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말 경에 코로나 이후 삶에 대한 준비라는 말이 한참 얘기되었습니다.

확진자수가 눈에 띄게 줄어 자연스레 그런 희망을 갖게 된 거고, 나 또한 달라져야 할 것이 무엇일까를 궁리해보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정점이 어딘지 모르게 확진자수가 급격히 늘어나 지금처럼 국민 다섯 명 중 한명이 코로나에 걸리는 상황이 되니 코로나 이후의 삶 준비라는 얘기는 먼 나라 얘기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환자가 다섯 명 중 한 명이라는 지금의 통계상 수치보다 더 엄혹한 현실이 가까이 와 있습니다. 줌으로 매주 만나는 여섯 명의 모임 중에 코로나에 걸렸다가 이제 막 격리 해제되고 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분이 있는가 하면, 지금 판정받아 격리중이라며 많이 미안해하하며 화면에 나온 분에, 아들이 코로나에 걸렸는데 증세는 없지만 밀접접촉자로 조심중이라고 전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한 대상자들도 점차 돌도 안 된 영아부터 초등생, 중고생, 직장인, 칠십 넘은 어르신들까지 다양하게 퍼져 있으니, 놈이 아주 가까이에 와있다는 느낌이 절로 듭니다. 이런 지경이니 공포보다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마음에 덜 상채기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구책 아닌 자구책이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이러는 와중에 계절은 무심하게도 3월말로 쑥 들어와 동백이나 매화가 한창 피었고, 진정한 봄꽃의 시작이라는 산수유도 피어나고 있습니다. 계절의 순환이 이처럼 거침없이 오는 걸 보면서 코로나 이후의 삶이라는 것도 내가 대비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불쑥 오는 것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며 무어 그리 크게 바라는 것도 아닌 일상의 회복이라는 것이 이같이 어려운 것인가 하는 짜증도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코로나가 극성이어서 거리두기가 한참 얘기될 때, 지하철이든, 공공장소 등에 거리두기를 강조하느라 고슴도치가 많이 등장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춥다고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를 찔러 서로 상처받는 고슴도치의 사정은 거리두기를 이르는 거였겠지요. 고슴도치에 물어보지는 않었을 테니까 그 의도에 고슴도치가 동의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죠.

고슴도치의 쓸쓸한 얘기를 생각하며 지금의 생활과 코로나 이후의 삶이 정말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출구를 못 찾은 상태였다고 할까요. 그 어간에 친구들과 양구를 다녀왔습니다.

나목(裸木)을 즐겨 그렸던 화가 박수근 미술관을 들렀습니다. 추위를 지겹게도 싫어했던 작가가 왜 헐벗은 나목을 즐겨 그렸을까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잎이 하나 없는 나무이지만 봄이 온다는 희망을 온 몸으로 붙들고 있는 겨울의 나무라서 그러지 않았겠느냐는 해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감동이 밀려오고, 내 혼란에 단서가 떠올랐습니다..

추운 나무와 따듯한 봄이라는 극과 극이 통하는 것보다는 절실하게 바라면 궁극적으로 얻게 된다는 얘기로 읽혀졌습니다. 나이 들어가는 어르신들이 웬만한 병이 걸려도 그것과 친병(親病)하며 살아간다는 말.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견디고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겠지요. 코로나 와중이건 또 이후이건 뭐 그리 특별하게 다를지, 뭐 거기에 그리 노심초사할지 그게 생각되어졌습니다. 시각 장애로 고통 받았던 헬레 켈레도 한마디 위로를 전합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있지만 한편 그것을 이겨내는 일로도 가득하다'

하루 한 페이지 마음 챙김을 권하는 정신과 의사가 한마디를 더 합니다.

'나는 두려움보다 더 크다'

그러려니 정말 헛된 두려움보다 휠씬 더 큰 봄날이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와있습니다. 봄 햇살이 유난히 따듯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