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남북한 화해협력의 화룡정점인 개성공단이 남북관계 악화의 역풍에 휘말리며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좌하며 햇볕정책의 산파 역할을 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을 지난 12일 ‘생명과 평화 포럼’에서 만나 남북 갈등의 배경, 개성공단의 미래 등을 질의했다.

정 전 장관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남북관계 전문가이다.

Q 남북이 다시 개성공단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만났습니다만, 전망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북한이 이번 회담과 관련해 ‘남북 접촉’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대목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날 회담도)북한의 일방적인 통보로 끝날 개연성이 크다고 봅니다.

Q 공단 철수를 결정한 업체가 등장하면서 위기감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개성공단은 남북 화해의 ‘옥동자’였는데요.
북측 담당자들은 재작년까지 남측 인사들의 체제 비판 발언을 듣고도 못들은척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 문책을 받을까 현장을 피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들 식으로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자기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Q 남북관계가 현 정부 출범 이후 불과 일 년여 만에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젠가요.
지난 2006년 히로시마에 간 적이 있습니다. 원자탄이 투하된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했는데, 전시관에 가보니 미국의 원폭 투하를 비난하면서도 정작 일본의 진주만 공습 관련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Q MB정부가 남북관계 악화의 책임을 상대방에 떠넘기고 있다는 뜻입니까.
북한의 개방을 경제협력의 조건으로 제시한 건 문제입니다. 개혁개방은 긴 과정의 결과물입니다. 긴 과정을 하나의 조건으로 설정했다는 것은 그 과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얘기밖에 더 되나요.

Q 현 정부는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문호를 개방해야 도울 수 있다는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상호주의 정신에 합당한 제안은 아닐까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비핵개방화 원칙이 뼈대입니다. 핵을 먼저 폐기하지 않으면 어떤 지원도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비핵개방화 원칙을 수용할 경우) 북한의 국민소득을 10년 뒤 3000달러 수준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반대급부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경제논리로만 따져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Q 왜 그렇습니까.
북한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현재 400달러 정도입니다. 세계 최빈국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나라가 바로 북한입니다. 단순히 복리로 계산해서 두 자릿수로 계산을 해도 10년 후 3000달러가 될 수 없어요. 북한 측은 이러한 부분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Q 북한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더 많은 반대급부를 얻어내기 위한 계산된 행동은 아닐까요.
이 대통령은 남북간 합의서가 중 기본합의서가 가장 잘돼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대통령이 이 발언으로 마치 6·15, 10·4 남북합의서를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준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남북한 지도자들이 직접 만나 체결한 합의서는 이 두 가지뿐입니다.

Q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북한도 기업인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한때 상당한 기대감을 피력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실용주의를 중시하는 기업인 출신이니 이념적인 성향에 얽매이지 않을 것으로 본 거죠.

실리를 따지는 데 익숙한 그가 국제 정세를 살펴 국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죠.

북한의 통전부장이 대선전 남한에 와서 참여정부는 물론 이명박 캠프 사람들까지 만나고 돌아갔습니다.

Q 북한에서도 대선을 전후해 남한의 정권 교체 가능성을 주시하며 물밑에서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었군요.
이 대통령 측 인사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남북관계가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그들에게) 했습니다.

하지만 인수위가 출범을 하면서 현 정부를 좀 더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쪽으로 북측이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인수위에서 나오는 얘기가 중구난방이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얘기가 저마다 달라 혼선을 부추겼습니다.

Q 남북관계가 돌어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은 아닙니까. 중국측도 비슷한 우려를 피력했다고 하죠.
지난 5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시고 중국을 방문해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지낸 탕자쉔이 주최한 만찬석상에 참석했어요.

중국관리들은 당시 북한의 대남태도가 4단계를 거치며 변화하고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북한이 기업인 출신 대통령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더니 지금은 강력한 반감을 피력한다는게 그들의 전언이었습니다.

북한의 통전부장이 대선전 남쪽에 와서 참여정부는 물론 이명박 캠프 사람들까지 만났습니다. 참여정부에서 알선을 해서 이명박 대통령과 인연이 닿는 사람들을 본 거죠. 그때 이 대통령 측 인사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남북관계가)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그들에게) 했습니다.

Q 중국 측의 이러한 분석을 과연 곧이곧대로 신뢰할 수 있을까요.
(저도) 30년간 북한을 연구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라고 하는 김정운을 본 적도 없으며 그의 후계자등극 여부를 파악하는 일도 제 능력 밖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의) 뒤통수를 보기 때문에 강약점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을 앞에서 보기 때문에 한계가 있어요.

Q 보수단체들의 대북 삐라 살포나,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나온 선제타격설 등도 대남기류를 악화시키지 않았습니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와병설이 한창일 때여서 북한 측의 반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죠. 지금은 반감의 정도를 넘어서 거의 분노를 느끼는 단계로 보고 있어요.

