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K-게임 사랑이 업계의 화제다. 다만 그 이면에 깔린 사우디의 정교한 선견지명을 단순한 오일머니의 공습으로만 보기에는 아쉬운 구석이 많다.

빈 살만 왕세자 및 아람코, 나아가 사우디 비전 2030과 비전펀드는 물론 데저트밸리를 완성하기 위한 큰 그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비전과 균형을 동시에 추구하는 장면이 이색적이다.

K-게임에 빠지다
11일 업계 취재 결과 사우디 국부펀드 '퍼블릭인베스트먼트펀드'(PIF)는 올해 들어 엔씨소프트와 넥슨 주식을 장내에서 지속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당장 엔씨의 주식 109만2,891주를 처음 취득한 것을 시작으로 2월 16일까지 총 13차례에 걸쳐 1조원 넘게 빨아들였다. PIF가 보유한 엔씨 주식은 총 203만2,411주(지분율 9.26%)이며 넷마블(8.9%), 국민연금(8.4%)을 넘어섰다.

넥슨도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지난 2월 4일 넥슨 주식 1조578억원을 취득한 후 2,509억 원 상당을 더 매수해 총 지분율은 7.09%가 됐다. PIF가 일본마스터트러스트신탁은행(8.1%)에 이어 4대 주주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이다.

PIF는 단순 투자라는 설명이지만 그 속도와 규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당장 '새비 게이밍 그룹(Savvy Gaming Group)'을 출범시킨 후 게임 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일본 SNK의 최대 주주에 올랐으며 마이크로소프트가 인수하는 미국의 액티비전 블리자드, 나아가 일렉트로닉아츠(EA), 테이크 투 인터랙티브 등에도 투자하고 있다. 일본의 캡콤(Capcom) 지분(5.05%)도 확보했다.

디지털 콘텐츠 시장의 규모를 기존 대비 세 배 이상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 '이그나이트(Ignite)'를 시작하며 시장의 게임 체인저를 노리고 있다는 평가다.

사우디가 주목한 K-게임의 저력을 감안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행보라는 분석이다. 상반기 1억달러를 IP에 투자하고 코빗과 비트스탬프 등 암호화폐 거래소를 보유한 넥슨, NFT를 리니지W에 덧대려는 엔씨의 전략은 사우디가 관심을 갖기에 충분한 매력 포인트기 때문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21년 국내 게임 시장 규모가 2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K-게임의 무서운 잠재력과 사우디의 오일머니가 만나는 순간이다.

오일머니는 거들뿐
최근 UAE의 증산 가능성 시사와 전략비축유 방출 등으로 국제유가가 급격히 낮아지고 있으나 큰 틀에서 보면 상승세다. 팬데믹 이후 공급망 교란 및 각 지역의 산업 발전이 시작되는 한편 우크라이나 사태가 터지며 국제유가 상승세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오일머니 파워가 강해지고 있다. 실제로 PIF는 K-게임에 대한 투자를 넘어 스포츠 분야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세계 최대 프로축구 리그인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팀인 뉴캐슬이 PIF의 지원을 받으며 최근 승승장구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막대한 투자가 이어졌으며 그 결과 뉴캐슬은 27일 오전 0시(한국시간) 영국 런던에 위치한 브렌트포드 커뮤니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1-22시즌 EPL 27라운드에서 브렌트포드에 2-0으로 승리, 최근 7경기 4승 3무로 질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공공의 적이 된 러시아의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첼시 매각 수순을 밟는 것과 대비된다.

재미있는 대목은 오일머니의 방향성이다.

최근 PIF의 행보를 두고 "국제유가 상승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강력해진 오일머니가 전 세계의 다양한 영역으로 파고드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단편적인 해석이다. 오일머니의 방향성은 당장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큰 그림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오일머니는 거들뿐'이다.

사우디의 개혁
1937년 Prosperity Well 이라고 명명된 담맘 7호정에서 상업적 석유 생산이 시작되면서 사우디와 아람코의 역사가 시작됐다. 1950년에는 세계 최장 송유관인 1,212km의 아라비아 횡단 송유관 (탭라인)을 완공했으며 1958년 아람코의 원유 생산량이 연 1백만 배럴을 돌파했다.

