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부터였을까. 아버지는 내가 뭔가를 골똘히 한다 싶으면, 곁에 다가와서 이런 말로 슬며시 김을 빼셨다. “승준아, 인생 별 거 없데이. 앙앙불락 하지 말 거레이.”

자식이 용을 써가며 뭔가를 한다 싶으면 격려와 응원부터 해줄 일이건만, 아버지는 거창한 이상과 포부를 좇느라 ‘일상의 행복’이 망가지면 어쩌나 걱정부터 앞세우셨다.

‘사는 게 그래봤자 다 거기서 거기’라는 달관에는 어머니도 합심해서 한 목소리를 내셨다.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안 돼 손해를 보거나 하면, 어머니는 애꿎은 연탄집게를 바닥에 툭툭 내려치시면서 “부자라고 하루 세 끼 먹을 거, 네 끼 다섯 끼 먹나?”하는 혼잣말로 성난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셨다.

그러고 보면 ‘허무주의’란 꽤 유용한 통찰력이다. 그것은 잔뜩 열이 올라 풍선처럼 과장되었던 감정을 이성의 바늘로 콕 찔러 맥 빠지게 만든다.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감정의 열기는, 일순 차분하고 조용하게 가라앉는다. 큰 것은 작게, 작은 것은 크게 보여 어룽대던 시야 또한 차갑도록 선명하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요즘 항간에 “~하면 뭐하겠노? 소고기 사묵겠지~”하는 유행어가 인기다. 나는 TV에서 그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내 아버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오버랩 되어 비죽이 웃음이 새나온다. 그 시골 어르신의 말에 따르면, 바라던 대학에 합격해 봤자, 대기업에 떡하니 취직을 해봤자, 짝사랑 그녀와 결혼을 해봤자… 인생은 별 게 아니다! 그냥 소고기 ‘사묵는’ 거다. 부자라고 하루 네 끼 다섯 끼 먹는 게 아닌 것처럼, 인생 잘 돼봐야 그저 소고기 ‘사묵는’ 거다.

대선이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다. 매사가 그렇듯이, 막판이 가까울수록 생각은 극단적이 되고, 행동은 막장에 치닫는다. 안철수 후보의 사퇴에 반대해 한 지지자가 자살 소동을 벌인데 이어, 모 중견배우는 “만약 박근혜가 대통령이 안 되면 대구 동성로에서 여러분과 저희들이 다 할복해야 한다”는 말로 박근혜 캠프 쪽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또, 정치 성향이 다른 인터넷 카페들 사이에선, 서로가 서로를 ‘털어보겠다’며 며칠째 생업도 작파한 ‘사이버전쟁’이 이어진다.

나는 이 새삼스러울 게 없는 선거 과열 양상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지난날 사방에서 비판받았던 ‘정치 허무주의’가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조심스러운 깨달음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정치가 할 수 있는 것은 별 게 없다’, ‘내 행복은 내가 책임져야한다’는 당연한 진리로부터 비롯된 생각이기 때문이다. 실상을 따져 봐도 그렇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각국의 정부가 아니라 ‘골드만삭스’다”라는 미국의 격언은 이미 세계 공통의 현실이다. 우리는 차기 정권을 우리 손으로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누가 되든 정권의 진정한 소유주는 자본 그 자체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대선의 열기가 하늘을 찌르는 지금, 엉뚱하게도 농담을 건네고 싶어진다. “그래, 당신이 미는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뭐하겠노? 대통령 돼서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묵겠지~” 하지만 내가 하려는 말이 허무주의 그 자체는 아니다. “누가 당선돼든 범부들의 삶은 거기서 거기”라는 맥 빠지는 허무주의의 필터링을 통과한, 그 차분하고 단단하게 응결된 생각으로, 오는 19일 투표소로 나서자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