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거킹> 제임스 W. 맥라모어 지음, 김재서 옮김, 예미 펴냄.

으레 성공한 사업가들의 자서전은 자기 자랑으로 가득하다. 특히 성공의 결정적 계기가 된 발상이나 도전은 온전히 자신의 판단과 천부적 추진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독점화하기 일쑤다.

이 책도 버거킹 창업주가 썼다. 하지만 무척 솔직하다. 버거킹이 겪은 난관들에 대해 남 탓, 시대의 잘못으로 돌리지 않는다.

버거킹이 세계적인 QSR(Quick Service Restaurant)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인 ‘와퍼’의 탄생 비화를 비롯한 모든 성공 스토리에 대해서도 과장 없이 밝힌다.

◇ ‘열정’ 없다면 목표 세우지도 말라

제임스 맥라모어(이하 짐)는 1926년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1929년 대공황으로 집안이 몰락했다. 짐은 빈곤함 속에서도 ‘인생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키워 나갔다.

코넬대 호텔경영학부에 응시해 합격했지만 학비가 없었다. 정원 관리 알바를 하던 코넬대 식물병리학과 교수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대출과 장학금을 받아 입학할 수 있었다.

재학 시절 미식축구부에서 활동했다. 경기 성적은 별로였다. 짐은 그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다.

‘나는 재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뛰어난 선수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최고의 선수가 되려는 열정이 없었다. 헌신적으로 노력하지도 않았다. 최고의 성과를 내려면 열정이 필요하다. 성공을 향한 분명한 열정이 없다면 목표를 세워 일을 시작하지도 말라.’

◇”당신은 자신의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다”

1947년 코넬대 졸업 후 번번히 구직에 실패하다가 간신히 월급 267달러 짜리 델라웨어주 윌밍턴 소재 YMCA 식당 관리자가 되었다.

그 때 짐은 사업이든 개인생활이든 계획이 필요하며, 계획이란 예산 수립, 자산과 부채 구분, 수입과 지출 예상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웠다.

짐은 당시 YMCA 맞은 편 즉석요리 레스토랑이 성업중인 것을 보고는 1950년 1월 첫 번째 창업을 했다. ‘콜로니얼인’은 예상보다 잘됐다. 1952년 2월 마이애미에 빌딩을 짓던 장인이 빌딩 1층에 식당을 열지 않겠냐고 제안해왔다.

첫 사업에 자신이 붙은 저자는 현지를 둘러봤다. 마이애미 식당들마다 손님들이 줄을 서서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당의 서비스는 생각보다 나빴고, 음식도 별로였다. 자신이 붙은 짐은 당장 임차계약을 맺었다.

5월, 마이애미를 다시 찾은 그는 깜짝 놀랐다. 2월과 달리 마이애미가 썰렁했다. 마이애미는 겨울이 성수기였고, 나머지 계절은 비수기였던 것이다. 입주한 빌딩의 세입자들도 주로 병의원들이라 상시 근무자가 적었다.

이렇게 시작한 두번째 사업, ‘브리켈브리지 레스토랑’은 한동안 고전했다. 이때의 교훈은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였다.

◇ “기업가여,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고 쳐다만 보라”

1954년 3월 1일, 코넬대 호텔경영학부 출신 데이비드 에저튼(이하 데이브)이 전국 프랜차이즈 ‘인스타버거킹’과 가맹계약을 맺고 마이애미 36번가에 매장을 오픈했다.

마이애미가 낯선 데이비드는 코넬대 동문 짐을 찾아와 동업을 제안했다.

창의적이고 비상한 두뇌를 지닌 데이브와 디테일에 강하고 숫자에 밝은 짐은 금방 통했다.

짐이 보기에, 셀프서비스 방식을 최초로 도입한 인스타버거킹은 간단한 메뉴 구성, 낮은 가격, 빠른 서비스 등 독특한 운영방식 때문에 전국 체인 형태로 확장하기가 쉬웠다.

두 사람은 1954년 6월 1일, ‘버거킹 오브 마이애미’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가 데이브의 인스타버거킹 매장과 부채를 인수하고, 짐은 브리켈브리지 레스토랑 매각자금을 투자했다. 지분은 50대 50으로 했다.

짐은 매장을 2년 간 네 곳으로 늘렸다. 이 시기에 햄버거 시장은 빠르게 레드오션으로 변해갔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적자가 늘었다. 흑자 전환을 위해 매장 수를 늘리고 광고 홍보도 해야 했는데, 투자 유치가 불가능했다.

급기야 1956년초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은퇴한 사업가 하비 프루호프를 만났다. 그의 질문은 한 가지였다. “자, 젊은이,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짐이 재무제표를 꺼내 솔직하게 회사 상황을 설명하고 향후 재건 계획을 밝히자 하비는 곧바로 6만 5000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그해 4월 30일 지분의 절반을 갖는 조건으로 최종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하비는 제임스의 멘토가 되었다.

투자금을 모두 날릴 각오로 투자했다는 하비는 늘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아야 하고, 우리는 그 바구니만 쳐다보는 거야”라고 말했다. 훗날 하비의 투자금은 1억 달러 이상으로 늘어났다.

◇’더 크게 더 맛있게’ 와퍼, 탄생하다

두 사람은 1957년 인스타버거킹 창업자가 새로 오픈한 플로리다주 게인즈빌 매장을 구경하러 갔다. 그곳은 손님이 전혀 없었다.

무료해진 짐은 혼자서 매장을 나왔다. 한 블록 떨어진 거리를 지나던 중 드라이브인 식당 한 곳이 눈에 띄었다. 식당은 낡고 지저분했다. 직원들의 서빙도 엉망이었다. 주차장 바닥은 비포장이어서 차량이 드나들 때마다 먼지가 날렸다.

그런데도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고, 돌아가는 손님들은 커다란 햄버거가 몇 개씩 담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주문하여 한 입 먹어보니 무엇보다 크기가 컸고 맛도 좋아 감명받을 정도였다.

둘은 마이애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크고 맛있는 햄버거’를 생각하며 흥분했다.

차 안에서 새로운 메뉴의 이름을 ‘와퍼(Whopper)’라고 정했고, 버거킹 간판 밑에 ‘와퍼가 시작된 곳(Home of the Whopper)’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어 새로운 메뉴의 원조라는 사실을 널리 홍보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며칠후 모든 매장 지붕에 “신상품 와퍼 햄버거, 37센트”라고 쓴 A자형 목재 광고판이 설치됐다.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은 와퍼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인기 있는 샌드위치 상품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와퍼는 등장하자 마자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두 사람은 1959년 경영난에 처한 ‘인스타 버거킹’ 브랜드를 인수했다. 이후 ‘인스타버거킹’을 '버거킹'으로 개명했다.

버거킹은 1967년 제빵 전문기업 필즈버리 컴퍼니에 매각되었고, 이후 몇 차례 오너십이 바뀌어 지금은 'RBI(Restaurant Brands International)이라는 새로운 모기업 밑으로 들어가 있다.

버거킹은 현재 100개 이상의 국가에서 1만 50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제임스 맥라모어는 1967년 버거킹이 필스버리에 인수된 후에도 5년간 CEO로 일했고, 1996년 8월 8일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