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웁시다. 비겁하게 살지 맙시다.’

동양철학자 임건순(42) 작가의 SNS에 걸려 있는 좌우명(?)이다. 그의 ‘투사’적 기질이 잘 드러난다. 임 작가 스스로 경도돼 있다고 고백하는 제자백가 사상가 ‘묵자’와도 닮았다.

공자, 맹자, 순자가 정치가나 학자라면, 묵자는 운동가이자 실천가로 볼 수 있다. 묵자는 하층민의 고통을 직시하고 대변하며, 노동자의 권리와 그들이 누려야 할 기초적인 생활 보장에 관심이 많았다.

묵자는 통치·국가·사회 시스템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최소의 삶의 안정성을 누리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겸애(兼愛)’를 주장했다. 유가의 ‘별애(別愛)’가 혈연 중심의 차별적 사랑이라면, 겸애는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평등한 사랑이다.

임 작가는 요즘 은행, 금융감독원, 경찰서, 국민권익위원회 등으로 동분서주한다. 그는 얼마 전 소위 ‘통장 인질 협박’이라 부르는 보이스피싱을 당했다. 모르는 사람이 그의 계좌에 소액을 입금했고, 보이스피싱범으로 신고당해 계좌가 지급정지됐다. 입출금이 막힌 것은 물론, 체크카드까지 쓸 수 없는 상태다.

은행도, 금융감독원도 현행법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만 한다.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일뿐이라고들 하지만, 그는 참지 않고 싸우기로 했다. 관련 기관에 직접 찾아가 항의하고, 자신의 SNS(페이스북)에 상황을 공유한다. 신종 피싱 범죄에 걸려 절박한 처지에 몰린 소상공인의 피말리는 상황에 관해 칼럼도 썼다.

“이건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수히 많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가 큰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이분들을 위해서라도 싸워야죠.”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힘없는 이웃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싸운다는 그의 말에서 묵자의 겸애가 떠오른다.

 

인터뷰 = 임혁 편집인, 정리 = 강예슬 기자

 

“의는 이(利)로움이다(義利也).” - <묵자> 경상(經上)편

 

- 지난 8월 31일 페이스북에 처음으로 ‘신종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현재는 어떤 상황입니까?

“계좌가 동결됐다는 문자를 받고 바로 은행에 전화해 모르는 돈이니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에게 합의를 요청해야 했는데, 저와 피해자가 다른 은행을 이용 중이어서 연락이 쉽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피해자가 본인이 사는 지역 경찰서에 사건 접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사건을 서울 강북경찰서로 이관해 조사받을 예정입니다.”

- 정말 답답한 상황이겠네요.

“금융감독원도 은행도 법 핑계만 대며 나 몰라라 합니다. 그나마 저는 당장 생활이 어려운 수준은 아니지만 소상공인들은 하루만 계좌가 막혀도 타격이 큽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계좌로 돈을 받지도, 보내지도 못하는 건 사실상 경제적으로 살인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저 같은 피해를 당한 사례가 작년에만 3000여 건이라고 합니다. 적은 수가 아닌데 공론화되지 않는 이유는 피해자들이 힘없는 소상공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대로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할 스피커(사람)가 없으니 국민도, 정부도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거죠.”

- 주위에 비슷한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가 있습니까?

“페이스북 친구인 김규나 작가가 얼마 전 저와 같은 피해를 입어 조선일보에 칼럼(‘통장 협박’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보니, 2023년 9월 6일 자)을 썼더라고요. 칼럼 내용 중 ‘부당한 일을 신고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장난이나 악의로 허위 신고하는 자에겐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 궁금하다’는 문장에 공감합니다. 신고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억울하게 신고당한 사람의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빠르게 피해자를 구제하는 일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사람이 있다면 이의를 제기해 소명할 수 있도록 좀더 세심하게 법을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 보이스피싱을 겪으며 은행, 금융감독원, 경찰 등의 업무 처리 과정에서 발견한 문제점이 있나요?

“귀찮아하는 게 제일 크죠.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위해 만든 법을 악용해 또다른 피해가 수없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기다리라는 식이에요. 국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돼야 한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 소설 <25시>가 생각나네요. 서류와 규정만 따지고 융통성은 전혀 없는 관리들을 ‘기계 인간’이라고 멸칭했죠. 

“제가 계속 항의하니 금감원에서는 그렇게 급하면 ‘채무부존재 소송’을 하라고 하던데 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 어떻게 하는 건지는 알려주지 않아요. 결국 스스로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하라는 말인데 계좌가 묶인 사람이 변호사 선임 비용은 어디서 조달하나요. 국회 핑계만 대지 말고 대통령 시행령 등을 통해 조속히 처리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 SNS에 “국민권익위원회라도 찾아가야겠다”고 쓰셨던데.

