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서 보면 원효봉이 제일 큰 산이다. 거실에 누워 있으면 창 밖으로 원효봉 상단부분과 그 위에 떠 있는 달이 보이고, 서서 내다보면 원효봉의 사시 사철이 앞마당 정원처럼 펼쳐있다. 원효봉은 겨우 510미터짜리 낮은 산이고,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는 836미터에 이르지만 우리집에서는 그 큰 백운대는 손톱만큼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 이유는 원효봉과 불과 수백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척인 거리에 있다. 아무리 낮아도 그 산 바로 앞에서는 제 아무리 큰 산이라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상대적으로 백운대의 실질적인 웅장함을 보기 위해서는 북한산의 품 보다는 건너편 노고산 능선 길이 제일이다. 불과 몇 백미터의 거리를 두고 맞은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진짜 제대로된 북한산의 감상은 북한산이 아닌 노고산이 해답이다. 송추쪽에서부터 오르내리는 산봉우리와 능선 길을 따라 걸으며 조망되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북한산의 웅장함과 동시에 산 아래에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던 기암괴석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숲과 늘어선 북한산의 수 많은 봉우리들이다. 거기서야 원효봉은 북한산 봉우리 무리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 산이고 그 산세도 둥글둥글한 모양새로, 초보 산꾼들 정도에게 넉넉한 인심을 주는 산 정도다.

하지만 바로 아래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단 완만하지만 둥글면서도 넙대대하니 자리잡고 중턱에는 커다란 암벽까지 끼고 있는 원효봉의 자태는 제법 웅장하다. 그런 넓은 산세로 모든 시야를 가려버린다. 제일 크지는 않지만 더 큰 산들을 모두 가리고 덮어버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그 앞에 살고 있는 우리 동네 사람들은 원효봉의 품이 제일 넓다는 착각 속에서 지내기 일쑤다.

“내가 다 했다”

커뮤니케이션을 무려 25년을 넘게 해 오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 현상이든 전후 사정을 알아 보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몇 번만 이리 저리 연락하다 보면 얽히고 섥힌 자잘한 내용까지도 귀에 들어오게 된다. 어떤 때에는 나는 별로 알고 싶지가 않고 알려고 하지 않아도 들린다. 사실은 알고자 하는 내용보다는 영양가 없는 얘기가 대부분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오히려 줏어 모아서 마치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군다. 그런 것일수록 그 얘기의 주인공에게는 약점이 될 것이니까 말이다.

지나면서 들었던 얘기는 정작 그 사람이 직접 입으로 했던 얘기와는 천양지차로 다를 때가 대부분이었다. 안에서는 목에 힘을 주고 ‘회사가 어려울 때 내가 직접 고객사를 찾아가서 담판을 짓고 다 해결했다’고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얘기를 듣고 있자면, 전지전능을 타고 난 듯한 얘기다. 전공을 하고 입사하여 수십년 자동차 부품업계에서 내노라 하는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매달려도 어쩌지를 못하는 것을 옆에서 딱 보고 들어가서 대번에 개발해 내고 다시 그 자료를 들고 고객사에 들어가서 제안 발표를 해서 대량 물량을 수주했다는 등이다. 그런데 밖에서 들리는 얘기는 그 사람은 고객사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고를 받은 지가 이미 오래다.

아니면 전자부품 벤더 업체인데 그 동안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서 고객사로부터 신임을 잃고 힘든 시간을 보내던 차에 본인이 직접 나서서 고객사의 일개 팀원들부터 위로는 팀장과 임원들까지 모두 만나고 설득시켜서 물량을 회복하고 회사를 반석 위에 떡하니 올려놨다는 설까지 다양하다. 들어보면 회사가 다시 성장 가도를 달리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데, 그걸 자기 혼자서 다 이룩했다는 것이다. 내게 그리 얘기를 했으니 아마도 회사 안팎에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 다녔을 것이 틀림 없었다.

조직 안에 있는 나 같은 사람이야, 그런 허풍에 설레발을 ‘아, 그렇군요!’라며 추임새까지 넣으며 들어주고 나서 한 귀로 흘려버리지만, 나 이외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질 않는다. 대부분은 곱씹으면서 마음 속에 새겨둔다. 이런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뉘는데 한쪽은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잘 보이려 아부하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얼핏 들어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기회가 되면 약점으로 잡고 되 받아 치기 위해서 마음 속의 칼날 밑에 고이고이 다져놓는다. 특히나 잘 모르는 회사 외부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너스레를 떨어 놓으면 그때 뿐인줄로만 알고 있는데, 돌고 돌아 나중에 자신의 목을 치게 된다.

