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볼만한 영화가 없어요” 현재 국내 관객들이 영화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크면서도, 가장 본질적인 불만이다. 관람료 이상의 재미와 만족감을 주는 작품이 상영된다면, 일반관보다 관람료가 비싼 특별관을 찾아서라도 관객들은 극장으로 달려간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영화관에 상영되고 있는 작품 중에 ‘볼 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 그리고 볼 만한 ‘한국 영화’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영화산업 전체는 큰 고민을 마주하고 있다.

韓극장가 점령한 일본 애니메이션

한국 영화의 부진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은 바로 극장용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이다. 이전까지 국내 관객들은 애니메이션 작품을 영화관에서 보는 것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서브 컬처(Subculture)’의 성향이 짙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높은 인지도, 안정된 서사 그리고 고퀄리티 작화 기술이 구현하는 화려한 볼거리 등이 이전보다 강화된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점점 변하게 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온전한 상영관 운영이 어려웠던 2021년 1월, 메가박스 한정으로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은 당대에 선풍적 인기를 끌며 박스오피스 1위를 한동안 점유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은 CGV와 롯데시네마에서도 상영됐고 약 3개월 이상의 총 상영 기간 동안 줄곧 박스오피스 상위에 머물렀다. 이렇게 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의 선풍적 인기는 지난 1월 4일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 그리고 3월 8일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이어진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1990년대의 ‘슬램덩크’를 기억하는 3040세대들의 ‘N차 관람’에 힘입어 4월까지 장기간 상영됐고 총 관객 수 400만명을 돌파(3월 14일 기준)하면서 2017년 <너의 이름은>이 세운 국내 개봉 일본 애니메이션 관객 순위 1위 기록(380만명)을 갈아치운다. 놀랍게도 이 기록은 일본 애니메이션 최초 국내 500만 관객 동원을 눈앞에 둔 <스즈메의 문단속>(493만명, 4월 25일 기준)에 의해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경신된다.

이 기간 동안 한국영화의 점유율은 처참했다. 영진위 통계에 따르면 2023년 1분기 한국 영화의 국내 박스오피스 점유율은 29.2%에 그쳤다. 본래 국내 박스오피스가 한국 영화들에 대한 높은 선호도로 이끌어가던 시장이었음을 고려하면 매우 충격적인 지표다. 같은 기준의 영진위 조사에서 2019년 한국 영화의 점유율은 64%를 기록했다. 2023년 1분기 박스오피스에서 상영된 한국 영화들 중 1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영화는 <교섭> 단 한 편 뿐이었다.

이를 그대로 해석하면 국내 관객들은 재미있는 한국 영화가 없으니 영화관을 찾지 않고, 영화관을 찾더라도 재미없는 한국 영화보다는 웰 메이드 일본 애니메이션을 영화관에서 보는 게 만족도가 높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코로나19의 여파와도 일부분 연관돼 있다. 코로나19 확산 기간 동안 소위 말하는 블록버스터 작품들의 제작 계획이 무산되거나 혹은 제작이 완료됐음에도 시기의 문제로 상영되지 못한 작품들이 늘어나면서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있는 한국 영화의 개봉이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영진위의 ‘한국영화연감’에 따르면, 2023년 1분기 기준으로 제작을 마치고도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못한 한국 영화는 90여 편에 이른다.

믿었던 MCU가 무너지다

이전의 분석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국내 박스오피스의 관객 동원력에 힘이 실리지 않는 여러 이유들 중에는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시리즈의 부진도 있다. <아이언맨>(2008)으로 시작해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2019)까지 총 23개 영화로 마무리된 마블 스튜디오 ‘인피니티 사가(페이즈 1~3)’의 각 작품들은 개봉만으로도 최소 200만에서 3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2022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페이즈에 접어들면서 최근의 MCU 작품들은 이전의 파괴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심지어 골수팬들의 독기 어린 혹평 속에 상영을 마치는 경우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페이즈4의 <이터널스>,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 그리고 페이즈5의 <앤트맨: 퀀텀매니아>는 “최악의 영화들”이라는 혹평 속에 이전 MCU 작품들이 세운 대기록이 무색할 정도로 저조한 흥행 실적을 기록했다. 심지어 올해 11월 개봉될 <더 마블스>는 예고편 공개만으로도 “개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등의 비판을 받고 있다.

여기에 디즈니+를 통한 OTT 단독 오리지널 드라마 작품들과의 내용 연계가 페이즈4부터 강조되면서 작품에 대한 접근 장벽이 높아졌다. 이에 현재의 MCU 작품은 대중들에게 일부 ‘마블 매니아’들만이 즐기는 하나의 서브컬쳐처럼 여겨지고 있다.

생존을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볼 만한’ 한국 영화 기대작들이 개봉되면, 관객들은 다시 예전처럼 극장으로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은 아직 남아있다. 상영관 운영 규제 해제 직후인 지난해 5월 개봉한 <범죄도시2>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사례는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다.

다만, 전문가들은 한국영화 산업계도 변해가고 있는 콘텐츠의 트렌드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 한국 영화산업은 코로나19의 여파가 남아있는 특수한 상황, 콘텐츠 소비 패턴의 변화, 한국 영화 콘텐츠 품질의 문제 등 수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힌 고민을 마주하고 있다.

결과론적 성향이 강한 대작의 개봉과 흥행을 마냥 기다려서도 안 되고, 단순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좋은 작품은 관객들이 찾아온다’는 하나의 공식과 같은 대전제에서 콘텐츠 품질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영화 콘텐츠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으로 영화관을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멀티팩터>, <골목의 전쟁>의 저자이자 유튜브 채널 ‘바비위키’를 운영하는 유튜버 김바비(김영준)는 한국영화산업의 위기에 대해 분석한 영상에서 “OTT 오리지널 작품의 제작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는 영화 제작인력, 제작비 대비 수익성 측면에서 영화보다 유리한 드라마 등 여러 요인들로 인해 소위 말하는 ‘영화 판’에서는 인력과 콘텐츠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는 단기간에 해결이 어려운 문제”라며 “콘텐츠 산업의 변화에 대응해 한국의 영화산업도 다양한 전략들을 실행에 옮기면서 생존법을 찾아야 한다. 이 세상에 TV가 처음 나타났을 때에 받은 충격 이후로 지금까지 영화와 영화관들이 살아남은 것처럼”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