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출처=셔터스톡
한국은행. 출처=셔터스톡

일명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며 명문대 출신 우수 인재가 몰리던 한국은행이 인력 채용과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5년 동안 경력직 채용에서는 예정 인원의 절반 가까이 뽑지 못했고, 박사급 연구인력은 미달 인원이 반 이상이었다. 30대 이하 청년 직원의 중도 이탈률도 꾸준히 오르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경제전문가 집단이라 불리던 한국은행의 명성에 금이 간 상황이다.

지난 13일 한은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한병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한은은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경력직 채용 예정 인원 96명 중 49명을 선발하는 데 그쳤다. 연도별 미달 인원은 ▲2018년 24명 예정 중 12명 ▲2019·2020년 18명 중 8명 ▲2021년 16명 중 11명 ▲2022년 20명 중 8명이었다.

박사급 인력은 절반 넘게 미달했다. 한은은 지난 5년 동안 박사급 연구인력 42명을 모집했지만, 20명밖에 뽑지 못했다. 금융시장전문가와 전자금융전문가도 각각 5명과 4명을 선발할 계획이었으나 최종 채용 인원은 각 1명씩이었다.

같은 기간 11명의 경력직이 재계약 혹은 정규직 전환 없이 퇴사했다. 그중 9명은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 그만뒀다. 경력직 채용에 합격한 후 입행을 취소한 인원도 2명(2018년 IT전문가 1명, 2019년 법률전문가 1명)이다.

중도 퇴사하는 20·30세대 직원 수도 늘었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중도 퇴직한 직원 37명 중 30대 이하는 27명으로 전체 퇴직자의 72.97%다. 퇴직자 10명 중 7명이 30대 이하인 셈이다.

청년 직원 이탈률은 2019년 60%, 2020년 63.64%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 2021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한은을 나간 20~30대 직원은 총 52명이다. 같은 기간 전체 중도 퇴직자(정규직 기준, 80명)의 65% 수준이다.

 

2018~2022년 은행별 직원 평균임금. 출처=유동수 의원실
2018~2022년 은행별 직원 평균임금. 출처=유동수 의원실

우수 인력이 한은을 외면하는 이유는 다른 금융공기업이나 민간 금융기관에 비해 낮은 급여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2018년까지 한은의 보수는 5대 시중은행과 비교해도 높은 수준이었다. 2018년 기준 시중은행 평균임금은 ▲NH농협은행 1억454만원 ▲신한은행 9863만원 ▲우리은행 9700만원 ▲하나은행 9590만원 ▲KB국민은행 9252만원이었다. 한국은행의 평균 연봉은 9940만원으로 농협은행 다음으로 가장 높았다.

지난해 한은의 평균임금은 1억330만원이다. ▲KB국민은행(1억2292만원) ▲하나은행(1억1935만원) ▲NH농협은행(1억1878만원) ▲신한은행(1억1297만원) ▲우리은행(1억1057만원) 등보다 낮다. 시중은행의 실적이 개선되며 임금을 계속 올리는 사이 최근 5년간 한은의 평균 연봉 인상률은 1.4%에 그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기획재정부가 승인한 지난해 한국은행의 임금 인상률은 1.2%로, 1.4%인 공무원 임금 인상률보다 낮다.

한 의원은 “인재들이 한은에 입사할 유인이 떨어지고 있어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를 지향하는 한은의 인적 경쟁력 하락이 우려된다”며 “한은은 급여성 경비예산 편성 독립을 위한 한은법 개정 등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6월 23일 한 의원은 ‘한국은행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인건비 승인 권한을 기획재정부에서 금융통화위원회로 옮기는 것이 핵심이다. 한은법 98조에 따르면 한은의 급여성 경비 관련 예산안은 기재부 장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임금을 인상하기 위해 기재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한은의 임금 경쟁력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전문성을 기르기 힘든 인사 시스템과 보수적인 조직 분위기도 한은의 경쟁력을 낮추는 요인이다. 우수한 인력이 다른 금융기관에 비해 낮은 연봉에도 한은을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전문가로 성장해 우리나라의 거시경제를 이끄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다. 기대와 달리 입사 후에는 ‘순환근무제’ 등으로 2년마다 부서를 이동하느라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지난 1월 입사한 한은 신입 행원 63명 중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은 2명으로 전체 입사자의 약 3%다. 10여 년 전만 해도 신입 행원의 30% 정도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몇 년 사이 비중이 10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생은 증권사나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처럼 연봉이 높거나 로스쿨 등 전문성이 보장된 직업을 선호하는 추세다.

명문대 졸업이 업무 실력과 직결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은 직원들은 한은이 더 이상 명문대 출신 인재에게 매력적인 직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고 있다. 대한민국 거시경제의 흐름을 파악하고 통화량과 금리를 조절해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유지해야 하는 중앙은행의 특성상 직원의 학술적 역량도 무시할 수 없다.

한은 노조 관계자는 “한국은행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재부에서 독립해 자율적으로 임금을 결정함으로써 급여 수준을 현실화하는 게 우선”이라며 “직원이 잠재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채용, 임금, 평가 등 인사 시스템 전반도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직원이 느끼는 무력감도 문제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싱크탱크로서 한은이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쓴소리도 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한은에서 제시한 의견이 실제로 정책에 반영돼야 직원이 업무적인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끼며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