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어마한 미녀죠. 하지만 엄지 손가락이 맘에 들지 않아요!”

지난 십여년간 우리의 극장가는 크게 두 가지 액션 영화의 물줄기가 있었다. 하나는 2008년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2019년에 시리즈의 일단락을 맺은 어벤져스가 있고, 다른 하나는 그 보다는 반향은 좀 약했지만 2007년 6월부터 역시 십년이 넘는 기간인 2018년까지 또 다른 지류를 형성했던 트랜스포머 시리즈였다. 둘 다 나름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스토리를 형성해 왔는데,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하고 마이클 베이가 감독을 맡아 온 트렌스포머는 어느 정도 한계에 봉착하지 않았나 싶은데, 아직도 다 못한 얘기가 95% 이상이 남아 있다는 마블시리즈가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는 압도적이지 않나 싶다.

하지만 내 호주머니의 돈을 더 많이 털어내 간 것은 트랜스포머 쪽이었다. 당시 함께 영화를 본 애들이 더 많이 요구한 것이 있었으니, 명절이나 연말 같은 때만 되면 출시되어 애들을 꼬시는 ‘하스브로’의 변신 로봇 장난감이었다. 아무튼 대단한 두 영화 시리즈는 극장에 앉았던 우리들을 상상력의 힘으로 겁박하기에 충분했고, 한동안은 지워지지 않는 팬덤의 몸살을 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어벤져스 시리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요소가 있었으니, 트랜스포머 전체 시리즈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거대하고 웅장한 기계로봇과 함께 등장한 매력적인 여주인공들이었다.

범블비의 본네트를 열고 그 속을 들여다 보는 메간 폭스, 연기력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설들이야 많지만, 그 장면 하나로 그냥 끝이었다. 그리고 그 뒤편 시리즈에서 출연한 또 다른 매력적인 여주는 로지 헌팅턴 휘틀리, 아마도 세상의 많은 남자들 속을 헤짚어 놓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라면 광적으로 좋아하던 나였기에, 그런 류의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이 있으면, 먼저 에약을 하고 애들을 꼬셔서 보러 갔던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껏 특별히 어떤 스타를 동경해 왔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나처럼 까칠한 팬만 있다면 아마 세상의 여배우들 모두가 굻어 죽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에서 보이는 캐릭터를 좋아할 뿐 특별히 그런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를 좋아하거나 동경해 본 적은 별로 없다. 메간 폭스의 경우만 해도 그리 키가 크지는 않지만 163 센티미터의 적당한 키에 흠 잡을 데 없는 몸매와 극장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 되었을 때 보였던 그녀의 파란색 눈동자는 마치 호수와도 같이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중에서 두 번인가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엄지 손가락’은 그런 매력이라는 꿈에서 날 깨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개인적 취향이야 말이 안 돼도 문제가 아니지만

그녀도 스스로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손가락에 대해 흠으로 지적하고픈 생각은 없다. 손만을 위해서는 ‘대역’도 불사할 정도로 그녀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내가 지금껏 매력적인 영화 배우에 빠져들 수 없는 핑계거리를 그것에 대입시키고 있을 뿐이다. 옆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든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너스레가 어불성설이라고 할 것이다. 맞다. 말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구구절절한 핑계거리를 늘어 놓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 고등학교 시절 내내 반장 부반장 선도부원을 맡았기에, 나의 성격이나 본의와는 다르게도 반 친구들을 두루두루 접하며 지낼 수 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행사 같은 일이 있으면, 반 친구들을 동원해서 뭔가를 꼭 해내야 했기에 가만히 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그때는 매달 생활검열을 군대식으로 했다. 반장을 중대장으로 불렀다. 완전 군대식으로 사열을 했고, 지시에 잘 따르지 못하는 애들은 그 자리에서 얻어 터졌고, 그 자리에서 소위 바리캉이라는 것으로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살벌했던 체육대회, 무조건 이겨야 하는 교내 합창대회 등등 그럴 때면 반 친구들로부터 학급비를 모아서 교실을 치장했고, 선생님께 구두와 술과 고기를 갖다 바쳤다. 운동 잘 하는 애, 노래 잘 부르는 애, 그림 잘 그리는 애, 공부 잘 하는 애들이 골고루 다 필요했다.