다만 안에서는 그런 얘기를 많이 들은 자신의 휘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손바닥 얇은 사람들에게는 다르다. 그런 얄팍한 믿음을 미끼로 ‘도필리’ 행세를 한다. 그런 도필리들이 밑을 받쳐주어야 설 수 있는 사람, 밖에서는 ‘아마 이런 건 모를거야’ 하면서 자신도 속이면서 온갖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들이 있는 조직이 허다하다. 안에서는 그럭저럭 맞장구를 받지만 밖에서는 돌아서면 손가락질 받는다. 그런 얘기들이 돌고 돌아 다시 조직 내로 들어온다. 외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밖에 없는 사람일수록 조직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실력이라곤 보잘 것도 없는 사람들이 그런 약점을 많이 아는 결과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면서 조직은 만성 골다공증의 조직처럼 성긴 조직이 된다. 그렇게 성긴 조직이 되어야 도필리들이 힘들 받을 수 있기에 촘촘하고 유기적인 조직을 상당히 망가뜨린 후에야 그들의 입지가 보장된다. 그렇기에 그런 리더와 도필리들은 일부터 조직에 생채기를 내고 망가뜨린다. 멀쩡한 사람은 따돌리고 입만 들고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헤쳐모이게 하는 특출한 재능을 한껏 발휘한다.

멀쩡한 조직을 망가뜨려야 살아남는 도필리들

도필리란 예전 중국의 한무제 시절에 유가를 숭상해 나라의 기틀을 잡으며 선비들을 등용하면서 유가 외의 다른 사상의 출현을 철저히 배격했다. 사소한 잘못도 엄하게 벌하고 다스린 통에 겉으로는 뭔가 체제가 잡힌 듯 했다. 이런 시스템에서 사법부의 말단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문서 작성을 맡았던 하급 관리들이 바로 그들 도필리인데, 죽간으로 된 문서들을 고쳐쓰기 위해서 칼로 죽간을 깍아내고 붓으로 썼던데서 그 이름이 연유했다.도필리들은 마음만 먹으면 제아무리 고매한 충신이라도 천가지 만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서 처단했고, 뒷돈만 챙길 수 있으면 극악한 무리들도 온갖 필설로 풀어주기 일쑤였다.

