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조금씩 깊어지며 숲은 도심에 비해 일찍 달라지고 있습니다. 벌써 시야가 훤해지고, 소리들이 잘 들리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웬지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습니다.

얼마전 일이 있어 저 남쪽 민주지산 치유의숲을 다녀왔습니다. 주변에서 내게 산에서 근무하니 힘들겠다는 인사를 하는데, 거기는 천이백 미터 높이의 민주지산을 비롯한 여러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심심산골에 위치해 내가 산에 근무한다고 얘기하기가 쑥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곳 치유의 숲길 곳곳을 둘러보는데, 깊은 산중에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산이 높아서인지 옆에 계곡이 흐르는데, 치유숲길을 걷는 내내 계곡 물소리를 듣는 게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날 서울서 이동하고, 오후엔 동료와 분주한 일정을 보내다 저녁을 맞았습니다. 무언가를 꼭 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매일 하는 하루 만보걷기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이었지요. 얼른 핸드폰 만보계를 열어보니 멀리 이동했고, 거기서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오천여보 밖에 안되었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내가 매일 많이 걷는 걸 아는 친구가 시중은행에서 나온 적금을 소개해주었는데, 그것은 하루에 만보를 걸으면 금리 십 프로를 보장하는 놀라운(?) 상품인데, 하루 한도가 만원, 180일이 기한으로 설정된 재미있는 상품. 그걸 가입해서 열심을 냈는데 애교 이상이었을까요? 가입 후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 전날까지 69일을 만보 씩 걸어 낸 겁니다.

지난 여름 덥고, 비가 많이 왔음에도 달성을 했기에 무얼해도 좋은 가을에 접어들면서 더 자신감을 가져왔는데 출장 간 그날 일종의 위기가 찾아온 거죠. 동료와 저녁을 하고 치유의숲 숙소에 돌아와 걷지 못한 걸음 수를 채우려 밖으로 나섰습니다. 밖은 너무 어두웠습니다.

조심 조심 주차장 근처를 걸어 만보가 되었거니 하고 그제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세상에! 높은 산들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광장의 하늘에 말 그대로 별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여기는 반딧불이의 고장이라는 청정 무주와 어깨를 맞대고 있는 심심산골 영동이 아니던가? 만보를 채우겠다는 궁상에 이런 장관을 놓치다니.. 순간 얼마 전 읽은 ‘구름관찰자를 위한 가이드’라는 책에서 본 그들의 선언문이 생각되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그 덧없는 아름다움에 경탄하라. 그리고 구름 위에 머리를 두고 사는 듯, 공상을 즐기며 인생을 살라’

무안함에 얼굴이 화끈거려왔습니다. 낭패감이 몰려왔지만, 다행히 소중한 풍경을 놓치지 않았음에 안도하기도 했죠. 중요한 게 무엇인가에 대해 여전히 요동을 치며 조바심을 갖는 가을날이기도 하지만, 하늘은 내게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중요한 것 만하고 또 날이 청명하기만 기대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터.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위로를 건네는 짙은 밤하늘의 별과 숲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