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처럼 눈이 온 날 간단히 산책을 하러 집을 나섰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음씨 좋은 산 공부 선배가 함께 과천 대공원 길을 걷자고 제안해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합류해 대공원 길을 멀리 걸으며 이러고 저러구 얘기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공원길은 눈이 많이 쌓여있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눈이 온 관계로 인적이 드물어 아주 호젓했습니다. 그러니 더 여러 얘기들을 둘이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여러 얘기 중에 내 경우 겨울이 있어 봄이, 여름이 또 가을이 의미가 있는 것 같아 겨울을 이겨내는 중이라 했더니 그 선배는 다른 얘기를 합니다. 자기는 겨울을 특히 눈을 좋아한다고. 다른 계절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생명을 느끼는 계절이 겨울눈이라고 합니다. 그러며 눈이 이십 센치 정도 왔으면 한라산이나 덕유산에 있었을 거고, 거기 아니라면 최소한 호젓한 궁궐에서 눈을 즐기고 있었을 거라 하더군요. 결국 그렇게 눈이 많이 쌓인 데서는 순백만이 보이는 절대 조건, 게다가 위험할 수도 있는 산행 환경을 생각하면 더 절박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고 하더군요. 겨울을 다소 거추장스럽게 특히 눈을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한 나 자신이 살짝 무안해졌습니다. 주민등록상 올해로 65세 노인이 되었다고 하는 선배가 다시 보였습니다.

그날 같이 걸은 길 중에 현대 미술관 옆길도 걸었는데, 문득 거기에 소장된 작가 성재휴(1915-1996)의 육십대 시절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동양 화단의 대표적인 재야 작가로 알려진 분인데, 국내서보다 해외서 먼저 알려져 국내서 재평가를 받은 분이었습니다.

‘최근에 오면서 나는 수묵과 전통에 짙은 채색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또 한 번 전통적인 형식에서 이탈해가려는 자유로운 의지가 이런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듯하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조용하고 엄격한 표정을 짓고, 스스로 그런 울타리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상정인데, 나의 그림 경우는 어쩐지 정반대로 젊은 기분이 되어 가는 것만 같다.

좀 주착스럽긴 하지만 사람이 젊어간다는 것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을까?‘(1978)

당시 64세의 나이에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인데,

익숙한 생각과 습관에서 안주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렸습니다.

또 최근 칠백페이지가 넘는 벽돌 책을 하나 읽었는데, 그건 바로 ‘폭격기의 달이 뜨면’이라는 책으로 ‘1940년 런던공습, 진격하는 히틀러와 처칠의 도전’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2차 대전 중 독일이 미국이 참전하기 전 영국을 굴복시키려고 영국을 무차별 폭격했던 시기를 다룬 책입니다. 당시는 기술이 발전되지 못해 낮에 폭격하면 방해를 받았지만, 밤 폭격에는 거의 무방비로 당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총리는 처칠이었는데 거의 매일 밤 폭격을 당하는 나라를 초인적인 자세로 이끌고 나라와 국민들을 통합시키고 견디게 하더군요. 정말 불가사의하게 39년, 40년을 견디고 1941년 마지막 날, 처칠일행은 캐나다를 방문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자정을 맞게 되었습니다.

식당 칸으로 모두 모이라하고, 처칠이 건배를 제의했습니다.

‘투쟁의 한해를 위해, 고난과 모험의 한해를 위해, 그리고 승리를 향한 긴 발걸음을 위한 건배’ 그러고는 모두 손잡은 가운데 올드랭 사인을 부르는 장면이 나와 있었습니다.

감동이었습니다. 당시 처칠의 나이는 67세였습니다.

공교롭게 한 계단을 넘어가는

60대의 건강한 마음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