1980년 사우디 정부는 아람코 지분 100%를 사들였고 2000년에는 다란에 최첨단 연구개발 센터 (R&DC)가 들어서며 강력한 오일파워의 역사가 반석에 올랐다.

2010년대 들어서며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석유 개발 이후 세대인 친IT 세대의 등장으로 탈전통가치, 탈민족주의, 탈종파주의가 강해지며 이는 지금까지 대규모 복지정책과 온정주의 구호로 유지된 사우디의 개혁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고유가 시대지만, 셰일가스와 팬데믹 등으로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오일머니의 불확실성도 개혁 필요성의 조건 중 하나였다. 여기에 아랍의 봄이라는 지정학적 정치파동이 겹치며 사우디는 새로운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 개혁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탈'오일머니 전략이다. 오일머니를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비중을 낮추며 미래지향적인 전략을 세우겠다는 뜻이다.

중심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있다. 2017년 아버지 살만 국왕이 제1왕세자 겸 내무장관인 조카 무함마드 빈 나예프를 폐하자 순식간에 실권을 잡은 그는 대이란 강경책을 유지하면서 파격적인 개방개혁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함께 비전펀드를 설립하는 한편 2016년 4월 25일 비전 2030을 전격 발표하며 사우디의 변신을 주도했다.

2017년 2월 아랍 가수 압도(Muhammad Abdo)의 공연을 시작으로 여성의 운전허용 및 종교경찰의 권한을 축소하는 등 사우디의 전방위적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 변화의 스펙트럼은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이를 위해 오일머니의 강력한 존재감을 무기로 삼아 한 단계 성장한 데저트밸리의 꿈을 꾸고 있다. UAM이 날아다니는 미래 과학 도시 ‘네옴’에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

일부 회의적인 시각도 있으나 네옴은 사우디의 생명공학, 로봇 연구 산업, 신재생에너지 산업을 주도할 것으로 보이며 최근에는 내부를 탄소제로 꾸미는 생태지구 건설 프로젝트를 추가로 발표했다. 양국은 지난 1월 정부 간 문건 2건을 비록해 기본여신약정 주요조건합의서 등 9건의 문건 등 총 11건의 문건을 체결하며 네옴을 통한 경제협력에도 나선 바 있다.

당연히 아람코도 단순한 오일머니의 수단이 아니라 ICT 기술개발을 통한 디지털 월드로의 사우디를 창출하는 것에 집중하는 중이다. 2018년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은 아람코와 협력해 ICT 전략을 키울 것이라 발표하기도 했다.

아람코의 하위야 가스 플랜트는 탄소 포집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 출처=아람코
아람코의 하위야 가스 플랜트는 탄소 포집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 출처=아람코

선견지명, 집중하라
사우디의 PIF가 K-게임에 집중하는 것은 K-게임의 성장성에 주목했기 때문이지만, 더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틀 위에서 보면 사우디의 체질개선을 위한 전략적 목표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당장의 강력한 무기인 오일머니를 가지고 있음에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공격적으로 추구하는 그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여러가지 이유로 몇몇 목표는 달성되지 못하거나, 혹은 국제정치의 틀 아래에서 방향선회도 이어지고 있으나 빈 살만 왕세자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백년대계를 그리는 사우디의 행보는 새로운 리더십을 맞이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부 액션플랜에서 파격과 균형을 교묘하게 유지하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아람코의 경우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신·재생 에너지 등을 통해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는 것이 핵심인 '비전 2030'의 아래에서 수소에 집중, 블루 암모니아 수출과 그린 암모니아 생산 체제 구축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2025년부터 태양광과 풍력으로 생산하는 4기가와트(GW) 규모의 전력으로 하루 650톤의 그린 수소를 양산한다는 큰 그림도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현대자동차와 효성 등 많은 국내 기업과도 협력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람코가 오일머니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사우디의 수소·암모니아 사업은 어디까지나 석유 사업과 병행하는 차원이며 그 중심에서 일종의 균형을 잡는 것으로 보인다.

오일머니를 통해 백년대계를 그리고 그 아래에서 ICT 및 수소, 암모니아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데저트밸리로 향하는 개혁을 이끌어내지만 그 속도에 있어 기존의 강점을 극대화시키는 영악한 투트랙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