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며 국제정세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세 방향으로 압박하는 러시아 군대의 진격에 수도 키예프는 점령 직전으로 몰렸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 등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를 위시한 서방은 허를 찔렸다. 강력한 경제제재 카드를 시사하며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으나 한 번 기세를 탄 러시아 군대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푸틴 대통령의 야망이 전 세계를 강타한 가운데 글로벌 경제도 폭풍속으로 내밀리는 분위기다.

앞으로의 흐름은 어떻게 전개될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전장의 안개가 불확실성을 키우는 가운데 우크라이나는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이 처한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역사에, 답이 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서기 476년 서로마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아우구스툴루스가 고트족 군장인 오도아케르에게 황위를 넘기는 순간 제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동로마는 건재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및 바실리우스 2세의 치세를 거치며 한 때 로마 제국의 영토를 상당부분 회복하는 등 찬란한 제국의 깃발을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제국의 균열은 동쪽에서 시작됐다. 돌궐과 몽골의 등장으로 중앙아시아의 세력판도가 흔들리는 과정에서 아나톨리아 동부의 군장(베이)에 불과하던 오스만 제국이 급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이 그렇듯이 성장의 바람에 올라탄 오스만은 승승장구였다.

여세를 몰아 군주 오르한은 1326년 브루사를 함락하며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을 일소하는데 성공했다. 십자군 원정까지 실패하며 동로마 제국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인근만 지배하는 지역 군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메메트 2세가 145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등극했다.

그는 부침이 많은 인물이다. 티무르의 파상공세에 밀려 오스만 제국이 파탄에 가까운 피해를 본 상태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 차례 술탄에 올랐으나 내부암투에 밀려 지방으로 쫒겨나는 등 어려운 시기를 자주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메메트 2세가 정식으로 술탄의 지위에 오르자 많은 기독교 국가들은 그가 무리한 팽창보다는 내부안정을 꾀할 것으로 봤다.

동로마 제국의 본산이자 유럽 문명의 산실인 콘스탄티노플을 노릴 것이라고는 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간혹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 인근에서 공방전을 치르기는 했으나 메메트 2세가 산송장이나 다름없던 오래된 도시를 본격적으로 탐내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의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대로 당시 언론이 존재해 기독교 세계 국가들의 주요 인물들을 인터뷰했다면 다들 "글쎄요, 아마 지금과 같은 상황이 당분간 이어지지 않을까요"라고 답했을 것이다.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은 자유무역항으로 활동하며 오스만 제국의 경제적 이득에도 큰 도움이 됐다. 이성적으로 보면 메메트 2세가 바보같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메메트 2세는 파격의 인물이었다. 그는 당장의 이윤보다는 유럽 전체를 이슬람의 집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종교적 열정으로 뭉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장의 판단은 지극히 이성적이라 '신사' '법의 군주'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그의 본질은 종교적 열정으로 가득찬 이상가였다.

그는 어느날 밤 선대 술탄을 모셨던 명재상이자 선생이던 할릴 파샤의 집을 찾아갔다. 깜짝 놀란 할릴 파샤는 집에 모아둔 금은보화를 바친 후 메메트 2세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메메트 2세가 무슨 뜻이냐 묻자 할릴 파샤는 "주군이 신하의 집을 찾아올 때 신하는 모든 것을 바치는 법"이라 말했다. 잠시 뜸을 들인 메메트 2세는 말했다. "그 도시를 원한다" 젊은 술탄의 앞에 머리를 조아린 노재상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던 지난날의 평화가 산산히 부숴지는 소리를 들었다.

메메트 2세는 우르반 거포로 불리는, 당시로서는 하이테크 병기를 대동한 체 대군을 이끌고 친위군인 예니체리를 진두지휘해 콘스탄티노플을 순식간에 포위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승기는 이미 넘어갔다. 콘스탄티노플은 용병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시를 중심으로 필사적으로 버텼으나 1453년 5월 29일 결국 함락됐다.

도시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129대 황제 콘스탄티노스11세가 검을 들고 오스만 제국군에 뛰어들어 사라진 순간 2,200년을 이어온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메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겼고, 동로마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던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의 율법을 전파하는 아야 소피아가 되어 십자가 대신 반달 문양의 깃발을 내걸었다. 도시는 이스탄불이 되어 지금은 오스만 제국의 후신인 터키의 수도가 됐다.

