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귀가할 때 어스름해지는 분위기가

덥지도, 차갑지도 않은 봄 공기와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아파트 초입에서 같은 아파트에 아래위로 사는 70대 어르신이 라일락 가지를 끌어내려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다가 나와 마주치자 그걸 황급히 놓는 모습입니다.

나이 들면서 후각이 무디어지니 그걸 당겨서 즐기는 것이리라 생각하고

지나치려했는데 너무 무안해하는 모습에 내가 많이 미안해졌습니다.

이봄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아우성으로 우리의 오감이 마비될 지경인데,

저 어르신의 경우처럼 감각의 쇠퇴를 맞닥뜨리는 기분은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무디어지는 것보다 오히려 남아있는 느낌에 시간을 들여 집중하며 즐기면 더 좋을 텐데...

그 순간 며칠 전 겪었던 서글픈 풍경화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구순에 가까운 부모님 댁을 방문, 이른 저녁을 같이 나누고

근처 사는 친구랑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습니다.

늦은 시간 부친께서 기다리다가 맞았습니다.

내 얼굴 보면 뭐하고 온지 뻔히 알 수도 있을 터인데,

나라구하는 수고하고 온 아들 맞는 것처럼 반갑게 맞으며

‘피곤할 테니 얼른 쉬 거라’는 말씀에 도무지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요.

적당히 눈이, 귀가 어두워진 탓일까요?

문득 과거 학창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교편에 있던 부친은 아주 엄했습니다.

하교 길에 딴 짓 하다가 늦게라도 귀가하는 날은

친구 집에 늦을 만한 일을 만들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친구와 수없이 만들었던 전과(?)가 생각났습니다.

그랬던 부친이었는데,

지금의 이 변화가 단순한 감각의 쇠퇴로만 읽히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부모의 마음 밑자락에는 언제라도 자식을 환대하는 마음이 있었겠지요.

자식인 내가 그걸 몰랐을 뿐.

감각이 마비될 만큼의 이 봄날 짙은 아우성속에

감각의 밑자락에 놓여있는 쇠퇴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소중한 마음을 만났습니다.

머리가 희끗해진 어느 연주자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이 들어가며 작곡가의 후반기 곡들을 연주하게 되는데,

그건 삶의 여러 단계를 지나친 작곡가가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을 빚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됨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 들었습니다.

이 또한 감각의 더 깊은 곳에서 길어온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