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뛰지 마. 다쳐!”

아마 이 얘기만 들어도 웬만한 사람들은 연상되는 에피소드가 있을 것이다. 한동안 인터넷으로 너무나도 많이 돌고 돌았던 미담 얘기였다. 삼각지 뒷골목에 자리한 오래된 국숫집과 관련된 것이다. 식당 이름은 ‘옛집’이라고 붙어 있는데, 실제 가보지는 못했지만 테이블도 달랑 4개뿐인 데다가, 연탄불에 밤새 우려낸 멸치 국물에 말아서 내는 국수가 주 메뉴다. 어찌어찌 그 국숫집이 국내 지상파 방송에 소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방송이 나간 뒤에 파라과이에서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담당 PD에게 감사의 연락을 해 왔다고 한다. 그렇게 스토리가 시작된다.

그로부터 15년 전 그는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었고, 처자식마저 떠나버려 희망이 사라진 참담한 상황에 처했다. 용산역 주위를 배회하며 이 식당 저 식당을 전전해 가면서 끼니를 구걸했지만 어느 한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고 문전박대를 당할 뿐이었다. 독이 잔뜩 오를 대로 오른 그는 자신을 박대한 식당들에 원한을 품고 불이라도 질러서 앙갚음을 하기로 결심을 하며, 그는 생을 함부로 하기로 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국숫집에까지 이른 그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지만, 일단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는 그득 담긴 국수를 내줬고, 그는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첫번째 그릇이 비워져 갈 무렵, 할머니는 그릇을 가져가 다시금 육수와 면을 가득 채워 내줬다. 그렇게 또 한참 국수를 먹고 보니 아까의 분노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배는 불러왔지만 국수 값을 낼 처지가 못되어 이리저리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도망갈 틈만 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그는 부리나케 가게 문을 뛰쳐나가며 도망을 쳤다. 그때 가게 문 앞까지 뒤따라 나온 할머니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마음을 다잡게 하기에 충분했다.

“돈 없어도 뛰지 마! 다쳐. 그냥 걸어가. 배 고프면 담에 또 와.”

할머니의 이 말은 화살처럼 날아가서 도망치던 그 남자의 뒤통수에 꽂혔고, 남자는 그냥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파라과이에 가게 됐고, 거기서 장사를 해서 번듯하게 살게 된 것인데, 우연히 그 국숫집을 방송에서 보고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방송국으로 국제전화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그거 말고도 그 할머니 인생에 얽힌 가슴 찡한 인생 스토리는 더 많다. 그래서 방송과 뉴스 그리고 SNS를 통해 두고두고 회자가 되고 있다. 밥 보다 국수를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길 가다가 보이는 국숫집도 가 보고 싶은데, 이런 감동이 있는 곳은 더더욱 가 보고 싶지만 바쁘게 살다 보니 끼니 하나 해결하러 그 먼 곳까지 가기가 사실 쉽지만은 않다.

# 2 : “뛰지 마. 다쳐. 넘어지면 큰일 나!”

나에게도 생생히 기억나는 ‘뛰지 마. 다쳐.’가 있다. 2007년 무렵이니, 거의 15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코로나 상황이 아니더라도 언제부턴가 기자들과 커뮤니케이터들이 술을 조금씩 줄여왔고 지금은 예전에 비할 바가 못된다. 그때만 하더라도 하루 저녁에 3차 4차는 예사였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당시에는 술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용인하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낮에도 소맥이나 소주 한 두 병은 마셔야 점심을 먹었다고 볼 수 있었을 정도였다. 식당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자리를 하기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소주와 맥주부터 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그렇게 낮에 마셨다고 끝이 아니라, 해지고 나면 다시 제대로 마셔야 했고, 그런 술 자리는 자정을 훌쩍 넘기기가 예사였다.