요즘 같으면 일진이라 불릴 법한 그런 아이들의 무리 속에서도 나는 거리낌이 없었고, 전교 석차의 맨 꼭대기에 있는 애들과도 그리고 만화 그리기 같은 특기가 있는 애들도 잘 지낼 필요가 있었다. 내 머리에 씌워졌던 감투가 나를 그렇게 내 몰았고, 다른 반보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침잠하고 싶은 내 성격대로 자리만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졸업을 하고 나서는 동창회니 친구 모임 같은데서 두루두루 활약을 하는 친구들 소식을 듣지만 그 뒤로는 내 성격대로 쥐죽은 듯이 지냈다. 그게 내 성격이니까.

그렇게 지냈건만 지나고 보니 거의 말도 잘 섞지 않았던 애가 몇 있긴 하다. 그 중에 기억나는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비염과 축농증을 달고 사는 애였다. 늘 코맹맹이 소리와 함께 휴지를 달고 사는 모습만 봤다. 아침에 일찍 화장실에서 본 모습이 물로 코 속을 씼어내던 모습인데, 기괴하게 느껴졌다. 생각컨데, 당시로선 식염수도 제대로 없었기에 소금을 녹인 물로 코 속을 씼어냈던 것 같은데, 그 장면을 목격한 뒤로는 그 애와 말도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뭔가는 몰라도 속 좁았던 당시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의 선 바깥으로 분류해 버린 것이다. 사람 좋은 데 별 이유 없듯, 싫어한 것에도 굳이 꼽자면 이유 같지 않은 이유다.

40대가 되어서 나도 지독한 만성 비염을 달고 살다보니 그때가 후회스럽게 다가온다.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면 바쁜 아침나절 화장실에서 식염수와 그 비슷한 약제를 코 속에 뿌리고 답답함을 어쩌지 못해 습관처럼 비염약을 복용하는 내 모습 한 쪽 편에서 나처럼 그러고 있는 그 친구를 바라보는 내 모습이 느껴진다. 이제서야 변명처럼 뭔가를 속으로 외치고 있다. 비염에 걸리고 싶어 걸리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비염 없이 사는 사람 찾기가 쉽지 않게 되어버린 환경이 문제라고 말이다.

지난 11월에 충북 단양에서 열린 World Body Classic 피트니스 대회에서 무려 3관왕에 오르며 화제가 됐던 인물이 있다. 탄탄한 근육과 완벽하게 균형잡힌 신체를 겨루는 피트니스 대회에서 두 팔이 아닌 한 팔로 장애인 챔피언을 비롯해, 비키니 쇼트 체급, 미즈 비키니 톨 체급 그리고 오버롤 부문에서 우승하면서 3관왕을 차지한 것이다. 그녀의 수상 모습에 애써 눈길을 피하고 싶었지만,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뉴스라도 볼라치면 튀어 나오는 소식, 또 라디오에서도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한동안은 이어졌다.

실제로 대학교 때부터 서너번은 헬스장에 등록하고 한동안은 다녀봤고, 최근에도 코로나 상황으로 헬스장 문에 쇠사슬이 매어지기 전까지 2년 정도는 꾸준히 다녔던 터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어느 부위라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선명한 근육의 ‘선’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얼만큼의 땀과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 지를 너무 잘 알기에, 그 뉴스를 클릭해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안쓰러움에 뉴스조차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고, 그런 것들로 인한 까닭모를 거북함이 애써 밀어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높이 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밀어내고 있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기분에 따라 조직 기준이 바뀐다면 그건 재앙

이런 어줍짢은 것들은 모두가 남들과는 상관없는 나의 개취의 소산이다. 남들이 뭐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못 된다. 다른 사람과 얽히지 않은 ‘개취’와 관련해서는 이렇게 근거도 논리도 없어도 누가 뭐랄 수는 없는 문제다. 하지만 조직 내 다른 사람들과의 문제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부사장님, 지난번 회의 때 나왔던 프로젝트 건인데요. 지금까지 진행해 온 내역을 좀 알려주시고, 어떻게 진행해야 할 지 의논을 좀 드리려고 합니다.”

