유통 과정을 줄여 일반상품보다 20~45% 저렴한 점이 장점이다. 생활과 밀접한 편의점업계는 초저가 경쟁이 한창이다. CU는 지난달 판매량 상위 10위권 상품 중 7개가 PB인 득템시리즈다. GS25는 최저가 수준 슈퍼마켓 PB상품을 새해부터 본격 도입하기로 했다. 이 외에도 PB상품은 ▲이마트 ‘노브랜드’ ▲쿠팡 ‘곰곰’, ‘탐사’, ‘코멧’, ‘비타할로’ ▲홈플러스 ‘심플러스’, ‘시그니처’, ‘시그니처 홈밀’ ▲롯데마트 ‘요리하다’, ‘오늘좋은’ ▲롯데하이마트 ‘하이메이드’ ▲CU ‘헤이루’, ‘득템’ ▲GS25 ‘리얼프라이스’ ▲무신사 ‘무신사 스탠다드’ 식품‧생필품‧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 분포돼 있다.

11월을 강타한 ‘블랙프라이데이’도 불황의 그림자라는 분석이다. 블랙프라이데이는 미국에서 추수감사절 다음날인 금요일에 진행되는 연중 최대 할인 행사다. 국내에서는 추석과 연말 사이에 끼어 쇼핑 비수기로 통하는 이 시기 이커머스를 비롯해 마트, 편의점, 백화점 할 것 없이 모든 유통업체가 할인에 뛰어들었다. 신세계그룹은 일주일간 ‘쓱데이’ 행사로 이마트, SSG닷컴, W컨셉, 이마트24 등 계열사가 총 출동해 1조7000억원을 팔아치웠다.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무진장 블랙프라이데이’로 단 3일 동안 약 2700억원의 거래액을 기록했을 정도다. 유통가는 소비자들이 할인 때만 지갑을 여는 ‘불황형 소비’가 확산돼 내년 상반기까지 소비 회복이 어렵다는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