“우선 방문 신청을 해놓은 상태고, 일정이 잡히면 직접 가서 상담해보려고 합니다. 권익위에 가도 뾰족한 수가 있겠나 싶지만 일단 싸워보려고 해요. 이건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보다 훨씬 살기 힘든 국민을 괴롭히는 일이니까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해 저라도 열심히 싸워야 죠. 곧 추석인데 돈이 들어오고 나갈 데가 많은 소상공인이 계좌를 쓸 수 없으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국가가 소상공인을 보호할 의지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임건순 작가의 관심사는 제자백가, 그중에서도 군사와 법을 중시한 병가와 법가다. 제자백가, 묵자, 오자, 순자, 노자, 한비자 등 중국 사상가와 고전을 다룬 책도 14권이나 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월간조선·한국경제신문 등에 제자백가 사상을 현대 사회 문제에 적용한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 최근 언론 기고가 뜸하신 것 같은데 근황이 궁금합니다.

“올 초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 때 ‘남북한은 영구분단이 맞다’로 했더니 그 이후 기고 요청이 뜸해지더라구요. 사실 칼럼 기고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서 생활비는 주로 오프라인 강의료로 충당하죠. 그런데 코로나19 이후로는 강의도 많이 줄었어요. 게다가 우리 사회는 책이 됐든 강의가 됐든 지식유통플랫폼도 죄다 좌파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강의 기회도 많지 않고요. 그래서 그동안 번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계좌까지 막혀버렸으니 답답한 상황입니다.”

- 지금까지 책을 14권 쓰셨는데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무엇입니까?

“묵자와 손자를 다룬 책을 좋아합니다. 제자백가는 전쟁의 시대였기 때문에 병가와 법가가 시대정신이었습니다. 15~18세기 서양 근대 사상과도 비슷하죠. ‘어떻게 하면 사회와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질서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 학문이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적용할 만한 부분이 많습니다. 유가나 도가는 현대 사회와는 다소 동떨어졌죠.”

- 386세대를 ‘현대의 위정척사파’라고 비판해 오셨는데 그렇다면 현 정치권에서 위정척사파와 대척점에 있는 ‘백탑파(북학파)’라고 할만한 인물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지금 우리 정치에 어떤 문제가 있냐 하면 너무 잘사는 나라가 되다보니 민간부문의 보상이 매우 커졌어요. 그러니 우수한 사람이 정치에 뛰어들 유인이 사라져요. 굳이 정치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신의 역량을 뽐낼 방법이 많다는 뜻입니다. 임영웅 같은 사람이 장관이 부럽겠어요, 대통령이 부럽겠어요. 특히 우파는 사람을 안키워서 더 그렇죠. 우수한 젊은이가 홍준표, 나경원 같은 사람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싶겠습니까?”

- 우파가 원래 그랬던건 아니지 않나요?

“ 지금 우파는 인재를 키울 이념적 기반과 방향성이 없어요. 우파를 그나마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망국(亡國)’을 늦추기 위해서입니다. 386이 주류인 좌파를 지지하는 건 망국행 KTX를 타는 일이죠.”

- 화제를 좀 바꾸죠. 19세기 말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중 화혼양재만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일본은 봉건제를 경험한 나라입니다. 중세 유럽과 유사한 사회 구조죠. 현대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중세 봉건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힘의 중심이 한 곳에 집중된 조선 같은 중앙집권적 국가에서는 여러 힘이 균형을 이뤄야 하는 민주주의가 발달하기 어렵죠.”

지난 7월 28일 대일외국어고등학교에서 임건순 작가가 본인의 저서 ‘제자백가 인간과 공동체를 말하다’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임건순 페이스북
지난 7월 28일 대일외국어고등학교에서 임건순 작가가 본인의 저서 ‘제자백가 인간과 공동체를 말하다’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임건순 페이스북

- 조선과 일본은 유교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지 않았나요?

“19세기 말 조선과 일본을 가른 가장 큰 차이가 양명학을 받아들이는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양명학은 성리학을 비판하며 등장한 유학사상입니다. 성리학이 명분인 이(理)에 집착한다면 양명학은 현실인 기(氣) 또한 중시합니다. 조선은 철저하게 주자학이 중심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주자학 외의 유학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사문난적’으로 봤죠. 조선에서 양명학은 이단(異端)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양명학이 흥했어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 양명학에서 일본의 ‘장인 정신’이 나왔습니다. 일종의 ‘기업가정신’이죠. 일본이 ‘메이지 유신(근대화)’에 성공한 건 상업 친화적인 양명학에 뿌리를 둔 기업가정신 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조선 후기에는 그래도 양명학에 관심을 두는 학자들이 있었죠?

