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8년.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가 이탈리아의 로마냐와 롬바르디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즉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프랑스 루이12세와 신성로마제국 막시밀리안 1세 등을 끌어들여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며 전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후 1509년 프랑스 군대는 이탈리아 북부로 진입했고, 교황의 군대도 로마냐로 들어왔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복판에서 벌어진 캉브레 전투의 시작이다.

이탈리아 전역이 전쟁의 불구덩이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약소국인 만토바의 운명도 바람 앞의 등불이 됐다. 유럽을 호령하는 강국들이 전략적 요충지인 만토바를 가만히 놔둘리 없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캉브레 동맹군을 이끌며 파도바 포위군을 지휘하던 만토바 후작 프란체스코가 무방비 상태로 잠을 자다 베네치아 군대에 잡히는 어이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만토바 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다. 베네치아 군대도 문제지만 그 보다는 아군인 교황과 프랑스도 믿을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적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신은 만토바를 버린 것일까. 후작 부인 이사벨라 데스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냉정하게 목표를 세웠다. 남편의 석방과 만토바의 안전. 이를 위해 그녀는 남편을 석방시키기 위해 교황청과 프랑스 궁정, 베네치아에 연이어 사절을 보내며 때로는 읍소를 하거나 때로는 지정학적 요충지인 만토바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며 치열한 '밀고 당기기'를 시작했다. 내적으로도 별도의 전쟁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대신 귀족부터 농부까지 모든 이들이 언제든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대국들이 만토바의 운명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더 위험했다. 심지어 베네치아에 포로로 잡힌 남편은 수감 초기 의연했던 심지가 무너지며 베네치아의 통령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한편, 아내인 이사벨라 데스테가 자기를 죽이고 만토바의 영주가 되려 한다는 망상에 빠져 그녀가 보낸 심부름꾼에게 저주와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어이 만토바를 지켜냈다. 이탈리아 내부에 외부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교황의 속내를 간파해 배팅했고, 그 승부수가 기발하게 적중했기 때문이다. 복잡한 외교 서신이 여러 번 오간 후 외국의 군대는 물러났고 남편은 석방됐다. 이사벨라 데스테의 완벽한 승리다. 전 유럽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최근 국제정세가 심상치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미중 패권전쟁의 소용돌이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한 후 중국 인민해방군은 강도높은 군사훈련에 돌입했고 대만해협에는 미 항공모함이 밀려오는 중이다. 뒤이어 미국 의회 대표단이 15일(현지 시간) 차이잉원 총통과 면담하자 중국은 대규모 군용기와 전투기 편대를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에 투입시키기도 했다.

그 사이에 낀 한국은 갈피를 못잡고 있다. 일찌감치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가입하며 미국의 손을 잡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한 후 한국에 온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을 만나지 않는 등 혼란이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백년대계'가 아닌 즉흥적 의사결정에 따른 상황판단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당장 닥쳐오는 상황에만 몰두해 핵심 메시지를 내놓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방한 당시 대통령실을 중심으로 전혀 다른 메시지가 나오는 장면과, 최근 미국 중심의 반도체 동맹인 칩4 가입을 두고 정제되지 않은 전략들이 마구잡이로 노출되는 것이 심상치않은 이유다.

현상을 면밀히 분석하고 냉정한 답안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때로는 감정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흔들린다. 이러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국민들만 고통받을 뿐이다.

격동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불꽃처럼 걸었던 이사벨라 데스테는 결국 만토바를 지켜냈다. 비현실적인 꿈에 매몰되지 않으며 생존을 위해 끈질기게 싸웠던 이 과감한 여걸의 스튜디올로(서재)에는 다음과 같은 좌우명이 적혀있다고 한다.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