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

토머스 칼라일은 경제학을 두고 ‘우울한 학문(dismal science)’이라고 성격을 규정했다.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나서였다. 칼라일이 아직 살아있어서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원제 Edible Economics)’를 읽는다면 뭐라 말할까. ‘경제학은 맛있는 학문’이라고 하지는 않을까 모르겠다.

‘사다리 걷어차기’ 등 일련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폐해에 경종을 울려 온 장하준 런던대학교 교수가 새 책으로 서점가에 돌아왔다. 요즘 대세인 ‘먹방’ 컨텐츠에서 힌트를 얻은 것일까. 이번에는 음식을 소재로 경제 이야기를 풀어냈다.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가 부제다.

책에서 저자는 특유의 위트와 해박함을 발휘해 요리와 경제의 세계를 골목골목 휘젓고 다닌다. 그 길안내가 하도 현란해 약간 어지럼증을 느끼게 할 정도다.

가령 제1장은 한국의 도토리묵에 대한 소개로 시작해 도토리를 먹여 키운 돼지 고기로 만드는 스페인산 햄 하몬의 얘기와 그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을 오스만 제국이 받아들인 사연으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이슬람 문화의 그 같은 포용성이 타문화에 비해 ‘친경제적’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유교 문화가 동아시아 발전의 동력이 됐다’는 고정관념의 허구성에 대해 지적한다. 그래서 도착하게 되는 제 1장의 결론은 “개인의 경제적 행동과 국가의 경제적 성과를 결정하는 데서 문화는 정책에 비해 그 영향력이 훨씬 약하다”라는 사실이다.

요리와 경제의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는 이런 식의 여정은 1장부터 18장까지 똑같은 패턴으로 진행된다. 닭고기 이야기로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회의 평등뿐 아니라 결과의 평등까지 보장해야 함을 보여 준다. 캘리포니아의 딸기 농장과 딸기 수확 이야기에서는 이민 노동자 문제와 로봇, 인공지능 등으로 인한 일자리 불안이 기우일 뿐임을 설파한다. 밀크 초콜릿의 탄생 비화에서는 스위스가 비밀 은행이나 관광 산업으로 번영을 누린다는 편견과는 달리 제조업 강국임을 밝히면서 탈산업 사회 담론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그리고 맺는말에서는 저자가 왜 경제학과 요리를 엮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경제학의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은 다양한 요리법으로 만든 다양한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학 섭취를 더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더 균형 잡히고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는 게 그 취지다.

<머리말 마늘>

산업화가 진행되면 노조 운동도 촉진되는데 공장에서는 다수의 노동자가 한데 모여 일을 하고, 농장 같은 환경보다 다른 사람과의 협조가 훨씬 더 잘 이루어져야 작업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조 운동은 결과적으로 평등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는 중도좌파 정당을 낳는데 이런 정치세력은 공장이 사라져도 약화는 될지언정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지난 몇십년 사이 부자 나라들에서 목격된 현상이었다.

<제5장 새우>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수많은 개발도상국이 과도한 보호정책을 쓰는 바람에 국내 기업들이 태만해졌고, 시간이 흐른 후에도 보호 정책을 줄이지 않아 생산성을 향상시킬 동기부여를 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유치산업 정책을 가장 기술적으로 운용한 일본과 한국 같은 나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보호 정책을 단계적으로 줄여서 그런 위험을 피했다. -p120

<제7장 당근>

이제는 과학자가 중요한 기술적 진보를 일구어 내려면 변호사 부대가 선봉대로 나서서 특허 덤불을 헤쳐 나가며 길을 터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한때 기술 혁신의 강력한 촉매가 되었던 특허 제도가 이제는 큰 방해물이 되고 만 것이다. -p150

<제9장 바나나>

필리핀은 제조업 수출 품목의 60퍼센트가 전자제품으로 이루어진 하이테크 제품으로 전 세계 최고 수준이다.(미국 20퍼센트, 한국 35퍼센트보다 훨씬 높다) 이렇게 ‘하이테크’인데도 불구하고 필리핀의 1인당 소득은 3500달러에 불과해 미국의 6만달러는 말할 것 없고 한국의 3만달러에도 훨씬 못 미친다. 이는 필리핀에서 수출되는 대부분의 전자제품이 ‘엔클레이브’에서 ‘스크루드라이버 오퍼레이션’을 하는 다국적 기업의 자회사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192

<제11장 호밀>

많은 사회주의자들, 특히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처음에는 복지 국가에 반대했다. 그들은 복지 제도가 노동자들을 ‘매수해서’ 노동자들이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확립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여겼다. -p227

<제15장 향신료>

유한책임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가장 중요한 제도 중 하나다. 그러나 금융규제 철폐와 참을성 없는 주주들이 판치는 환경(더 기술적인 용어를 쓰면 ‘금융화 시대 age of financialization’)에서는 이 제도가 경제발전에 동력이 되기봐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유한책임제도 자체 그리고 금융규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메커니즘 등 관련 제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p299

<제16장 딸기>

제임스 베슨에 따르면 19세기 미국 섬유산업 자동화로 인해 옷감 1야드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직조 노동력의 98퍼센트가 사라졌지만, 면직물 가격이 낮아지자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실제 방적 노동자의 숫자는 4배로 늘어났다. -p311

<제17장 초콜릿>

탈산업화가 되는 주요 원인은 수요의 변화가 아니라 생산성의 변화다. 이 사실은 고용을 통해서 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다.(중략)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부자 나라레서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전체 노동 인구의 40퍼센트 정도를 차지했지만 이제는 약 10~20퍼센트의 인원만으로 비슷한 양 또는 더 많은 양의 생산이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