모 경제지의 주니어 기자 몇몇이 나의 팀과 술자리를 한번 했으면 했다. 그런데 입사한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기자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내가 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인사차원에서 식사를 몇 번인가는 했고, 취재 차원에서 연락은 자주 했지만,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는 세대차이 나는 내가 빠져주기를 바랬다. 연이은 술자리에 지치기도 했기에 팀장이었던 나와 함께 Y과장은 빠지기로 했고, 당시 사내외에서 여장부 소리 듣던 C대리 손에 법인카드를 쥐어주며 막내랑 다녀오게 했다. 평소 선배들을 따라 다니며 회사 내부에서 젊은 직원들로부터 ‘큰 형님’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기도 했고, 쾌활한 성격에 외부 사람들도 그녀를 부담없이 대하곤 했다. 그런 C대리 였기에 별 걱정 없이, Y과장과 나는 야근으로 여러 일처리를 마친 뒤, 회사 근처에서 모처럼만에 느긋한 저녁 식사를 즐겼다. 그리곤 맥주도 두어 잔 나누며 홀가분함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10시가 조금 못된 시각,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C대리였다. 연락이 없어야 순탄한 것인데, 그 시각에 전화라니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이미 혀가 꼬여버린 C대리의 힘없는 목소리만 반복 될 뿐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요?” 평소 그녀의 주량이라면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우리 둘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대로로 뛰었다. 근처의 택시를 잡아타고 일단 여의도로 향하게 했다. C대리가 저녁 약속 장소로 잡았던 그곳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진 않았다는 거부터 확인을 했다.

식당에 도착하고 보니 시간이 시간인지라, 저녁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식사는 마친지도 한참 지난 상황이었다. 2차를 가자는 기자들의 성화가 있었지만 평소보다 취기를 더 많이 느꼈던 C대리가 이를 마다하고 일단은 헤어진 뒤였다. 막내도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중간에 C대리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도 확인이 잘 안되던 상황이었다.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통화하며 들었던 내용을 종합하자면 이랬다. 빌딩 2층에 있는 식당을 나서며 일행은 헤어졌는데 취기를 많이 느낀 터라 혹시 추한 꼴을 보이기라도 할까 하는 마음에 다른 층 화장실을 가게 됐다. 그런데 갑자기 밀려온 취기로 인해 어쩌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몇 층을 더 올라 왔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것인데, 다리가 풀려서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렵다고 했다. 아마 태어나서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 당황했던 것 같다.

우리 둘은 3층부터 빌딩 구석구석을 다 뒤졌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7층 화장실 입구에서 엉거주춤해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쉽지 않은 기자들과의 자리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 없는 여러 곤란한 상황을 겪은 것은 평소와 달랐고, 여럿이 속도를 내며 마셨던 술이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그만하길 천만다행이라 생각했고, 조심조심 그녀를 데리고 내려와, 우리 셋은 택시를 잡아 타고 먼저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어느 정도 술기운에서 회복된 그녀를 금호동의 어느 아파트 입구에서 내려주고 차를 다시 돌려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못볼 꼴을 선배들에게 보여준 것이 술 취한 마음에서도 걸렸는지, 아파트 입구를 향해 뛰어 갔다. 행여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방향을 돌리는 택시 창문을 열고 힘껏 외쳤다. “뛰지 마. 넘어지면 큰일 나. 천천히 걸어, 내일 아침엔 일찍 출근하지 마! 점심 먹고 출근해!”라고 힘껏 외쳤다. 늦은 밤 아파트 단지에서 메아리가 울리는 듯 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니, 술 마신 티가 전혀 나지 않는 단정한 차림으로 평소보다 더 일찍 출근해 일하고 있는 C대리를 봤다. “일찍 나오지 말랬더니. 속이나 풀고 와.” 괜스레 후배를 고생시켰다는 죄책감이었다. 힘든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후배 모습이 대견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녀는 매사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회사 남자 후배들에게도 후한 인심 써가면서 골드 미스로 있다가 천생의 인연을 만나, 지금은 사모님 소리 들어가면서 애들 키우며 잘 살고 있다.

