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지음, 김명주 옮김, 부키 펴냄.

저자 美 시카고대 생명과학과 닐 슈빈(Neil Shubin) 교수는 생명의 40억 년 진화 역사를 훑는다.

그는 동물의 단단한 몸, 물고기의 지느러미, 새의 깃털과 날개, 인간의 손발과 커다란 뇌를 사례로 들며 “오랜 진화의 결과물이지만, 혁신적 발명품이 아니라 수십억 년에 걸쳐 베끼고 훔치고 변형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깃털이 동물의 비행을 돕기 위해 생겼다거나 폐와 다리가 동물들이 육지에서 걷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들은 완전히 틀렸다며 반론을 편다.

◇ 멍게는 우리의 조상?

지렁이는 배아나 성체 어느 쪽에도 아가미 구멍이나 연골 막대가 없다. 곤충 조개 불가사리 그 밖에도 등뼈가 없는 대부분의 동물이 마찬가지다.

반면 알에서 부화한 멍게의 유생은 척추동물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멍게 유생은 등을 따라 신경삭이 지나가고, 막대 모양의 결합 조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뻗어있다. 머리 밑 부분에는 아가미 구멍까지 있다.

저자는 멍게와 비슷한 동물이 발생을 일찍 멈추고 유생 단계의 특징을 동결한 상태에서 그대로 성숙하면서 척추동물의 조상이 생겨났을 것으로 본다. 한마디로, 멍게 유생이 모든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의 어머니일 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표절과 도용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몸

인간의 큰 뇌는 다른 동물과 차별되는 대표적 형질이다. 우리의 뇌가 어떻게 이렇게 커질 수 있었을까?

2018년 美 캘리포니아大 생물정보학자 데이비드 하우슬러 박사 연구팀이 인간만이 갖고 있는 ‘NOTCH2NL’ 유전자를 발견했다.

이 유전자는 대뇌피질의 신경 줄기세포가 신경세포 배아로 전환되는 것을 늦춰 결과적으로 두뇌 발달과정에서 더 많은 신경세포를 만들어 낸다.

이 유전자 덕분에 인지, 기억, 언어, 의식 등 고차원적인 정신 기능을 담당하는 대뇌피질은 초기 인류에선 0.5ℓ에 불과했지만 이후 1.4ℓ로 커졌다.

‘NOTCH2NL’ 유전자는 ‘NOTCH’ 유전자의 복사본이었다. 즉, ‘NOTCH’ 유전자가 끊임없이 복사되고 중복되는 과정에서 변이가 일어나 새로운 기능이 하나 둘 늘어났는데, 그중 하나가 ‘NOTCH2NL’ 유전자였다.

이처럼 동물의 몸과 유전자에는 복사본들이 가득하다. 갈비뼈, 척추뼈, 팔다리뼈 등 인간을 비롯해 많은 동물의 골격은 전반적인 설계가 비슷하다. 이는 여러 동물의 각기 다른 사지 골격이 태고의 골격 배열을 베끼고 변주해 각각 생겨났기 때문이다.

시각, 후각, 호흡, 단백질 생성 등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유전자들도 모두 복제된 것들이다. 나아가 인간의 전체 게놈 중 3분의 2 이상이 이렇게 복제된 사본이다. 뼈든 기관이든 유전자든 베끼고 복사할 수 있다면 굳이 새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바이러스, 인간 게놈에 패배 후 기억 향상 역할 맡아

유타大 과학자 제이슨 셰퍼드는 우리 뇌에서 기억과 학습에 영향을 미치는 ‘아크 유전자’의 단백질을 분석했다. 연구 결과, 아크 단백질이 에이즈 등 바이러스들의 단백질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이러스는 숙주를 감염시켜 자신의 사본을 무한히 만들어 증식해 나간다. 그런데 어쩌다가 바이러스가 감염 능력을 잃고 인간 게놈의 일부가 되어 기억 향상이라는 역할을 맡게 되었을까?

