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퍼포머의 힘> 송의달 지음. W미디어 펴냄.

필자는 지금 한국 언론은 가짜뉴스 범람에 따른 신뢰의 위기, 디지털 기술을 효과적으로 수용 못하는 전환의 위기, 심층 분석과 대안 제시, 권력 비판 같은 언론 본연의 사명감이 옅어지는 전문직주의 위기 등 3~4중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본다.

그는 “저널리즘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미국 언론인 월터 리프먼의 말을 인용하며 한국 언론의 미래를 여는 열쇠는 퀄리티 저널리즘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언론 분야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낸 아웃퍼포머로 신문기자 6명, 방송기자 2명, 최고경영자 1명 등 총 9명의 언론인을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밥 우드워드
밥 우드워드

 

밥 우드워드(1943~)

1974년 8월 닉슨 미국 대통령을 임기 전 하야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 대특종을 터뜨린 워싱턴포스트 기자다.

그의 소년기에는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다. 어린 시절 의붓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배다른 형제들보다 싼 것을 주는 등 차별하자 자신이 받은 선물 목록을 만들어 수량과 판매 가격을 조사해 표로 만들어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이는 추적 보도로 사회적 공정을 이루려는 탐사보도 기자의 삶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입사초기부터 일벌레로 유명했다. 입사 초 5일 연속 1면에 자기 기명 기사를 실었다. 1972년 6월17일 워싱턴DC 포토맥 강변에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다섯 명의 괴한이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다 경찰에 체포된 사건에 대한 보도를 시작으로 우드워드는 동료 칼 번스타인과 함께 집요한 취재를 거듭, 미국 역사를 바꾼 일대 특종을 이어갔다.

그는 취재원과의 약속도 철저히 지켰다. 그가 워터게이트 대특종을 터뜨리는 데 결정적 제보를 한 ‘딥 스로트’는 사건 발생 후 무려 33년이 흐른 뒤에야 연방수사국(FBI) 2인자였던 윌리엄 마크 펠트 부국장으로 밝혀졌다. 우드워드는 “취재원에 대한 비밀을 평생 지키겠다”며 이를 지켰지만 타 언론의 보도로 취재원의 정체가 후일 드러났다.

우드원드는 두 차례의 퓰리처상을 비롯, 미국에서 시상하는 거의 모든 언론 관련 상을 수상했다. 그는 “누군가 기막힌 제보 전화를 할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로 종이책 전화번호부에 자기 이름을 등록해 놓기도 했다. 또 인터뷰 전에는 취재원이 30년 전 이름 모르는 잡지에 기고한 글까지 찾아 읽고 갔다고 한다.

토머스 프리드먼(1953~)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이자 국제관계 전문기자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마음만 먹으면 각국 국가원수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언론인으로서는 드물게 세계적 석학 대우를 받는다. 2009년 서울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만났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도 2022년 5월 오찬을 함께했다,

유대계 미국인인 그는 15세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이스라엘과 중동에 빠져들었다. 귀국 후에도 관련 책을 숙독하고 10대부터 뉴욕타임스를 탐독하던 그는 고교시절 저널리즘 입문 과목을 듣고 에코라는 학교신문도 만들었다. 미네소타 대학에 입학해 아랍학을 전공했다.

대학원 졸업 무렵 이미 12개의 칼럼을 써 미국 영국 신문에 게재할 만큼 필력을 인정받았고 UPI통신 베이루트 특파원을 거쳐 뉴욕타임스로 자리를 옮겼다. 뉴욕타임스 베이루트 특파원 시절 현지 운전기사의 부인과 자녀들이 프리드먼의 아파트에 피신해 있다가 몰살당하는 등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험지에서 취재활동을 이어갔고 이것이 대기자로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초기 기자생활 10년을 중동 현지에서 보낸 그는 1992년 백악관 취재팀장이 되면서 이후 국무부 월스트리트까지 취재영역을 넓혔고 스스로 6차원의 렌즈로 세계를 보는 눈을 길렀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퓰리처상을 무려 세 차례나 받았다. 70세인 올해도 매주 1~2회 칼럼을 쓰고 있다. 책도 7권을 냈는데 1999년에 나온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는 27개국에서 번역될 정도로 유명하다.

