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삼성전자가 진퇴양난에 빠졌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난이 심해지는 가운데 바이든 행정부가 예정된 ‘청구서’를 내미는 한편 대중국 포위전선에 동참하라는 압박까지 받고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확대경제장관회의를 긴급 소집해 경제현안을 보고받는 가운데 분위기가 심상치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평가다.

이제는 삼성전자라는 기업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정부 차원의 대응 여부에 시선이 집중된다.

미국의 청구서

바이든 행정부는 12일(현지시간) ‘반도체 및 공급망 복원에 관한 최고경영자(CEO) 회의’를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화상으로 열었다. 회의에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대만 TSMC, 구글 모회사 알파벳은 물론 통신사 AT&T를 비롯해 커민스, 델 테크놀로지, 포드, GM, 글로벌 파운드리, HP, 인텔, 메드트로닉, 마이크론, 노스럽 그러먼, NXP, PACCAR, 피스톤그룹, 스카이워터 테크놀로지, 스텔란티스 등 19개 기업이 참석했다.

브라이언 디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이 회의를 공동 주재했으며 삼성전자에서는 DS(반도체)부문의 최시영 사장(파운드리 사업부장) 참석했다.

회의와 관련된 구체적인 아젠다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업계에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각 기업을 대상으로 현지 공장 인프라 증설을 종용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170억달러를 투자해 파운드리 라인업 증설에 나설 계획이다. 미 오스틴 공장 증설을 통해 파운드리 중심의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다만 최근 텍사스 이상기후 충격으로 미 오스틴 공장 증설에 있어 나름의 속도조절을 시도하고 있으며, 향후 반도체 수급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공급망을 조절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바이든 행정부의 인프라 투자 압박이 더해지며 부담도 그와 비례해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강력한 투자를 통해 현지 반도체 생산 기조에 보폭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으나, 그 투자 로드맵이 바이든 행정부의 의도와 만나 삼성전자의 손을 떠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다.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이 심각해지며 주요 완성차 업체 공장들이 속속 셧다운되는 가운데 이와 관련된 바이든 행정부의 ‘지침’이 마련된 것도 삼성전자에게는 부담이다. 삼성전자 입장에서 당장 바이든 행정부가 원하는 차량용 반도체 공급량을 늘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삼성전자와 같은 국내 기업들은 차량용 반도체를 거의 생산하지 않는다. 높은 마진을 남길 수 있는 초미세 공정으로 만드는 반도체가 주력이며 차량교체 주기와 맞아 떨어지는 차량용 반도체 제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회의를 통해 바이든 행정부가 각 반도체 업체에 차량용 반도체 공급량을 늘리라 종용할 경우 삼성전자처럼 관련 분야에 큰 노하우가 없는 기업들은 이에 따른 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차량용 반도체를 울며 겨자먹기로 제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차량용 반도체 제작에 나서지 않을 경우 바이든 행정부의 눈 밖에 날 수 있다. 무엇보다 인텔이 차량용 반도체 공급에 적극 나서겠다는 선언을 한 이상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더 좁아졌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인텔의 겔싱어 CEO가 회의 직후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6개월에서 9개월 내 차량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이 목표”라 언급했다.

에릭 쉬 화웨이 순환회장. 출처=화웨이
에릭 쉬 화웨이 순환회장. 출처=화웨이

대중국 포위전술에 휘말리다

바이든 행정부가 회의를 통해 반도체 품귀 현상을 국가안보위기로 규정한 지점도 눈길을 끈다.

현재 미국과 중국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당시의 미국이 중국과 일대일 대결을 펼치며 극단적인 무역분쟁을 일으켰다면 바이든 행정부는 다자주의에 방점을 찍었을 뿐 대중국 포위전선을 구사하는 압박의 수위는 사실상 동일하다.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2021년 전략적경쟁법’이라는 대중 견제 법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6년까지 인도태평양 지역에 6억5,500만달러 규모에 달하는 외교적 군사지원을 단행하는 한편 대만해협 등에서 벌어지는 중국의 군사무력시위에 대항해 추가로 4억5,000만달러를 지원하는 방안이 포함됐으며 중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 대북 유엔제재 이행을 압박하고 심지어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원하기 위해 1,000만달러를 책정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중국을 입체적으로 포위하고 압박하기 위한 전략인 셈이다.