푸틴, 메메트 2세 되려는가
메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당시 이미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지위에서 내려온 상태였다. 언제든 함락될 수 있는 위기상황이었으나 문제는 내성이다. 휴전국가인 한국이 지금은 전쟁의 위기를 크게 느끼지 않는 것처럼 위기상황도 장기화되면 일상이 된다. 콘스탄티노플은 상시 위기상황이 곧 평시상황인 셈이었다. 그리고 허를 찔렸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냉전을 거쳐 구 소련이 몰락한 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 야욕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상시 위기상황이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며 위기가 곧 평시가 됐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전격적으로 병합했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으나 미국은 물론 나토 등 유럽은 사태를 안일하게 판단했다. 올해 초 러시아가 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공급량을 줄이고 조금씩 국경지대로 군대를 이동시켰을 때도 미국과 유럽은 '설마 푸틴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는 전쟁을 택하겠는가'라고 판단했다.

러시아 군대가 돈바스 지역의 친러 반군의 독립을 인정하고 군대를 이동시키던 때도 마찬가지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지배하려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면서도 군대를 돈바스 너머의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배치했다. 이번 사태가 러시아의 돈바스 병합 수순으로 끝날 것이라 낙관했던 미국과 유럽은 재차 허를 찔리고 말았다. 25일 현재 러시아 군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인근까지 진격한 상태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당시 기독교 국가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미국 및 유럽도 우크라이나를 사실상 버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로마 제국이 조금씩 이슬람의 깃발 아래 잠식되고 아나톨리아 지방의 패권을 상실했을 당시 서유럽에서는 십자군이 도착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기에 바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사상자가 치솟고 있으나 미국과 유럽은 전격적인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지리멸렬하다.

메메트 2세와 푸틴의 교집합도 있다. 이 두 절대'군주'는 당장의 피해보다 자신의 큰 꿈을 위해 모든 것을 배팅한다는 점에서 궤를 함께하기 때문이다. 메메트 2세가 자유무역항인 콘스탄티노플의 존재로 막대한 이득을 얻음에도 이슬람의 집 확장을 위해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전투를 일으킨 것처럼, 푸틴 대통령도 서방의 경제제재를 무시하고 오로지 위대한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위해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전쟁을 일으켰다.

푸틴의 사고방식을 비교적 잘 아는 것으로 알려진 주(駐)러시아 미국대사 출신 마이클 맥폴은 지난 22일(현지시간) CNBC를 통해 "푸틴은 다음주 러시아 주식시장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않고 제재로 피해를 볼 올리가르히(신흥재벌)들도 상관하지 않는다"면서 "그가 상관하는 건 30∼40년 뒤 역사책에 그가 어떻게 기술될 것인지다"고 말했다.

"유리구슬 던지기"는 끝났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조금씩 서유럽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자연스럽게 무역입국을 내세운 해군강국 베네치아 공화국과 충돌하는 일이 많아졌다.

상황은 콘스탄티노플 공방전과 비슷했다. 술탄의 말 한 마디면 베네치아 전체 인구와 비슷한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끝까지 이성적으로 접근하려 노력했다. 동서무역의 연결을 담당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존재가 오스만 제국의 부를 키워줄 것이라는 점을 어필하며 때로는 군사작전을, 때로는 유화정책을 펴며 신중한 게임을 해 나갔다.

그 아슬아슬한 유리구슬 던지기 놀이는, 상대방이 들고있던 유리구슬을 바닥에 던져버리며 파탄나고 말았다. 1645년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 대사에게 왕궁 출입을 금지하는 한편 전격적으로 크레타섬을 침공했다. 하니아 포위전, 칸디아 공방전을 거치며 베네치아 공화국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1669년 오스만 제국기가 크레타섬에 휘날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에도 일부 반면교사가 되어준다.

미중 패권전쟁을 거치며 각 국이 글로벌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편성하는 등 협업의 시태가 파탄난 상태에서, 이제 국제정세는 정치경제학의 일반적인 이론이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당장의 피해를 감수하고 장기적 관점에서도 필요한 협력을 간단하게 무시하는 시대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서방의 강력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예정된 로드맵대로 우크라이나 전역을 공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역사의 퇴보다. 국제유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원자재 가격은 폭등하며 인플레이션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각 국의 증시는 바닥을 치고 있으며 팬데믹 이후 벌어질 엔데믹은 불확실성의 연속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있다. 피와 눈물이 흐르는 야만의 시대며 2차 세계대전 체제의 붕괴다. 지금까지 관성으로만 수립했던 모든 플랜들을 다시 재점검할 순간이라는 뜻이다. 상시 위기상황이 평시상황이 되는 순간 균열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