“한국의 기업가 정신은 그나마 자생적인 양명학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주를 대표하는 유학자 남명 조식의 학문이 양명학과 유사하거든요. 거대 자아를 추구하고 무사적 기질과 실용적 기풍을 보이는 점이 그렇죠. 그런 학풍에 있었기에 진주에서 이병철, 구인회, 조홍제 등 걸출한 기업인이 탄생할 수 있었던거라고 봐요.”

- 재미있는 분석이네요.

“우리나라에서 많은 실업인을 배출한 지역이 진주와 서북 지역입니다. 서북은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기도 하죠. 중국에서도 양명학이 흥한 지역이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진주 산세가 평양과 비슷합니다. 진주에 남강이 있다면 평양에는 대동강이 있고, 진주와 평양 모두 기생과 냉면으로 유명하죠. 6.25 전쟁 이후 서북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대한민국 자본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장하지 못했을 거라고 봅니다.”

- 현실로 돌아와서 윤석열 정부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저는 윤 정부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성계는 개경(개성)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죠. 윤석열도 정치 초보입니다. 이성계가 부패한 고려말 권문세족과 타락한 불교 세력을 척결한 것처럼, 윤석열 대통령이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둘렀으면 좋겠습니다. 부정부패를 척결한 후에 새로운 미래 비전을 지닌 21세기형 신진 사대부(젊은 지식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해야 합니다.”

- 작가님이 생각하는 젊은 정치 유망주가 있나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대한민국의 ‘톱티어(최고 수준)’ 청년들은 지금 여의도에 없습니다. 우수한 인력은 금융권, 대기업, 스타트업에 가거나 판·검사, 변호사, 의사가 되죠.”

- 그렇다면 젊은 신진 엘리트는 어디서 발굴해야 할까요?

“더 이상 우파 정치가 늙은 판·검사의 정치 인생 이모작 수단으로 쓰이면 안 됩니다. 50, 60대 판·검사 출신보다는 현재 30, 40대인 80년대생 의사들이 정치권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요즘 우리나라 청년 중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 의대이니까요.  검사를 데려오더라도 젊은 검사를 데려왔으면 좋겠습니다.”

- 소위 ‘대깨문’, ‘개딸’ 같은 현상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깨문’과 ‘개딸’의 주축은 현재 30대 후반~40대 초중반인 젊은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1977년부터 1980년대 중반에 태어난 여성들이 10대였을 당시 HOT, 젝스키스 같은 1세대 아이돌이 등장하면서 일명 ‘빠순이(오빠 부대)’라 불리는 팬덤 문화가 시작됐습니다. 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면서 정치로 팬덤 문화를 가져온 거죠. 대중문화의 팬덤 현상이 정치로 전이되며 대깨문과 개딸이 탄생했다고 봅니다.”

- 새로 준비하고 계신 책은 없습니까?

“무속 관련 책을 쓰는 중이예요.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삶은 계란에 비유할 수 있어요. 겉껍질은 완전히 서구화, 현대화 돼 있죠. 껍질을 까면 흰자가 나오는데 이건 유교적 전통이예요. 여기서 더 들어가면 노른자가 나오는데 바로 무속입니다. 다시 말해 한국인의 의식 기저에는 무속이 있는 거예요. 특히 노무현 대통령과 세월호의 비극 등을 거치며 대한민국 사회는 완전히 무속 시대로 퇴행해 버렸죠. 무속을 모르면 한국 사회를 분석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 무속이 한국 사회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요즘 아이돌 가수들이 전근대 사회에서는 무당이었을 겁니다. 보통 연기를 잘하거나 춤을 잘 추고, 노래를 잘 부르면 ‘신들린 듯’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서는 무속의 유전자가 순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정치, 사회 분야에서 문제점과 해결 방안을 찾을 때는 대부분 역기능을 해요. 한국 사회는 이태원 참사 같은 게 터지면 ‘왜(why)’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우선 ‘죽일 놈(who)’을 찾아 조리돌림, 푸닥거리하는 무속 문화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어요. 이러면 속은 시원할지 모르겠지만, 사고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사고가 반복돼요. 특히 정치인들이 우리 사회의 무속적 코드를 이용해 국민을 선동하는 일이 많은데, 그러면서 정치가 더 후진하게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