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많은 우려 속에서 시작한 한미 정상회담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소 의견차가 있기는 하지만 진영을 막론하고 회담의 성과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24일 재계 등에 따르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고무적인 성과는 미국의 자국 내 투자 요구에 적극 대응한 국내 4대기업의 결단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그런 이유로 재계에서는 기업들에 대해 강경했던 정부와 여당의 대(對) 기업정책 기조에도 변화도 예상되고 있다. 

기대 이상의 성과 

이번 회담의 대표적 성과는 코로나19 백신의 국내 공급과 관련한 미국과의 공조 관계 구축 그리고 지난 42년간 미국의 관리 아래 묶여 있었던 미사일 사거리 제한의 해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55만명의 한국군에게 즉시 접종할 수 있는 코로나19 백신을 지원하는 것과 글로벌 제약 기업들과 국내 바이오 기업들의 긴밀한 협조관계 구축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회담 현장에서는 미국의 제약기업 모더나(Moderna)가 자사의 코로나19 생산을 삼성바이오로직스에 위탁하는 협약이 진행됐다. 글로벌 기업과 국내 바이오 기업들의 연이은 생산 위탁 계약으로 우리나라는 국내 백신 공급에 있어 유리한 입지를 점할 수 있게 됐다. 

국가방위 목적으로 개발되는 우리나라의 미사일 사거리는 최대 사거리 800km로 제한돼있었다. 그러나 2021년 이번 회담으로 지난 1979년 미국의 탄도 미사일 개발 중단 권고에 노재현 국방장관이 동의하면서 시작된 미사일 사거리의 제한은 42년 만에 완전히 폐지됐다.

중국을 군사적으로 견제하려는 미국 정부의 이해관계와 ‘자주국방’을 추구하는 문 대통령의 외교 기조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다.

4대기업의 쉽지 않은 결단 ‘44조원’   
     
회담의 성과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확실한 이익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공짜로 얻은 성과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사항들을 받아들인 외교적 ‘거래’이며 여기에는 국내 삼성·현대차·SK·LG등 주요 기업들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새로 증설할 미국 현지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인프라 구축에 170억달러(약 19조1,600억원)의 투자를 약속했다. SK하이닉스는 현지 반도체 연구개발(R&D) 센터의 구축을 위해 10억달러(약 1조1,275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양 사 합작 혹은 각 사 개별 투자로 차세대 배터리 개발과 연구를 위해 140억달러(약 15조7,822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현대차는 현지의 전기자동차 생산·충전 인프라 확충에 74억달러(약 8조 3,435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이를 모두 합치면 394억달러, 한화로 약 44조4,235억원에 이르는 대규모의 투자다. 

대기업들의 투자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최소 조 단위 이상의 투자는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미국의 외교적 대척점인 중국이 자사의 가장 큰 수요처 중 하나이며 현지에 반도체 공장(시안)도 운영하고 있다. 그간 자국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해석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중국이 우리 기업들에게 실행한 보복성 조치를 떠올리면 삼성전자는 나름의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자회사인 SK하이닉스IC를 통해 중국에 파운드리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다. 

또 국내 경기침체와 일자리 부족이 심각함에도 수 십 조원을 미국에 투자해 현지에 일자리를 창출하는 각 기업들의 결정은 여론에게 비판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기업들은 자칫하면 자신들에게 매우 불리할 수 있는 입지를 만들 수 있음에도 정부의 입장에 힘을 싣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변화의 조짐

재계에서는 그간 기업들에 대해 강경했던 정부와 여당의 정책 기조가 전환되기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조짐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2일 정부의 ‘K-반도체 전략’의 주요 내용은 반도체 연구개발에 대한 세액공제 확대, 금융지원 강화, 화학물질 규제 합리화 그리고 반도체 특별법의 제정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반도체 기업들이 감당하고 있던 ‘규제의 완화’ 목적이 뚜렷한 조치들이다. 

삼성전자의 새로운 파운드리 라인 조성의 유력한 부지로 거론되는 텍사스 주 오스틴 공장. 출처= 삼성전자
삼성전자의 새로운 파운드리 라인 조성의 가장 유력한 부지로 거론되고 있는 삼성전자 텍사스 주 오스틴 공장. 출처= 삼성전자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24일 경기 화성의 현대·기아자동차 기술연구소를 방문해 “기업들이 각자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이라면서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기업 규제의 혁파를 위한 정치 활동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외로는 대한상공회의소를 거점으로 한 기업계와 청와대의 핫라인 구축 등 직접적 대화 창구의 확대 역시 기업에 대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정부와 여당의 관점으로 해석되고 있다. 

세종대학교 경영학부 황용식 교수는 “이번 회담의 성과는 주요 기업들의 역할을 빼 놓고 절대 이야기 할 수 없다”라면서 “기업들도 정치권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입지를 확보했다”라고 말했다. 

황 교수는 “다른 무엇보다 코로나 정국 가운데서 초미의 관심사인 백신에 대한 국민적 불안감을 해소한 것은 높게 평가받을만한 성과를 낸 것과 더불어 기업과 정치권이 대립을 지속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윈-윈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번 회담의 결과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