Q 하지만,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이른바 ‘퍼주기식 지원’에 비판적인 정서가 일각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초프가 등장하면서 중소분쟁이 뜨거워집니다. 북한은 중국에 소련카드를, 소련에는 중국카드를 제시하며 많은 것을 얻어냈습니다.

중국과 소련이 대북 지원을 하면서도 북한을 입맛대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 정도 지원을 하면서 버릇을 못 고쳤다고 하는 건 성급한 감이 있습니다.

모를 심어놓고 자라지 않는다고 뽑아버리면 죽습니다. 기다리는 것도 전략입니다.

Q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도 집권 초 비교적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습니까. 클린턴 국무장관도 북한의 후계구도를 언급 했습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금방이라도 일이 터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망원경으로 보면 다른 그림이 펼쳐집니다.

클린턴 행정부도 지난 1998년 강경한 목소리를 내더니 결국 페리 프로세스로(북측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았습니까.

오바마의 파리 발언은 부시의 발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걱정스런 대목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상을 제외한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Q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오바마 정부에 많은 조언을 하고 있는데, 한반도 정세에 별다른 변수는 되지 않을까요.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메테르니히를 전공했습니다.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상으로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죠.

중국의 합종연횡의 대가들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로 이쪽과 손잡고 저쪽을 압박하고, 다시 저쪽과 손잡고 이쪽을 압박해 나라를 보존하는 외교의 달인이었습니다.

Q 북한을 춘추전국시대 종횡가들의 방식으로 다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까.
메테르니히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위세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키신저는 배운 대로 조언을 해주지만 북한은 특이한 나라입니다. 내성이 무척 강해진 존재입니다.

Q 원론적인 질문입니다만,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이토록 집착하는 배경은 무엇일까요.
중국이 오늘날 ‘기호지세(騎虎之勢)’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미국의 문화, 물자, 투자가 들어가면서 중국은 초고속 성장의 디딤돌을 놓았습니다.

베트남도 비슷합니다. 미국이 수교를 하면서 ‘도이모이’가 속도를 낼 수 있던 겁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집권 8년 중 6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결코 굽히고 나오지 않다가 지난 2006년 핵실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부시 전 대통령은 10월9일 핵폭탄을 맞은 거예요.

Q 핵을 개발하고, 미사일을 쏘는 일련의 행동이 모두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는 뜻인가요.
북한은 1988년 신년사에서 처음으로, 통일은 누구를 먹거나 먹히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천명했습니다. 지난 1991년 신년사에서도 이 얘기를 다시 꺼냈습니다.

그 의미를 당시에는 정확히 몰랐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되돌아보니 이 사람들이 무척 다급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동구권이 무너지고 소련이 쪼개졌으며, 동독은 서독에 흡수통일되지 않았습니까.

Q 미국이 북한을 타격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미국은 전선을 동북아에 하나 더 확장할 여력이 없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경제재제의 수위도 너무 강하면 안 되는 입장이 아닌가요.

더욱이 미국 경제의 목줄을 쥐고 있는 나라가 바로 중국입니다. 군사행동은 어렵습니다.

Q 경색된 남북관계를 회복할 묘수는 없습니까. 개성공단은 어떤 식으로든 살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상대방의 정치문화를 감안해야 합니다. 이것을 외면하고서는 정치적인 돌파구가 생길 수 없습니다.

현 정부는 7·4 공동성명이후(모든 합의서의) 남북간 합의 이행 여부를 검토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지금까지 나온 남북간 합의서가 400개 정도가 됩니다. 북한에서는 속된 말로 장난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Q 진정성을 입증할 방법이 과연 있겠습니까.
짐승도 몸통이나 머리를 잡고 움직여야 움직입니다. 꼬리를 붙들고 흔들어봐야 몸통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아가서 임기 중에 남북관계의 복원발전을 바란다면 6·15공동선언, 10·4선언 존중 의지를 현 대통령이 명확히 천명해야 합니다.

Q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부시 행정부 시절 ABC(Anything But Clinton)를 떠올리게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정책이 결국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오지 못한 점이 아닌가요.
부시 대통령은 집권 8년 중 6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결코 굽히지 않다가 지난 2006년 핵실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부시 대통령은 10월9일 핵폭탄을 맞은 거예요. 이후 북한을 달래고, 테러지원국에서도 해제했죠. 하지만 그때는 해가 서산에 넘어간 뒤였습니다.

Q 자칫하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통미봉남(通美封南)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북한은 김정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을 미국과의 관계개선으로 보고 있어요.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평양을 방문할 당시를 다룬 회고록을 찾아보세요. 북한의 태도 전환이 가시화되는 시점이 오면 남측은 다시 통미봉남의 상황에 내몰릴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준비를 미리 해야 합니다.

Q 북한이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핵보유국’이 되려는 건 아닐까요. 미국 내에서도 그런 목소리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불포기론은 이데올로기적 복선이 깔린 주장입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한일 양국의 대미 군사의존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미국에 군사적으로 더욱 의존하게 되고, 미국이 사라는 무기를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거죠.

미 군산복합체, 국방부에서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