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사가 밀집해 있는 여수산단. [사진=연합뉴스]
국내 석유화학사가 밀집해 있는 여수산단. [사진=연합뉴스]

올초 중국 경제활동재개(리오프닝)로 매출 상승 기대를 모았던 석유화학업계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밀월로 전망이 빗나가면서다. 불황타개를 목표로 석유화학업계는 유럽과 아프리카로 수출 타깃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15일 기획재정부가 전일 발표한 ‘최근 경제동향(4월호)’에 따르면 올해 3월 수출은 전년동월과 비교해 13.6% 감소한 551억2000만달러로 조사됐다. 동기간 석유화학 품목 수출은 25% 하락했다. 이는 디스플레이(42%↓)와 반도체(35%↓)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감소폭이다.

석유화학업계에서는 수출 감소 원인을 중국 내 시설 증설에서 찾는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은 국내 석유화학제품 절반을 사들여 1등 수입국 지위를 유지해왔다. 중국은 우리나라가 수출한 기초유분(에틸렌, 프로필렌)과 파라크실렌(PX) 등 중간재를 가공해 최종재를 세계에 판매해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안정적인 중간재 자급과 가격 인상을 방어하려 에틸렌 등 주요제품을 생산하는 나프타분해공장(NCC)을 건설해 자급률을 꾸준히 올려왔다.

블룸버그 등은 중국 석유화학업계 주요 기초유분 자급률이 2025년 100%를 웃돌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에서 석유화학제품 중간재 자급이 가능하면 굳이 수입할 필요도 없다는 계산이다. 중국이 자급률 100% 달성을 불과 2년 앞둔 시점도 국내 석유화학업계에 악재로 작용했다. 증설로 물량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으면 굳이 기초유분을 수입할 필요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경기침체와 중국발 수요 둔화까지 겹치며 최근 국내 NCC 가동률은 60~70%까지 떨어진 상태다.

김서연 나이스신용평가 책임연구원은 “2019년 이후 대규모 기초유분 증설 및 중국 업체 원가 경쟁력을 감안하면 국내 석유화학사 기초유분 수출 규모가 축소될 수 있다”며 “중국의 석유화학 밸류체인 수직 일관 생산 체계 확대에 따라 국내 회사들의 대중국 수출여력이 구조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설상가상 중국은 러시아산 원유를 도입해 가격경쟁력도 확보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해부터 러시아 원유에 배럴당 60달러 상한제를 시행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고가로 원유를 판매해 전쟁비용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의도다. 러시아는 미국, EU 등에서 원유 판로를 잃은 대신 중국·인도 등지에 값싼 가격으로 원유를 공급했다. 중국 처지에서는 러시아에서 원유를 값싸게 도입해 석유화학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시장에서 가격 할인도 하며 제품을 팔 수 있다. 잇따른 OPEC+ 감산 소식에도 국제유가가 크게 오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언급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연초 기대하던 중국 리오프닝과 러시아산 원유 가격상한제 시행으로 국제유가 상승이 예상됐으나 오히려 양국 협업으로 세계 경기침체 영향만 크게 받았다”며 “원유만 규제할 뿐 정작 석유를 기초로 생산하는 석유화학제품은 원산지를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고 꼬집었다.

중국은 석유화학 산업정책으로 2025년까지 기초유분 지급률 100% 이상을 달성할 전망이다. [사진=나이스신용평가]
중국은 석유화학 산업정책으로 2025년까지 기초유분 지급률 100% 이상을 달성할 전망이다. [사진=나이스신용평가]

중국 기초유분 공급과잉 전망으로 향후 셈법도 복잡해졌다. 지금까지 중국 설비증설에 국내 석유화학사들은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사업 강화로 대응해왔다. 범용 석유화학사업인 에틸렌이나 프로필렌 등은 중국에서도 쉽게 생산할 수 있지만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스페셜티 제품은 생산이 어려워서다.

하지만 중국 석유화학업계 내 기초유분 공급과잉 상황이 고착화하면 국내 석유화학업계에 침투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중국 석유화학사가 과잉 공급된 기초유분을 스페셜티 사업만 영위하는 국내 석유화학사에 저가로 공급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은 기초유분 후방제품인 납사와 정제설비 증설도 진행 중이다. 이 부분이 마무리되면 중국 석유화학업계 스페셜티 제품 개발도 본격화가 전망된다. 

이에 석유화학업계는 수출 타깃 국가 변경에 나섰다. 대상은 유럽과 아프리카 등이다. 유럽 석유화학업계는 EU 내 환경규제 강화와 저렴한 러시아산 원료 공급이 막혀 구조적인 벽에 부딪힌 상태다. EU 내 석유화학사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원유 25%, 납사 30% 규모를 러시아에서 저가로 공급받았다. 현재는 거래가 막혀 가격경쟁력을 잃었다.

유럽 내 석유화학 정제설비 노후화도 국내 업체 경쟁력이 예상되는 이유다. 전유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흔들리는 판도 속 국가별 셈법’ 리포트에서 “유럽 내 정제설비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거나 노후화돼 중장기적으로 경쟁력을 상실한 정제설비 가동률을 낮추거나 영구폐쇄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라며 “유럽 내 NCC 및 다운스트림 화학업체들 원가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아프리카는 미개척 시장으로 성장잠재력이 높다는 평가다. 석유화학업계에서 아프리카에 선진적으로 진출한 회사는 롯데케미칼이다. 회사는 2018년 나이지리아에 판매법인을 세우고 글로벌 석유화학사로 확대하겠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외에도 국내 석유화학사 중에 아프리카 진출을 염두에 둔 곳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중국 내 기초유분 시설 증대로 유럽과 아프리카 등으로 에틸렌 등 판매 방향을 다각화할 예정”이라며 “유럽은 노후화된 시설이 많고 환경규제가 심해 NCC 자체를 줄이는 경향이 있으며, 아프리카에도 관련시설 거의 없어 신시장 개척에 적합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