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이 제약업계에서 선두를 지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정부기관인 국립보건원(NIH)이 제약과 생명공학 분야 연구개발을 강력히 지원하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 의약품공업연합회에 따르면 미국 제약회사의 연구개발 투자 중 43%만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29%는 국립보건원으로부터 지원받는다.”

이는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부 교수가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언급한 미국이 오랫동안 지속해온 대표적인 보호무역주의 정책의 한 행태다.

최근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와 과학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국가바이오기술과 바이오제조 이니셔티브(NBBI) 등으로 미국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다. 미국 내 생산을 장려하고 외국 기업을 차별하는 보호주의 통상 정책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이유로 이 같은 보호주의 산업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의 산업 성장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을 만들고 있다.

특히 미국 상무부가 2월 28일 공개한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의 반도체 생산 보조금 신청 절차와 기준은 중국에 진출한 기업의 기술을 훔쳐간다고 비판받아온 중국 정부와 별다를 게 없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생산 지원금을 지급하는 대신 초과이익을 공유하고, 정부 관계자가 반도체 공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라는 조건 내걸었다. 기업이 정한 일정 기준을 넘어서는 수익을 내면 이익의 일부를 미국 정부에 반납하고 반도체 공장도 공개하라는 얘기다. 이익을 나누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최첨단 기술의 총아인 반도체 공장을 외부에 공개하라고 하는 건 더 이해하기 힘든 요구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미국이 추진하는 각종 보조금 정책은 지금까지 개발도상국에 강요해온 자유무역주의 기조에 어긋난다. 특정 개발도상국이 자국 산업을 위해 조금이라도 보호무역 정책을 펼치면 높은 관세와 과징금으로 무역장벽을 드높이며 타격을 가했던 미국이 자신들에게는 매우 관대한 모습으로 자국 산업을 위한 보호주의 산업 정책 강화에 적극적이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최상위 선진국인 미국은 개발도상국의 사다리와 동맹국 한국의 사다리를 손쉽게 걷어차는 반면 자신들의 사다리를 공고히 하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미국이 갈수록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는 ‘끊임 없는 경제 전쟁’의 시대로 흐르는 세계를 더욱 재촉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무역기구(WTO)는 강력한 국제무역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설립한 체재다. WTO는 세계무역 장벽을 감소시키거나 없애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국가 간 무역을 더 자유롭고 부드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보장해준다는 얘기다. 하지만 WTO 체재에서도 국제무역 질서는 여전히 선진국이자 강대국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한국처럼 더 성장해야 하는 수출 중심 국가에 냉혹한 현실인 셈이다.

이럴 때일수록 가장 애써야 하는 대상은 한국 정부다. 국가 주요 정책에 관여하는 고위 공무원들이 저마다 전문성을 갖고 매우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주 잘해야 한다. 한국의 뛰어난 기술력을 내세우며 미국과 협상을 하고, 미국 정치권에 로비도 하고, 국내 산업과 기업에 미국보다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원 정책도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벼랑 끝 전술도 펼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