계열사 대표를 맡고 있는 부사장을 찾아가서 얼마 전, 회의 때 곤욕을 치뤘던 이슈에 대해 상의를 제안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멀뚱멀뚱 쳐다 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답도 내놓는 자료도 없었다. 한참을 밍기적 거리다가 돌아온 대답은 “위에 가서 여쭤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였다. ‘이건 뭐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야단을 맞았으면서도 지금까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나?’ ‘도대체 계열사를 책임지고 있다는 대표가 이런 파악도 안 되어 있고, 추진하고자 하는 의사도 보이지 않는다니....’ 연배도 위이고 직급도 직급인지라 뭐라 얘기는 못하고, 조속히 서둘러서 진행해야 하니 ‘함께 머리를 맞대 보자’는 말을 하고 돌아섰다.

결국 그 프로젝트는 엎어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 구내식당에서 야근자들을 위한 저녁을 함께 먹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연유에 대해 물었다. “어차피 그 프로젝트는 안 될 것을 알았으니까요.” 이 대답에 나는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지방에서도 올라와서 그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던 전체 회의에서, 왜 빨리 진행하지 않느냐고 불 같이 화를 내셨잖아요? 그럼 빨리 진행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다음 대답에서는 더 이상 그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목에 힘 한번 줘 보시려고 절 깼던 거구요. 속으로는 안 하기를 바라고 계셨을 겁니다.” 그는 사업 초기부터 함께 해온 그 윗선의 처남이었다.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된 이유를 알 만 했고, 그렇게 아무 것도 못하면서도 그 오랜 기간동안 그 자리에 매여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딱했다.

“이번 자료에서 이 이슈는 빼고 다른 것으로 정리해서 갑시다.” 일주일 이상의 시간과 공을 들여 각 사업부와 경영진들을 통해 검토 받고 수정했던 자료에 대해 별안간 반나절 뒤면 발표해야 할 시점에 모조리 수정이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그런데 컨펌을 받기 위해 자료의 최종본을 이틀 전에는 보냈음에도 시간은 다 보내고 결국 막판에 모든 걸 뒤집어 엎어야 할 참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두어 주 전까지만 해도 역점을 두어서 진행해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했고, 그런 점을 녹인 자료였다. 그런 점들을 풀어서 말씀을 드리고 어떻게 수정을 해야 할 지에 대해 물었다. “그때 내용과는 다르게 하기로 했어요. 자료에는 그 내용을 넣지 말아요.”

불과 이주일 전만 하더라도 그 이슈가 회사의 사활이 걸려 있고, 그 내용을 전면에 내세우고 나가야 한다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강조를 했다. 그래서 이번 이슈와 관련해서 그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대내외적으로 알리려고 했던 것인데, 그새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최고 결정권자가 그렇게 되었다는 데에 달리 이견을 달 수가 없었다. 문제는 새로운 이슈에 대해서 빨리 자료를 취합해서 서둘러야 하는 것이었다.

다시 사업부 담당자들과 임원들과 미팅을 진행했고 자료를 대대적으로 고쳐 썼다. 하지만 사업부에서도 ‘기껏 그 이슈에 대해 잘 진행하기로 해놓고, 갑자기 왜 이러는 지?’에 대해 영문을 몰라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담당은 아니지만 그 옆에 있던 왕고참 격인 임원 하나가 ‘그때는 그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그 기분이 아니신거지.’라는 자조 섞인 말이 시원찮은 해명의 말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리더 보다는 보스로 군림하고픈 사람들이다. ‘진정한 리더가 되고 싶다면, 강해지되 무례하지 않아야 하고, 친절하되 약하지 않아야 하며, 담대하되 남을 괴롭히지 않고, 유머를 갖되 어리석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철학자 짐 론의 말이다. 보스는 부리려 들지만, 리더는 솔선수범으로 따르게 한다. 보스는 ‘해라’고 지시만 하지만, 리더는 ‘하자’고 제안한다. 또 보스는 ‘권위’에 의존하며 ‘명령’을 하려 들지만, 리더는 ‘팀워크’를 유발하며 ‘대화’로 풀어 나간다. 보스는 ‘겁’ 주지만, 리더는 ‘희망’을 제시한다. 그리고 보스는 ‘성과’를 요구하지만, 리더는 ‘함께’ 만들어 나간다고 한다.

개취는 이유가 있건 없건 탓할 수 없지만, 조직의 일을 개취와 구분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커뮤니케이션하고 뜻과 힘을 모아 진행해 나가는 것과 음악이나 영화를 기분에 따라 고르는 ㅐ취와는 분명 구분되어야 한다. 그냥 보스이고 싶어서 이유 없는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갉아 먹는 재앙의 굴레를 뒤집어쓰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