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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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반도체의 침체가 분위기 반전 기약 없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생존의 기로에서 다시 한 번 서로를 경쟁상대로 마주하게 됐다. 미래 산업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AI(인공지능)을 구현하는 차세대 반도체 기술력을 선점하기 위한 두 기업의 행보는 자연스럽게 경쟁의 구도를 만들었다. 

AI 반도체, ‘102조원’의 기회   

메모리반도체 기업들은 큰 고민에 빠졌다. 각자의 주력 제품인 기존 규격 반도체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폭증한 수요에 대응해 공급됐고, 이는 결국 공급 과잉이라는 시장 불균형으로 이어졌다. 시장에 넘치는 메모리 재고로 가격 하락이 지속됐고 각 기업들은 ‘생산량이 곧 수익성’이었던 순환구조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가 촉발시킨 첨단 AI 기술 구현에 대한 관심은 고성능 AI 구현의 핵심인 반도체까지 이어졌다. 기존 규격의 반도체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빠른 속도로 처리하고 저장하기 위한 고성능· 고용량 메모리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현재 AI 기술은 미래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결정하는 ‘키’로 여겨지고 있다. 

미국의 IT전문 글로벌 리서치 기업 가트너(Gartner)는 지난해 12월 발표한 리포트에서 “2019년 135억달러(약 19조원) 수준으로 기록된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규모는 2025년 768억달러(약 102조원)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기존 규격의 반도체 시장에서 생산량과 동일시됐던 기업의 경쟁력이 큰 의미가 없어진 상황에서, 시장의 상위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 AI 반도체는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이 됐다. 

SK하이닉스 “1등 할 때가 됐다” 

메모리반도체 업계에서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마이크론과 함께 세계 시장을 3분할하는 기업 중 하나로 확고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올해 1분기에 글로벌 메모리 시장 점유율 23.9%를 기록하면서 마이크론(28.2%)에 2위 자리를 내 주기 이전까지 약 9년 동안 삼성전자와 함께 업계 1,2위 자리를 지켜왔다. 

SK하이닉스 321단 4D 낸드. 출처=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 321단 4D 낸드. 출처=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는 최근 AI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시장의 변화에 가장 빠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기업으로 업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8일(현지시간) 미국 산타클라라에서 열린 ‘플래시 메모리 서밋(Flash Memory Summit) 2023’에서 세계 최고층인 321단 1Tb(테라비트) TLC(Triple Level Cell) 4D 낸드플래시 샘플을 공개했다.

321단 1Tb TLC 낸드는 이전 세대인 238단 512Gb(기가비트) 대비 생산성이 59% 높아진 제품이다. 데이터를 저장하는 셀을 더 높은 단수로 쌓아 한 개의 칩으로 더 큰 용량을 구현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이어 SK하이닉스는 지난 21일 AI용 고성능 5세대 HBM(고대역폭메모리) D램의 신제품인 ‘HBM3E’ 개발에 성공한 후, 상용화를 전제한 기능 검증을 위해 미국의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에 샘플 공급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HBM은 첨단 AI 가속기의 필수 부품으로 5세대 HBM을 개발해 이를 고객사 검증하는 시도는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다.  

SK하이닉스 HBM3E. 출처=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 HBM3E. 출처= SK하이닉스

이번 ‘HBM3E’의 성능에 대해 SK하이닉스는 “HBM3E는 초당 최대 1.15테라바이트(TB) 이상의 고용량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으며, 제품에 적용된 ‘매스 리플로우 몰디드 언더필(MR-MUF)’ 기술은 반도체의 효율적 구동을 좌우하는 열 방출 성능을 기존의 HBM3 대비 10% 향상시켰다”면서 “업계 최대 HBM 공급 경험과 양산 성숙도를 토대로 2024년 상반기부터 HBM3E의 양산에 들어가 AI용 메모리 시장의 독보적 입지를 확보하겠다”고 밝했다. 

삼성전자 “클래스는 변하지 않는다” 

HBM의 상용화 성능 검증에서 SK하이닉스에 선수를 뺏긴 삼성전자도 곧 자사의 차세대 HBM을 올해 하반기 중 공개할 예정이다. 삼성전자가 선보일 5세대 HBM은 ‘HBM3P’라는 라인업으로, SK하이닉스의 ‘HBM3E’와 그 이름이 구분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 26일 특허정보검색서비스(KIPRIS)에 ‘스노우볼트(Snowbolt)’라는 상표를 접수하고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삼성전자는 “인공지능, 고성능 컴퓨팅 장비에 사용되는 고대역폭 D램 모듈의 브랜드명으로, 제품은 다양한 첨단 영역에서 활용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의 HBM3. 출처= 삼성전자
삼성전자의 HBM3. 출처= 삼성전자

지난 2분기 실적 발표와 함께 진행된 컨퍼런스 콜에서 삼성전자는 HBM 시장에 대한 계획으로 “업계 최고 수준 성능, 용량으로 시장의 요구에 적극 대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차세대 HBM의 성능 검증에서 SK하이닉스보다 다소 뒤쳐진 삼성전자는 2024년에는 6세대 HBM를 먼저 선보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HBM 전략에 대해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AI 반도체 신규 고객사는 올해 4~5개사에서 내년 8~10개사로 확대될 것이며, 이를 통해 향후 HBM 시장의 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위해 오랜 기간 함께 업계를 이끌며 의기투합 해 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래 먹거리의 ‘선제적 확보’를 전제로, 서로를 뛰어넘기 위한 무한 경쟁에 돌입했다. 기존 규격의 메모리에서 한계를 마주한 두 기업이 지속할 선의의 경쟁은 국내 반도체 시장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