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 형사전문변호사’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다. 형사사건의 99.9%에 유죄 판결이 내려지는 일본의 사법 현실에 맞서 젊은 변호사가 억울한 피고의 무죄를 밝혀내는 내용의 법정물이다. 주요 등장인물로 가와카미 겐이치로라는 이름의 도쿄지방재판소 판사가 나온다. 악역인 그가 후배 판사들에게 재판 관련 압력을 넣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좋은 재판 부탁하네’라는 한마디다.

기자는 가와카미가 특유의 소름끼치는 미소와 함께 이 말을 할 때면 오버랩되는 인물이 있었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다. 그 역시 ‘좋은 재판’이라는 말을 강조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재임 중에는 임성근 부장판사와 관련된 본인의 거짓말 의혹과 함께 정치적 사건들의 재판지연 문제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 김명수가 떠난 대법원에서 지난 26일 두 건의 주목할 만한 판결이 나왔다. 하나는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에 대한 판결이다. 또 하나는 절도범에 의해 일본에서 국내로 반입된 고려시대 금동관음보살좌상(불상)의 소유권에 대한 판결이다. 두 사건 모두 일본과 관련됐다는 점이 공통분모다.

박 교수 사건은 2014년 6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9명이 박 교수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박 교수가 2013년 출간한 도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 등으로 기술했다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1심은 문제가 된 대목의 대다수는 사실 적시가 아닌 가치 판단의 영역이라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일부는 명예훼손적 사실을 적시했다고 인정되지만, 개인의 사회적 평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박 교수에게 명예훼손의 고의도 없었다고 판단했다.

반면 2심은 1심 판단을 뒤집고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책에 표현한 내용들이 박 교수의 단순한 의견 표명이 아니라 사실을 적시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박 교수가 허위라는 점과 피해자들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도 이런 표현을 썼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원심이 유죄로 인정한 이 사건의 각 표현은 피고인의 학문적 주장 내지 의견의 표명으로 평가함이 타당하다”며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만한 ‘사실의 적시’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사건을 서울 고법으로 파기 환송했다.

대법원은 특히 “학문적 연구에 따른 의견 표현을 명예훼손죄에서 사실의 적시로 평가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며 “학문적 표현을 그 자체로 이해하지 않고 표현에 숨겨진 배경이나 배후를 섣불리 단정하는 방법으로 암시에 의한 사실 적시를 인정하는 것은 허용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불상 사건은 한국인 절도범 10명이 2012년 10월 일본 쓰시마섬 관음사에 봉안돼 있던 ‘금동관음보살좌상’을 훔쳐 국내로 밀반입하며 시작됐다. 절도범들은 곧바로 체포돼 유죄가 선고됐고, 불상은 정부가 몰수했다.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협약을 들어 불법 반출된 일본 문화재를 돌려 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반면 부석사는 “왜구가 약탈해갔던 불상인 만큼 원소유자인 우리에게 돌려달라”며 2016년 국가를 상대로 유체동산(불상) 인도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951년 불상 속 복장유물에서 발견된 ‘1330년 2월 서주 부석사에 관음상을 만든다’는 문구가 근거였다.

1심은 부석사 손을 들어줬다. 반면 2심은 판단을 뒤집었다. ▲불상이 불법 반출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취득시효가 완성돼 소유권이 넘어갔고 ▲서산 부석사가 고려시대 서주 부석사와 동일한 종교단체라는 점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이번에 대법원은 “원심판결 결론은 정당한 것으로 수긍할 수 있다”며 부석사의 상고를 기각했다. 당초 부석사의 물건이더라도 ‘취득시효 법리’에 따라 일정 기간 문제없이 점유했다면 관음사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보는 게 맞다는 판단이다. 대법원은 “관음사는 취득시효가 완성된 1973년 1월26일 당시 일본국 민법에 따라 이 사건 불상의 소유권을 취득했다”며 “불상이 고려 시대 왜구에 약탈당해 불법으로 반출됐을 개연성이 있다거나 우리나라 문화재라는 사정만으로 이러한 취득시효 법리를 깰 수는 없다”고 봤다.

대법원 홈페이지에 게재된 김명수 전 대법원장의 공개연설문 91건을 살펴보면 ‘좋은 재판’이라는 말이 무려 218번 등장한다고 한다. 그는 퇴임사에서도 “훌륭한 신임 대법원장님과 함께 사랑하는 법원 구성원 여러분이 ‘좋은 재판’의 길을 실현하는 여정을 계속해 주시리라 굳게 믿습니다”라며 좋은 재판을 강조했다.

기자로서는 대법원의 이번 두 판결이 김 전 대법원장이 그토록 강조한 ‘좋은 재판’인지 평가할 능력이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평범한 소시민의 소박한 판단으로는 일본 콤플렉스를 극복한 ‘극일 재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과 관련된 사건이면 으레 동원되는 ‘국민 법감정’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법리적 판단’에 충실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판결은 ‘좋다’ ‘나쁘다’로 평가할 게 아니고 법리와 증거에 대한 ‘충실’ ‘불충실’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 전 대법원장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