이러한 중국 압박 전술이 강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바이든 행정부는 내부 인프라 강화에서도 ‘중국의 위협’을 당면한 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실제로 바이든 미 대통령은 7일(현지시간) 2조2,500억달러에 달하는 메머드급 인프라 투자 입법 및 법인세율 인상 필요성을 강조하며 “중국이 기다려줄 것 같은가”고 일갈했다.

그 연장선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도 국가적 위협으로 지목했으며 중국에 맞서 미국 중심의 반도체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냈다. 바이든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회의에서 “중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등에 강력하게 투자하고 있다”면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미국의 힘과 단합을 위한 순간”이라 강조한 이유다.

이에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인프라 확충을 위한 초당적 협력을 주문하며 중국을 사실상 ‘미국의 적’으로 규정하는 한편 지난 2월에는 글로벌 원자재 공급망에서 중국을 사실상 배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기도 했다.

중국과의 일전을 주장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강경기조가 반도체 전선에서도 고스란히 재연되며 삼성전자의 입장은 모호해졌다.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해야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커다란 반도체 내수시장을 가진 중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마냥 바이든 행정부의 기조에만 보폭을 맞출 경우 의외의 후폭풍에 휘말릴 수 있다.

중국이 이미 미국의 강력한 반도체 압박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에릭 쉬 화웨이 순환회장은 12일(현지시간) 중국 선전에서 열린 '화웨이 애널리스트 서밋'에서 최근의 반도체 품귀 현상 책임은 미국의 제재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마냥 바이든 행정부의 손만 잡는다면 중국과의 관계에 균열이 가며 새로운 ‘제재’를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국 정부는 지난 3일 푸젠성 샤먼에서 열렸던 한중 외교정상회담에서 우리 정부에 노골적으로 반도체와 5세대(5G) 이동통신 분야에서 협력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중국 역시 한국에 손을 내민 가운데,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미국이 내민 손을 두고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선택의 순간 다가온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조만간 추가 미국 투자를 발표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미 TSMC가 미 애리조나에 메가 팹 구축을 선언한 상태에서 3년간 1,000억달러를 투자한다 밝힌 상태다. 삼성전자도 오스틴을 중심으로 추가 투자를 단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단기적으로는 세제 혜택 등 ‘호재’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행정부가 백악관 회동을 통해 반도체 업체들에게 생산 시설 확충을 주문한 만큼 이에 따른 인센티브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지 일자리 창출에 있어 삼성전자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들의 추가 투자는 바이든 행정부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현지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하는 이유다.

다만 바이든 행정부가 자국 중심 반도체 제조 전략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과잉투자 압박을 받을 가능성도 크다. 그 연장선에서 ‘운용의 묘’가 절실하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당분간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는 물론 배터리 등 원자재의 자국 중심 생산과 조달을 일차목표로 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의 자국 중심 제조 인프라 전략이 강화될수록 중국과의 대결국면은 더욱 치열해질 가능성이 높고,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선택을 강요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면초가에 빠진 삼성전자가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15일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주요 기업 CEO와 전격 회동하는 지점에 시선이 집중된다.

청와대 강민석 대변인은 13일 서면 브리핑을 통해 "문 대통령이 오는 15일 확대경제장관회의를 소집한다"며 “주요 전략산업 현황을 점검하고, 대응 전략을 논의하기 위함”이라 밝혔다.

정부에서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김현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 문성혁 해양수산부 장관, 권칠승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구윤철 국무조정실장, 은성수 금융위원장 등이 참석하고 이정배 삼성전자 사장, 이석희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 공영운 현대자동차 사장, 최웅선 인팩 대표이사, 한국조선해양 가삼현 대표이사, 정진택 삼성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배재훈 HMM 대표이사 사장, 황호선 한국해양진흥공사 사장 등 경제계 인사들도 자리한다.

유영민 비서실장과 이호승 정책실장이 지난 9일 삼성전자 경영진과 회동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가운데 청와대를 중심으로 경제계 현안을 다루는 행보가 빨라지는 분위기다. 다소 늦은 타이밍이라는 지적도 나오지만 지금이라도 청와대가 산업현장의 엄중한 상황을 인지하고 대대적인 사태해결을 고민하는 것은 다행이라는 평가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투자를 삼성전자 일개 기업의 문제로 치부하기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면서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