황제는 자신의 권위에서 기인하여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도필리들의 손가락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그것이 기원전 하고도 한참 전의 얘기이지만 그 이치는 지금도 조직 세계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엉성한 리더가 말도 되지 않는 세치 혀로 허풍선을 띄우고 그 앞에 선 도필리들이 색을 입히고 포장을 해서 그럴싸하게 보이게 만들고, 또 안에 든 것이 바람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조직 밖으로 밀어내서 연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조직의 구성원들에게는 백운대와 같은 주봉은 이정표가 되지 않는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도필리 같은 작은 원효봉의 손아귀에서 잘 버티는 것만이 살 길이 된다. 요즘 ‘깐부’라는 말이 유행이다. 길거리를 다니면서 눈에 띄는 그 치킨집이 있었어도, 그 깐부가 그 깐부를 말하는 것인지는 여태 모르고 있었다. 내가 어렸던 시절 부산의 백양산 밑 동네에서는 깐부라고 하지 않았다. ‘가부’라고 했다. 자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같은 놀이에 정신이 팔렸던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 그런 말을 썼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때마침 불어온 전국고교야구대회 같은 것 때문에 야구 글러브가 여러개 있는 아이들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글러브 얻어 끼고 캐치볼 같은 야구를 놀이 삼았다. 벼르고 별러서야 문방구 입구에 걸려 있던 천원 안팎의 싸구려 비닐 글러브를 사서 끼고서는 애꿎은 동네 담벼락에 공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딱지와 구슬을 거의 자루에 담을 정도로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딱지도 손으로 접어서 만든 네모난 딱지도 있었지만, 동그란 모양의 딱지도 있었다. 구슬도 왕구슬부터 흰색의 사기 구슬도 있었는데, 내가 딱지치기나 구슬치기의 실력이 뛰어나서 많이 보유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비교적 젊잖은 티가 났던데다가 코 흘리고 다니거나 지저분한 옷을 엉망으로 입고 다니진 않았기에 친구들 중에서도 나는 제법 믿을만한 놈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구슬치기 잘 하고, 딱지치기 잘 하는 애들이 나에게 ‘가부’를 맺자고 했고, 어떤 때는 구슬이나 딱지를 많이 가지고 있던 애들은 내가 제안해서 가부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면 그 구슬과 딱지는 내가 다 맡았다. 오히려 말수가 적고 잔재주 보다는 머리 회전이 빠른 축에 속하는 내가 주선자 겸 판돈을 가진 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게, 동네에서 양지 바른 골목에 자리 잡고 내가 적절한 애들과 시합을 주선해서 우리 가부 중에서 실력 있는 대표를 선발해서 출전시키고 그 옆에서 딱지와 구슬 포대를 풀면 동네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 위험한 순간이다 싶으면 내가 옆에서 훈수를 두기도 하고 올인 전략으로 상대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딱지를 내기로 걸어버리면 상대는 찔끔찔끔 따 다가도 우리편이 한방에 다 만회해 버릴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우리 가부에 스스로 드러오기를 희망하는 애들도 있었다. 갈수록 커지는 가부도 있었지만 하루짜리 가부도 많았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내가 맺었던 가부들은 전학이나 진학이 아니면 유지가 되었던 것 같다. 간단했다. ‘내가 가지고 있지만, 내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다가 보면 구슬과 딱지는 모두 내 수중으로 모이게 되는 구조였다. 나중에 몇 자루를 다 버릴 것을 그때는 왜 그렇게 애지중지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가부라는 말을 서울에서는 ‘깐부’라고 했나 보다. 최근에 오징어게임이라는 열풍을 통해서 알 수 있었는데, 사회적으로 유명한 말로 퍼지기 전에는 깐부와 가부가 연결이 되지 않아 와 닿지가 않았다. 나중에 정치권이고 어디고 간에 다 깐부라는 말을 유행어처럼 쓰면서부터야 그게 그것인 줄을 짐작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 출연한 오영수 배우의 인터뷰가 심하게 기억에 남는다. 웬만한 배우는 드라마 하나 뜨면 그때서부터 온간 CF며 예능 프로그램을 섭렵하고 몸값부터 올리기 일쑤일텐데, 전세계에서 가장 히트친 그 드라마의 핵심 출연진이면서도 여태 TV에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찾아 볼 수가 없다. 연로한 그의 연세 탓도 있겠지만 실은 그의 배우 정신 때문이 아닌가 싶다.

치킨으로 유명한 모 회사에서 광고 섭외를 한 것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혹자들은 그런 그가 ‘그렇게 유명세를 탔으면서도 겨우 치킨 광고나 찍겠어?’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나도 그런 생각부터 먼저 났으니까. 하지만 인터뷰 내용은 달랐다. ‘상업적인 것은 전혀 안 하고, 마치 순수 예술만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인 것 같은데, 예전에도 이런 저런 광고도 찍고 상업 영화나 TV에도 출연했다’며 ‘그렇게 알려져서 이상해졌다’고 말을 뗐다.

그의 논리는 드라마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 즉 극단적인 상황에서 삶과 죽음의 선택, 신뢰와 배신, 인간성 상실과 애정 같은 인간관계를 모두 녹여서 담아낸 말이 바로 그 ‘깐부’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작품의 핵심 주제이기도 했다. 그는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깐부 연기를 했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닭다리를 들고 ‘깐부’라고 웃으면서 얘기를 한다면 작품이 지향하고자 하는 뜻을 훼손시키는 것이어서 거절을 했단다. 돈이 아쉽기는 그도 마찬가지이지만 작품의 뜻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굴러들어온 수익을 발로 차 버린 셈이다.

“내가 왜 돈을 생각하지 않겠나. 집사람이 그러더군. ‘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 뜻을 이해해줘 다행이지. 요 근래에는 광고가 많이 들어오긴 해. 그래도 할 만한 걸 해야지 들어온다고 다 할 수는 없잖아?” 이런 배우가 있는 한 제 2 제 3의 오징어게임은 또 나올성 싶다. 제대로 된 직업정신이다. 뒤에 있는 주봉을 가리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는 앞산의 모습이다. 쉽게 보기 힘든 모습이라 기억에 더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