# 3 : ‘뛰지 마. 다쳐!’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조직문화라야

우리 사회가 온통 불만과 분노에 쌓여 있다. 어딘가엔 기득권을 잔뜩 쥐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 주위엔 찾아 볼래야 볼 수도 없는데 젊은 세대들은 586세대들의 기득권을 욕한다. 철이 들면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떨쳐 버리지 못한 삶에 대한 ‘불안감’을 잔뜩 짊어지고 허우적 허우적 살아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거기서 다시금 여성과 남성들이 갈수록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남녀평등을 내세우면서 쪼그라든 남성들을 몰아세운다. 거기에 마냥 ‘을’ 입장에서 당하기만 해야 하는 남성 샐러리맨들의 분노도 인터넷 세상에서는 심심찮게 불거져 나온다. 어느 조직을 들여다 봐도 쉽사리 극복되지 않는 갈등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의 행태가 ‘꼰대 vs. 젊은 세대’, ‘남 vs. 여’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쉽지 않은 골이다. 그간의 조직문화가 그렇게 조장을 해오지 않았나 싶다. 개개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조직문화가 그렇게 해온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때 적용되는 조직이라면, 작은 조직은 가정에서부터 가장 큰 국가라는 조직까지도 확대될 수 있다. 배려와 희생이 강요되는 조직, 반복되는 배려가 당연시 되는 문화가 주위에 넘쳐난다. 입사에서 퇴사까지 단 한번도 공평하게 적용되는 사례가 있었는가 싶기도 하다. 모든 일에서 누군가는 항상 득을 보고 누군가의 희생은 감수되어야 하는 것이 조직문화라고 오인되고 있다. 인터넷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보면 서로가 서로를 깎아내리고 혐오하는 글들은 무궁무진하고 넘쳐난다.

남녀가 함께 하는 회의시간에 농담을 할 때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미디어가 부축이고 있기도 하다. 뉴스 사진에서 TV화면에서 잘 나가는 이들의 매너손에 대해 거론을 한다. 옷 입고, 밥 먹고, 말 하고, 움직이고 하는 것들을 신경 쓰면 쓸 수록 엄한 말이 돌아 온다. 출근을 한 시간 일찍하고 점심 밥만 먹고와서 일하고, 야근하는 남자들이 무능하다는 말을 들을 때가 많다. 출근시간과 퇴근시간 정시에 맞춰 사원카드가 찍힐 때 누구에겐 손가락질이 날아들지만 누구는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조직문화가 그렇게 자잘한 규칙들을 세세하게 규정할 수록 뭔가가 더 멀어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남녀가 꼭 그렇게 대별되는 것이 아님에도, 사회는 그리고 조직은 남녀를 한쪽으로 몰아세운다. 세대를 양쪽으로 분류한다.

몇 년 전에 함께 일하던 여성 임원이 주말에 다같이 가볍게 등산 한번 갔다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등산 마니아로서 나의 반가움은 각별했다. 물론 등산 얘기가 나왔을 때 내 머릿속에는 백운대나 청계산 꼭대기가 그려졌지만, 아마도 연세 있는 그 임원은 작은 언덕 정도 그렸을 것이다. 팀원들이 함께한 회의 말미에 그 임원이 ‘주말 등산 화합’을 제안했다. 결론은 단 1초 만에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묵살됐다. 그 이후로 다시는 주말에 뭘 하자는 얘기는 입도 뻥긋 하지 않게 됐다. 같은 팀이라도 자기 할 일만 딱딱 하고 마는 조직문화였다.

C대리 때는 좀 달랐다. 야근도 함께였고, 회식도 자주였고, 주말에 산행도 여러 번이었다. 단 둘이서 백운대에 오른 적도 있었고, 다른 팀원들과 함께 비봉을 거쳐 위문 지나 우이동으로 하산했던 적도 있다. 물론 산행이 주였으며 하산한 뒤엔 가벼운 식사 정도가 다였다. 나에게 ‘북한산 날다람쥐’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도 그때였다. 남과 여로 달랐고, 세대도 차이 날만큼 났지만 소통하고 서로 생각해 준 것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생각이다.

돌이켜보면 그 무렵 회사는 성장을 하고 있었고, 직원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다. 직원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많이 강조 됐고, 임원들도 직원들과 자주 어울리고 배려했던 때였다. 퇴근 후 들린 식당에서 후배들이 저녁이라도 먹고 있으면 선배들이 몰래 계산을 했다. 사업부에서 등산이라도 가면 무릎이 아파서 산행을 못하던 여직원은 산 밑에서 미리 식당을 잡고 준비를 하며 다른 사람들을 배려했다. 구분하고 나누고 규칙을 세울 수록 더 철저히 나뉘게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남과 여, 세대 구분이 아니라 배려하고 걱정해 줄 수 있는 소통하는 조직문화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