바버라 월터스
바버라 월터스

 

바버라 월터스(1929~2022)

‘인터뷰의 여왕’으로 불린 미국 ABC방송사의 간판 앵커였던 그는 대통령부터 범죄자까지 다양한 인물을 인터뷰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6년 ABC로 옮긴 뒤 저녁시간 뉴스 앵커가 됐는데 미국 언론 사상 여성이 저녁뉴스 앵커를 맡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방송계의 꽃이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엔 홍보회사에서 보도자료를 썼고 방송사에서는 대본작성, 섭외, 심지어 커피타는 일까지 했다. 그렇게 10여년간 밑바닥에서 온갖 방송관련 일을 하던 그는 1961년 NBC 방송의 ‘투데이쇼’에서 방송 작가 겸 조사연구원으로 합류했다. 그러다 1964년 전날 과음으로 결근한 여자 보조앵커의 대타로 우연히 마이크를 잡았다가 기대 이상의 진행으로 리포터로 발탁됐다. 점점 출연 횟수를 늘리다 ‘투데이쇼’의 고정 진행자가 된 월터스는 “맡은 일은 무엇이든 다했고 집에 가져가서도 일 했고 스스로 끊임 없이 채찍질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단독 인터뷰했고 75년 생애 처음 에미상과 올해의 리포터상을 수상했다. 1976년 ABC와 연봉 100만달러 계약을 하면서 미국 방송사상 첫 앵커 100만달러 연봉시대를 열었다.

1977년 피델 카스트로 단독 인터뷰에 이어 각종의 최고지도자들을 포함, 수백 명의 세계적 거물 및 연예인 범죄자 등과 인터뷰를 했다. 비틀즈 존 레넌을 살해한 마크 채프먼에게는 인터뷰 성사를 위해 12년간 손편지를 보내 결국 교도소 안에서 그를 인터뷰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85세까지 현역으로 뛰며 맡은 프로마다 신기록을 세우기도 한 그는 한 인튜뷰당 100~200개의 질문을 준비했다고 한다.

월터 크롱카이트
월터 크롱카이트

 

월터 크롱카이트(1916~2009)

미국 최초의 방송 앵커맨으로 명명된 그는 17년 연속 생방송을 진행, TV 저널리즘의 전성시대를 연 주인공이다. 그는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세련된 도시풍 미남도, 옷을 잘 입는 멋쟁이도 아니었다. 다만 특이한 점은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아 관찰하기를 좋아했다. 그런 호기심으로 백과사전과 책, 잡지, 신문 읽기를 좋아해 중고교 시절 학생기자로 일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지역신문을 거쳐 UP 통신기자가 돼 2차대전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이후 KMBC를 거쳐 CBS 방송기자가 된 크롱카이트는 1950년 한국전쟁 뉴스를 도맡아 진행하기도 했다. 1962년 저녁뉴스 앵커 겸 보도국장이 돼 1981년 65세로 은퇴할 때까지 최고의 앵커로 명성을 날렸다.

1968년11월 리처드 닉슨과 휴버트 험프리간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을 하면서 17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않아 ‘철의 바지(Old Iron Pants)를 입은 사람’으로 불렸다. 1969년 여름 아폴로11호 달착륙 뉴스는 18시간을 쉬지 않고 중계하다 6시간을 잔 뒤, 다시 앵커석에서 9시간을 버텨 주위를 놀라게했다. 고별방송은 무려 3600만명이 시청, 미국 방송뉴스 사상 최고기록을 세웠다.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다디상을 네 차례나 받았다.

그는 정치인보다 더 인기 있는 방송인이었지만 정치권 영입 제의를 사양하고 92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 구식 언론인이길 고집했다. 그는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알 필요가 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저널리즘”이라며 언론인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정확성”이라고 강조했다.

데이비드 브로더(1929~2011)

1940년대 중반 대학 시절부터 65년 넘게 오직 신문기자를 천직으로 삼았다. 그것도 대부분 정치부 기자로 보냈다. 1965년 뉴욕타임스, 1966년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거기서 42년간 근속했다. 13차례 미국 대선을 취재보도했고 4000여편의 칼럼을 썼다,

그는 취재의 중심을 유명 정치인보다는 현장과 유권자에 뒀다. 의사당이나 당사에 머물지 않고 늘 현장을 찾았다는 얘기다. 중요 선거 때도 중소 도시를 찾아 일반 가정과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최선을 다했다. 매년 서울~부산 거리를 400번 정도, 즉 하루에 한번 정도 다닐 정도였다.

아서 옥스 펀치 설즈버거(1926~2012)

뉴욕타임스의 승승장구는 저널리스트들과 오너 가문의 합심의 산물이다. 그 가운데 초석을 놓은 인물로 아서 옥스 펀치 설즈버거 발행인을 빼놓을 수 없다. 1963~1992년 발행인으로 재임

기간 동안 1천만달러 정도이던 회사의 매출을 17억달러로 170배 늘렸다. 그가 CEO와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뉴욕의 지방신문이던 NYT는 세계 최고 권위의 미디어가 됐다.