과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약 3억 7500만 년 전, 모든 육지 생물의 공통 조상이 고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숙주의 게놈 안에서 아크 단백질의 한 버전을 만들었다.

게놈과의 전쟁에서 패한 바이러스가 게놈의 일부가 된 것이다.

우리 게놈에는 과거에 감염되었던 바이러스들의 흔적이 많다. 우리 게놈의 약 8%가 불활성화된 바이러스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을 정도다. 이들 중 일부는 여전히 기능을 유지하며 숙주의 활동을 돕고 있다.

◇“세포들도 체내에서 인수 합병한다”

세포의 핵 주위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을 세포소기관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세포소기관인 동물 세포의 미토콘드리아, 식물 세포의 엽록체는 세포에 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1960년대, 과학자 린 마굴리스는 핵과 세포소기관의 게놈을 비교하여 둘은 유전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유전적으로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세포와 세포소기관이 어떻게 한 몸이 되었을까?

마굴리스는 오래전, 원래 자유 생활을 하던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다른 세포에 병합되어 결국 그 세포를 위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일꾼이 되었다는 가설을 발표했다.

마굴리스의 가설은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다양한 연구를 통해, 서로 다른 개체들이 합쳐지고 조립되어 더 크고 복잡한 개체를 이루는 방법은 진화의 강력한 수단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깃털, 하늘 날기 위한 용도 아니었다”

1960년대, 예일大 과학자 존 오스트롬은 두 발로 걷는 ‘이족 보행’ 공룡과 하늘을 나는 조류의 여러 형질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속이 비어 가볍지만 튼튼한 뼈, 날개 돋친 팔, 경첩 같은 관절, 강한 근육, 빠른 성장 속도 등으로 미뤄볼 때 공룡은 충분히 새의 조상이라 할 만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학설은 무시당했다. 하늘을 날려면 깃털이 필수인데, 공룡에게는 깃털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30여 년이 지난 1997년, 중국에서 깃털로 뒤덮인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날지 못하는 공룡에게서 깃털의 존재가 확인되자 깃털 용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제서야 과학자들은 깃털이 이성에게 과시하기 위한 장식용 또는 체온 보호를 위한 단열재 역할을 했고, 본격적으로 비행이 시작되면서 그 용도가 변경된 것으로 보았다.

동물의 폐와 팔다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먼 조상이었던 원시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기 전부터 팔 다리로 변할 뼈를 가지고 있었다. 원시 물고기는 폐를 가지고 있어서 공기 호흡을 병행했다.

이처럼 자연의 수많은 발명이 용도 변경(기능의 변화)과 재활용을 통해 완성됐다.

책에는 작가 헤밍웨이가 다지증 고양이를 키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고양이 앞발에는 발가락이 다섯 개가 있다. 하지만 뱃사람들은 발가락 여섯 개인 고양이를 즐겨 키웠다. ‘벙어리 장갑 고양이’라 불리는 다지증 고양이들은 넓적한 앞 발 덕분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균형을 잘 잡아 쥐잡이의 명수로 선원들의 사랑을 받았다.

선장 스탠리 덱스터는 1935년 자기 배에서 키우던 여섯 발가락 고양이 ‘스노볼(Snowball )’을 보고 헤밍웨이가 감탄하자 얼마 뒤 스노볼의 새끼 한 마리를 선물했다.

사냥과 낚시, 권투를 즐겼던 '마초' 작가 헤밍웨이는 여섯 발가락을 가진 암컷 새끼 고양이에게 ‘백설 공주’(Snow White)’라고 이름 붙여주고는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백설 공주가 헤밍웨이가 거주하던 플로리다주 키웨스트 섬에서 번식을 거듭하자 관리인을 따로 두고 상당한 지출을 했다고 한다.

백설공주는 여섯 발가락 고양이 혈통을 탄생시켰다. 지금도 키웨스트 섬의 헤밍웨이 생가와 박물관에는 고양이 60여 마리가 지내는데 그중 절반이 여섯 발가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