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비전이 본궤도에 올랐다.

창립 이래 해외 투자로는 최대규모인 170억달러를 투입해 미국내 신규 파운드리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 부지로 텍사스주 테일러시를 최종 선정했다.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진입을 알린 1983년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동경선언 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통해 가다듬은 파운드리 전략이 선명해지고 있다는 평가다.

현재 미중 패권전쟁의 최전선에서 전략안보자산으로 취급되는 반도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전쟁도 심해지며 삼성전자는 물론 대만 TSMC와 미국 인텔, 글로벌파운드리의 각축전도 치열해지는 중이다. 파운드리 속도전을 규모의 전쟁으로 끌고간 삼성전자의 승부수가 시장에 미치는 파장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새 공장 부지가 발표되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삼성전자 파운드리 새 공장 부지가 발표되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왜 테일러인가
삼성전자는 23일(현지시각) 미국 텍사스 주지사 관저에서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그렉 애벗(Greg Abbott) 텍사스 주지사, 존 코닌(John Cornyn) 상원의원 등 관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신규 파운드리 공장 부지로 테일러가 낙점됐다고 발표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미국 출장을 통해 현지 정재계 인사들과 백악관 핵심 관계자, 마이크로소프트 및 아마존과 구글 등을 연이어 방문한 후 나온 '대장정의 마침표'다.

신규 라인은 2022년 착공해 2024년 하반기 가동이 목표다. 5G, HPC(High Performance Computing), AI(인공지능) 등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설명이다. 신규 라인 규모 170억달러는 삼성 해외 단일 투자 중 역대 최대규모다. 생산량으로 보면 기존 오스틴 라인의 4배에 이를 전망이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공장이 들어설 테일러는 오스틴 사업장과 불과 25km 떨어져 생산 거점의 밸류체인 전략을 가동하기 용이하다. 용수와 전력 등 반도체 생산라인 운영에 필요한 인프라도 우수하며 주요 대학들도 포진해 있어 인재양성에도 유리하다는 평가다. 무엇보다 테일러시 정부는 오랫동안 삼성전자 공장 유치를 위해 러브콜을 보낸 바 있다. 지난 9월 삼성전자와 별도의 합동회의를 여는 등 공장 유치에 공을 들여왔다. 

그 결과 막대한 세제 혜택 인센티브를 제시하며 오스틴 추가 공장을 고려하던 삼성전자의 마음을 잡았다는 평가다. 테일러시는 앞으로 10년간 재산세 92.5%를, 10년이 지나면 90%, 또 10년이 지나면 85%를 보조금 환급 형태로 감면하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20년간 9억달러의 세금 절감 효과를 누릴 전망이다.

출처=갈무리
출처=갈무리

파운드리 속도전, 규모의 경제로
최근 TSMC의 아리조나 메가팹이 착동되고 인텔도 파운드리 시장 진입을 위한 예열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웠다. 이재용 부회장이 가석방으로 풀려나며 삼성전자의 기본적인 의사결정 프로세스에 숨통은 트였지만 취업제한 등에 막혀 운신의 폭이 좁았기 때문이다.

테일러 170억달러 투자로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속도전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는 삼성 반도체 비전 2030 발표 후 메모리 반도체는 물론 시스템 반도체 전반에 드라이브가 걸린 상태다. 마지막 액션플랜이 아쉽다는 말이 나왔지만 이번 역대급 투자로 삼성 파운드리 전략은 구체적인 로드맵을 자랑하게 됐다.

당장 현지 팹리스들과의 강력한 공조가 예상된다. 이재용 부회장이 구글 선다 피차이 CEO와 만나 신형 픽셀에 삼성전자 칩을 조달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 단적인 사례다. 이 외에도 AMD 및 퀄컴 등 다수의 팹리스들의 물량을 받아 단숨에 몸집을 키울 수 있다는 평가다.

미국 중심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전략을 영악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회도 잡을 전망이다. 

지금은 바이든 미 행정부가 중국과 패권전쟁을 치르며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끌어오는 중이다. 화웨이의 오랜 우군이던 대만 TSMC를 영입해 소재 및 부품에 강한 일본과 연결시켜 미국-일본-대만으로 이어지는 공급망 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반도체 대중국 포위전선이 만들어졌다.

한국 기업인 삼성전자는 TSMC와 상황이 다르다. 중국과 대만의 외교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상태에서 TSMC는 모국인 대만 정부와 함께 중국을 배격하고 미국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을 수 있지만 중국 반도체 시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있는 삼성전자에게는 TSMC와 같은 선택이 어렵다.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다만 삼성전자는 이번 미국 테일러 투자를 바탕으로 미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에 올라타며 현지 팹리스들과의 협력을 중심에 둔 파운드리 속도전에 힘을 실을 전망이다.

파운드리 시장 지형도가 출렁일 가능성이 높다. 

TSMC는 현재 120억달러를 투입해 애리조나 파운드리 팹을 건설하고 있으며 그와 별도로 중국과 대만 공장, 나아가 소니와 협력한 일본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IDM 2.0을 선언한 인텔도 애리조나에 200억달러를 들여 신규 라인 2개를 만들 전망이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 흐름을 주도하기 위해 공격적인 투자 경쟁이 벌어지는 셈이다.

이들과 경쟁하는 삼성전자가 당장 판을 흔들기는 어렵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가 점유율 55%를 차지한 반면 삼성전자는 17%에 그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크호스 인텔도 삼성전자의 입지를 흔들고 있어 안심할 수 없다.

삼성전자는 미세공정 전략에 집중한 프리미엄 로드맵을 가동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글로벌 파운드리 업체 중 7나노 공정 이상을 양산하는 곳은 TSMC와 삼성전자가 '유이'하다. 여기에 10나노 공정 점유율을 보면 TSMC가 60%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으나 삼성전자도 40%의 점유율로 만만치않은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여세를 몰아 삼성전자는 평택 파운드리 공장을 통해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을 적용한 3나노 반도체 양산에 나서며 상위 기술 시장의 판을 흔들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기흥/화성-평택-오스틴 및 테일러를 연결하는 글로벌 밸류체인 전략이 완성되면 속도전과 규모의 경쟁 모두 상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평가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선다 피차이 구글 CEO. 출처=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선다 피차이 구글 CEO. 출처=삼성전자

필요한 것은 역시 기술력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22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 구글 본사에서 선다 피차이 CEO를 만난 후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반도체와 세트 연구소인 DS미주총괄(DSA·Device Solutions America), 삼성리서치아메리카(SRA)를 연이어 방문했다. 

이 부회장은 현장에서 "추격이나 뒤따라오는 기업과 격차 벌리기만으로는 거대한 전환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면서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 새로운 삼성을 만들어가자"고 당부했다.

글로벌 삼성을 만든 초석인 기술 초격차를 넘어 뉴 삼성의 기틀을 잡겠다는 의지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경쟁이 프리미엄 시장에서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고려하면 의미심장한 말이라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