학창 시절 지적 능력 미달자였던 그는 NYT를 이끌던 자형의 급사로 37세에 최연소 발행인이 됐다. 모두의 우려와 달리 그는 신문사의 모든 권위는 편집인과 논설실장에게 넘겨야 한다고 믿었고 주어진 역할과 분수를 정확하게 인식했다. 발행인으로서 보도와 사설 등을 둘러싼 압력과 유혹을 막는데 최선을 다했다. 논설실장을 지낸 막스 프랑켈은 펀치는 “그가 한번도 자기 방으로 나를 불러 기사나 칼럼을 싣거나 싣지 말라고 지시한 적이 없으며 늘 다른 방문객처럼 내 방 앞에서 순번을 기다려 내 사무실로 들어와 기사 게재를 부탁했다. 그는 자신이 뽑은 종업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했고 그들이 내린 결정을 존중하고 믿어주며 뒷배와 같은 역할에 충실했다”고 말했다.

제임스 레스턴(1909~1995)

대학 때는 범재보다 못했지만 기사로서 눈부신 성공으로 영화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산 주인공이다.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자란 그는 매일 일찍 취침하고 오전 6시에 일어나 4종류의 조간신문을 메모하며 읽었다.

1934년 AP통신 스포츠 기자로 취업했고 이후 런던지국에 근무하다 2차 대전 발발 후 NYT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워싱턴 지국 근무시 UN 창설 외교문서 전문을 입수하는 특종기사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후 1950년대 초반 매주 평균 2건의 특종을 써대는 특종 제조기로 명성을 날렸다. 무명의 존재였던 그가 최고가 된 비결은 부단한 노력과 겸손한 자세다, 기자가 된 후 20년간 그는 소설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고 업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논픽션 책들은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후배 기자들이 출근하기 전 사무실에 나와 주요 취재원들에게 한 바퀴 전화를 걸어 상황을 파악했고 하루 12~15시간씩 일했다.

그의 유명 취재 노하우는 첫째, 모르는 사안을 아는 척하지 말고 말하기보다 잘 듣는다. 둘째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라. 셋째 예상적 분석이다. 신문을 유심히 읽고 의문을 품어라. 그러면 정부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예상할 수 있다. 그 바탕위에서 추적하고 취재하라.

마거리트 히긴스(1920~1966)

그녀는 10대 때부터 기자, 그것도 종군기자를 꿈꿨다. 대학4년 내내 대학신문 기자를 했고 1942년6월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자로 입사했다. 기자가 된 후에도 종군기자로 보내달라고 얘기했고 1944년8월 마침내 유럽 특파원이 됐다. 2차 대전 막판이었지만 현장을 누비며 숱한 1면 머리 기사를 장식했고 1945년 뉴욕신문여성클럽이 수여하는 최고 해외 특파원상을 수상했다.

1950년 도쿄지국장으로 발령난 그는 한국의 6.25전쟁이 터지자 종군기자로 종횡무진 한반도를 누볐다. 1950년 12월초 영하 20도의 혹한 속에 장진호 일대에서 함흥 철수하는 미 해병대원들과 함께했고 전쟁의 포화속에 두 번의 죽을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인천상륙작전까지 동행 취재를 마치고 1951년 초 귀국했다. 그해 6월 한국전쟁에 관한 세계 최초 단행본인 <War in Korea>를 펴냈다. 그해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1954년엔 스탈린 사망 후 처음으로 소련 입국허가를 받은 미국 기자로 현지에서 취재하다 16 차례나 현지 경찰에 구금되기도 했다.

1965년 베트남 취재여행 중 풍토병에 감염돼 1966년 초 46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투병중에도 매주 3회 칼럼을 쓰는 등 끝가지 기자로 남았다.

박권상(1929~2014)

합동통신 세계통신 등 통신사 기자와 한국일보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장 등 신문사 각각 두 곳, KBS 사장 등 6개 언론사에서 일한 그는 한국 언론계에 최소한 다섯가지를 했다. 첫째, 기자로서 신문 기사 현대화에 힘썼다. 둘째, 논객으로 용기 있는 칼럼을 썼고 중량급 정치인 간담회 등을 주재했다. 셋째, 저술가로서 언론을 지적으로 탐험했다. 넷째, 잡지인으로서 한국 잡지의 새 역사를 썼고 다섯째 방송인으로서 신뢰와 영향력을 높이고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전 생애를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으로 관통,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창립의 주역으로 한국 언론의 국제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권력을 탄압으로 10년 가까운 해직도 견뎌냈다.

그는 신문인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로 정직성을 꼽았다. 그는 신문기자의 제일 요건을 호기심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끈기 있게 진실성을 탐구하는 자세로 과학도가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과 본질적으로 동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50세부터 67세까지 19권의 책을 냈고 시사저널을 창간해 11개월만에 10만 명의 구독자를 모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