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 폴 크루그먼 지음, 김진원 옮김, 부키 펴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美 뉴욕시립대 경제학부 교수가 썼다. 새 밀레니엄 첫 20여 년간 전세계가 경험했던 정책 실험 및 그에 관련된 논쟁들을 추려 비평하고 있다.

저자가 핫 이슈가 있을 때마다 썼던 블로그 글과 뉴욕타임스 등 언론사 기고문들을 한데 모은 탓인지, 일반 저술과는 달리 논조가 신랄하고 표현이 거칠다. 국가부채나 감세정책 등 여러 대목에서 논리전개가 일방적이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어떤 주제를 만나든지 항상 딱 부러지게 자기 신념과 철학을 펼치는 스타일인데다 워낙 글을 잘 쓰기에 분량이 두껍고 전문용어가 속출해도 잘 읽히는 편이다.

◇  “좀비 정책 무덤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집필 목적”

저자에 따르면, 21세기 들어 지구촌의 통합도가 한층 높아져 각국은 엇비슷한 현안들과 맞닥뜨렸다.

성장과 분배, 감세와 증세, 국가부채의 증대와 감소, 사회 복지의 확대와 축소, 기후 위기를 비롯한 환경 문제, 원전이냐 탈원전이냐, 일자리 창출과 실업 문제, 이민 정책, 자유무역과 보호주의, 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과 방임 등이 그것이다.

각국 정부는 지난 20여 년간 저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양자택일을 하든, 정책혼합을 하든 현안 해결을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펼쳐왔다. 이제 그런 정책들의 성패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시점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저자의 눈길을 끈 것은 정책들의 성공 여부가 아니었다. ‘그 이후’였다. 진작에 실패한 것으로 판단되어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어야 할 정책과 아이디어들이 ‘좀비(zombie)’처럼 귀환하여 득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릇된 정책이 계속 되살아나는 데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과도한 정치화, 정략적 당파주의가 객관과 과학이 가리키는 증거를 무시하고 합리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1차 원인이다.

하지만 근본을 파고 들어가면 이러한 현실의 배후에는 부정직한 의도, 나쁜 신념이 똬리를 틀고 있다.

저자는 “좀비 아이디어는 반증(反證)에 의해 이미 쇠멸되었어야 하는데 여전히 비척비척 걸어 다니며 사람들의 뇌를 파먹고 있다.”며 “좀비 정책과 사상을 밝혀내어 이들을 무덤 속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집필의 주요한 목적”이라고 밝힌다.

◇ 폴 크루그먼 “감세, 실패 거듭한 좀비 정책”

기업과 개인소득에 물리는 세율을 낮추는 감세(減稅)은 사실상 부유층을 위한 ‘부자 감세’라고 불러야 한다.

우파에 따르면, 부유층이 열심히 일하게끔 유인하기 위해 부유층 세금을 낮추고, 기업이 미국에 투자하게끔 유인하기 위해 기업의 세금을 인하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보수주의의 경제 신조는 실제로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감세 정책은 호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반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증세 정책은 불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캔자스주의 감세 정책은 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지 못했다. 반면 캘리포니아주의 증세 정책은 성장을 늦추지 않았다.

부자감세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불러오는 한 원인이기도 했다. 소득 상위층의 유동성 증가가 투자 증진보다는 머니 게임과 금융 투기의 확대를 야기하여 결국 금융 위기가 초래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국 공화당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보수 정당은 감세를 성장을 위한 전가의 보도(傳家의 寶刀)라도 되는 양 애지중지하고 있다.

◇기술 격차 좀비, 노동자 곤경을 자기 탓으로 여기게 해

‘기후 변화 부정 좀비’는 바퀴벌레 좀비라고도 한다. 다 없애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선가 또 튀어나오곤 한다. 기후 변화 부정론자는 다음과 같은 3단계 선전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기후 변화는 거짓말이다. / 기후 변화는 일어나고 있지만 인간이 일으키지 않는다. / 기후 변화는 인간이 일으키지만 어떤 조치든 취하면 일자리를 없애고 경제 성장을 망친다.”

경제 불평등을 부정하는 ‘불평등은 없다 좀비’도 있지만, 불평등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4차산업혁명과 기술 발전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기술격차 좀비’도 있다.

특히 미국이 심각한 ‘기술 격차’에 시달리고 있다는 믿음은 중요 인사들이 사실임에 틀림없다고 여기는 여러 신조의 하나다.

기술 격차 좀비는 노동자들이 자신이 겪는 곤경을 자기 탓으로 받아들이게끔 함으로써, 고용과 임금이 정체를 면치 못하는 상황임에도 수익과 특별 배당금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치솟는 현실로부터 딴데로 주의를 돌리게 한다.

그 때문에 기업 경영진이 유독 기술 격차 신화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동자를 벌주는 경제 편에 서서 변명을 늘어놓는 일을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 ‘긴축 좀비’ 경기회복에 도움 안돼

“미래 세대에게서 그만 훔쳐라” 같은 구호를 내세워 자못 진지하고 점잖은 척하지만 사실상 저소득층 지원을 줄이고 실업률을 방치하면서 경기 회복에는 아무런 순기능도 하지 못하는 ‘긴축 좀비’가 있다.

국가 부채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진 빚돈인 만큼 이로 인해 경제가 "곧바로" 더 가난해지지 않는다.

사실, 부채는 금융 안정성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 하지만 부채를 줄이려는 노력으로 경제가 디플레이션을 겪고 불황의 나락에 빠진다면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다음은 2010년대 유럽 국가부채위기에 대한 내용) 유럽의 지도자들은 지출을 대폭 늘리면, 곧 국가를 흥청망청하게 운영하면 경제 위기가 닥친다는 견해를 철저하게 고수했다.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의 지론처럼 앞으로 나아가려면 절약만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런 처방전은 “슬로모션처럼 닥치는 재앙”에나 유효했다.

유럽 채무국가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요구된 긴축은 잔인하리만치 혹독했다. 한편, 독일과 여러 주요 경제 국가는 지출을 늘려 주변국에서 실시한 긴축 재정을 상쇄해야 했는데도 그들 국가 역시 지출을 줄이려고 애썼다.

그 결과, 부채 비율을 줄이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실질 성장이 거북이걸음처럼 느려졌고, 인플레이션이 거의 제로(0) 수준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